인싸잇=한민철 편집국장 | 할리우드 영화배우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가 격투하는 AI(인공지능) 영상이 미디어 업계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실제인지 조작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생생한 영상에 미국 영화 업계에서는 저작권 침해와 AI로 인한 제작 생태계 파괴 등을 지적하고 있다. 반면 이들 콘텐츠 생산자와 다르게 소비자 사이에서는 이번 영상을 두고 AI 기술의 발전과 이를 통한 이익에 관한 우호적 반응도 적지 않다. 이에 AI 회사와 콘텐츠 생산자의 갈등이 콘텐츠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AI 회사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논란은 아일랜드계 영화감독 로우리 로빈슨이 자신의 SNS에 게시한 영상에서 비롯됐다. 해당 영상에는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가 폐허가 된 건물 옥상에서 결투하는 장면이 담겼다.
여기서 두 사람은 주먹을 주고받으며 성범죄 사건으로 사후에도 논란이 되는 미국의 사업가 제프리 엡스타인에 대한 농담조의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서 피트는 크루즈를 향해 “네가 엡스타인을 죽였어, 이 나쁜 놈. 엡스타인은 좋은 사람이었어”라고 말한다.
이에 크루즈는 “엡스타인은 러시아 작전에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어. 죽었어야 해. 이제 당신도 죽는 거야”라고 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엡스타인의 죽음을 둘러싼 세간의 의혹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엡스타인에 대해 모르고 있다면 이를 피트와 크루즈가 모처럼 촬영한 ‘B급’ 홍보 영상 또는 코미디 방송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영상 속 인물 묘사와 목소리, 움직임은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조작된 영상이다. 외신에 따르면, 로빈슨 감독이 AI 동영상 모델 ‘시댄스(Seedance) 2.0’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단 두 줄짜리 명령어로 이 15초짜리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시댄스 2.0은 틱톡의 모회사인 중국 바이트댄스가 지난 7일 출시한 AI 영상 생성 모델이다. 해당 영상은 SNS와 유튜브, 여러 매스컴을 통해 확산됐다.
할리우드, AI 플랫폼 저작권 침해에 강한 반발
할리우드 영화업계 관계자들은 이번 영상에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시댄스 2.0 이용자들은 이번 톰 크루즈-브래드 피트 결투 영상뿐 아니라, 영화 반지의 제왕과 어벤져스, 브레이킹 배드 등 영화 및 OTT 드라마의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영상도 만들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할리우드 영화업계는 해당 AI 플랫폼으로 인한 저작권 피해가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영국 방송사 <BBC>에 따르면, 미국의 주요 영화 스튜디오와 넷플릭스 등 OTT를 대표하는 미국영화협회(MPA)는 “시댄스 2.0이 미국 저작권 작품 다수를 무단으로 사용했다”고 반발하며, 문제가 되는 영상의 공유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MPA의 회장이자 CEO인 찰스 리브킨은 “바이트댄스가 침해를 막기 위한 실질적 안전장치 없이 서비스를 운영하고 출시한 것은,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수백만 미국인의 일자리를 뒷받침하는 저작권법을 무시하는 행위”라며 “바이트댄스는 즉각 침해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13일(현지시간) 디즈니는 마블과 스타워즈 등 자사의 저작권 캐릭터들의 불법 복제 라이브러리를 제공했다며 바이트댄스에 이를 중지 및 금지하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할리우드 배우 노조인 SAG-AFTRA도 “노골적인 저작권 침해”라며 바이트댄스를 규탄했다. 노조는 성명을 통해 “이 침해에는 우리 조합원들의 목소리와 초상에 대한 무단 사용이 포함돼 있다.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인간 배우들이 생계를 유지할 능력을 약화시킨다”며 “시댄스 2.0은 법과 윤리, 업계 기준, 기본적인 동의 원칙을 무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이번 영상을 두고 단순한 저작권 침해를 넘어, 자신들의 생존권마저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AI 기술이 더 진보한다면 배우의 연기와 촬영 등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진다는 우려가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 「데드풀&울버린」의 작가 렛 리스는 톰 크루즈-브래드 피트 결투 영상을 자신의 SNS에 공유하며 “말하기 싫지만, 우리는 아마 끝장일 것 같다”며 “머지않아 한 사람이 컴퓨터 앞에 앉아, 지금 할리우드 영화와 구분되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도 인기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의 AI 생성 영상이 온라인에 공유되자, 바이트댄스 등 중국 기업에 저작권 침해에 관한 조사에 돌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바이트댄스는 이번 논란이 확산하자 언론에 “시댄스 2.0이 실제 인물의 이미지를 업로드하는 기능을 중단했으며, 지적 재산권과 초상권의 무단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현재 안전장치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논란은 진정되지 않는 분위기다.
