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인싸잇]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영화에서 공연까지… 세계 무대로 뻗어나가는 콘텐츠의 힘(2)

20년 동안 사랑받는 작품의 무대화 전략과 공연 구조
배우와 연출로 구현한 애니메이션 세계관
일본의 소프트파워 전략과 IP 확장

 

애니메이션 영화의 실사화… 디테일까지 잡은 섬세한 무대 구현 방법은


애니메이션의 디테일을 무대로 전환한 방식은 이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한국 공연 프로덕션의 연출 전략을 말해주는 핵심이다. 무대 구성은 대형 스크린과 영상 효과를 최소화하고 ▲회전무대를 활용한 아날로그 기반 장면 전환 ▲인형극(Puppetry) 기법 ▲원근감 표현 ▲정확한 동선 처리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장면 전환 방식에서는 아날로그 기반 연출을 확인할 수 있다. 암전과 커튼 중심 방식이 아니라 회전무대와 문·출입구 세트 배치 변경을 통해 장면 전환의 연속성을 유지하도록 설계됐다.

 

초반 자동차 이동 장면은 배경 영상으로 이동감을 보조하되, 흔들림과 속도감은 배우의 상체 움직임과 리듬으로 구현해 영상 의존도를 낮췄다. 엘리베이터·복도 장면 역시 문 세트를 벽·출입구로 병용해 문 개폐 동작 자체가 공간 전환 장치 역할을 수행하도록 구성했다.


인형극 기법과 무대 기계 장치 활용도 비중 있게 확인된다. 가마 할아범의 팔과 숯검댕이 캐릭터는 여러명의 조종자가 인형을 동시에 조작하는 구조로, 배우의 신체 연기와 퍼펫·소품이 한 장면 안에서 함께 움직이도록 연출됐다. 디지털 그래픽을 사용하지 않고도 캐릭터의 존재감을 확보하는 데 최적화된 방식으로 평가된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핵심으로 불리는 원근감 구현에서도 역시 물리적 방식이 적용됐다.

 

하쿠의 용 변신 장면은 4m 크기의 대형 퍼펫을 포함해 장면별로 크기가 다른 퍼펫을 병행 사용해 스케일 변환을 통해 입체감을 조정했다. 원거리 표현에는 소형 용 모형을, 전면 비행 장면에는 대형 퍼펫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전철 장면은 소형 열차 모형을 무대 가장자리 레일에 따라 이동시키는 구조로 운영되며, 조명·음향은 이동 동선에 맞춰 조정해 제한된 공간에서도 거리감을 확보했다.


원작의 SF적 장면을 공연 언어로 치환하는 과정도 인상적이었다. 치히로의 신체가 투명해지는 장면은 얇고 비치는 천을 활용해 물리적으로 처리했고, 하쿠가 건네는 당고는 LED가 삽입된 붉은 구 형태 소품으로 제작해 시인성을 높였다. 이는 영상 중심 연출 대신 실물 소품 기반으로 장면을 재해석한 사례에 해당한다.

 

무대 운영 방식에서도 세밀한 설계가 확인된다. 필자는 배우들의 표정과 소품 움직임을 보다 정확하게 관찰하기 위해 오페라글라스를 사용했는데, 무대 바닥에는 장면별 위치와 동선을 안내하는 색상별 마스킹 테이프가 촘촘하게 배치돼 있었다.

 

무대 끝에서 끝까지 이어지는 이 마킹을 따라 연출이 진행되면서, 무대 전체가 마치 영화관 화면처럼 여백 없이 채워진 하나의 장면으로 구현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문 연출, 퍼펫 이동, 대형 소품 운용 등은 모두 이 마킹을 기준으로 오퍼레이션이 이뤄져 장면 전환의 정확성을 확보했다. 이처럼 애니메이션 장면을 디지털 기술 의존도를 낮추고, 회전무대·물리적 장치·인형극 등 오퍼레이션 시스템으로 전환해 구현한 점은 이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무대 연출의 핵심 특징으로 평가된다.

 

 

4년간 축적된 오리지널 캐스트 호흡과 연기파 배우 뉴 캐스트가 주는 안정감

 

무대 위에서 연출 뿐만 아니라 인상적이었던 점은 참신하고 섬세한 아날로그 연출 못지않게 작품 전체를 받쳐 주는 탄탄한 팀워크였다.

 

이번 서울 공연에서 치히로 역은 카미시라이시 모네와 가와에이 리나(川栄李奈)가 더블 캐스트로, 하쿠 역은 다이고 코타로·마스코 아츠키(増子敦貴)·아쿠츠 니아(阿久津仁愛)가 트리플 캐스트로 무대에 올랐다.

 

필자가 관람한 회차에는 치히로 역의 카미시라이시 모네(上白石萌音), 하쿠 역의 다이고 코타로(醍醐虎汰朗), 유바바 역의 타카하시 히토미(高橋ひとみ)가 출연했다.

 

18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카미시라이시 모네와 다이고 코타로는 흔들림 없는 호흡을 보