콘텐츠 생산자-소비자 갈등 확산 우려... 역할 커진 AI 회사
영화업계 종사자들은 톰 크루즈-브래드 피트 결투 영상에 대해 이처럼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지만, AI 회사나 영화업계와 관련 없이 해당 영상을 접하고 공유하는 일반인들 중에는 “놀랍다” 또는 “위대하다” 등 호의적 반응도 적지 않다.
실제 인물이 촬영했다고 믿을 정도로 영상의 완성도가 상당한 만큼, 이를 만들어 낸 AI 기술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는 영상 콘텐츠 소비자들이 진짜 톰 크루즈나 브래드 피트가 아니더라도, 더 싸게 그리고 더 다양하고, 빠르게 영상 콘텐츠를 접할 수 있다면 AI로 만들더라도 문제없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보여 준다.
특히 콘텐츠 생산자인 영화업계의 이런 민감한 반응은 오히려 콘텐츠 소비자의 입장에서 “필연적인 AI 기술의 발전을 저해하고,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불과하다”고 인식할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 이번 이슈는 AI 회사와 콘텐츠 생산자의 갈등에서 그치지 않고, 콘텐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AI 회사가 솔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들이 기술 발전을 지향하되 콘텐츠 생산자의 저작권을 철저히 보호하는 게 AI 회사와 콘텐츠 생산자 및 소비자 사이의 갈등을 방지하는 전제라는 것이다.
영국의 일간지 <더 가디언(The Guardian)>에 따르면,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제작한 영국의 영화감독이자 현 무소속 상원의원인 비번 키드론은 AI 회사들이 콘텐츠 업계와 협약을 맺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저작권 보호 운동을 이끌면서 지난해 AI 회사가 저작권이 있는 콘텐츠를 자사 플랫폼에 학습시킬 때 저작권자에게 반드시 알려야 한다는 내용의 데이터법 개정안 발의를 주도한 바 있다.
비번 키드론은 이번 시댄스 2.0에 관한 논란에 대해서는 “AI 업계가 콘텐츠 창작 업계를 만족시킬 만한 ‘진정한 제안(real offer)’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며 “그렇지 않으면 10년간은 소송전과 그들이 의존하는 산업의 파괴를 겪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AI 회사가 콘텐츠 생산자로부터 정당한 계약을 통해 저작권 사용을 허락받고, AI 플랫폼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생성해야 저작권을 둘러싼 갈등이 해결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이와 같은 사례는 이미 디즈니와 오픈(Open)AI 사이에서 이뤄졌다.
디즈니는 지난해 챗(Chat)GPT와 동영상 생성 플랫폼 소라(Sora)를 제작하는 오픈AI와 10억 달러(한화 약 1조 4434억 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챗GPT 등의 사용자들은 픽사와 마블, 스타워즈 등 디즈니 캐릭터를 자유롭게 활용해 새로운 콘텐츠를 생성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콘텐츠 소비자를 만족시키면서 AI 회사와 콘텐츠 생성자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모범적 사례로도 평가받고 있다.
아쉽게도 정부의 중재 부족과 업계 전체를 납득할 만한 법적 판례가 나오지 않아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실제로 영국 정부는 비번 키드론이 발의한 데이터법 개정안에 반대하며 AI 회사가 저작권자의 사전 동의 없이 저작물을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저작권자에게 이를 거부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즉 저작권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이상 AI 회사의 저작물 무단 사용을 정부 차원에서 용인하고 있다는 의미다.
또 일부 AI 회사들은 AI 플랫폼의 행위는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 단순 모방에 불과하고 ‘공정 이용’(fair use)에 해당한다며 콘텐츠 생산자들의 주장에 반발하고 있다.
이는 지난해 디즈니와 유니버설이 AI 이미지 생성 플랫폼 회사인 미드저니(Midjourney)를 상대로 제기한 저작권 침해 소송의 사례에서 엿볼 수 있다.
디즈니 측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연방법원에 해당 소송을 제기하며 “미드저니가 자사의 방대한 콘텐츠 라이브러리를 무단으로 이용해 AI 모델을 훈련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스타워즈, 슈렉, 미니언즈 등 유명 캐릭터 이미지를 무제한 생성·배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미드저니 측은 재판 과정에서 저작권자의 콘텐츠를 그대로 사용하는 게 아닌, 수십억 개의 공개된 이미지를 토대로 AI가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다른 독창적인 이미지로 합성하는 만큼, 저작권 침해로 볼 수 없다며 반박하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미드저니 측은 AI가 사용자의 표현을 위한 도구로써 디즈니 측의 콘텐츠를 차용한 ‘공정 이용’에 해당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디저니 측은 “저작권에 부여한 제한적인 독점권은 아이디어와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이라는 공익을 보호하기 위해 ‘공정 이용’에 양보해야 한다”며 “저작권이 있는 저작물에 포함된 통계 정보를 추출해 개념을 이해하도록 생성형 AI 모델을 훈련시키는 것은 전형적인 변형적 ‘공정 이용’ 사례”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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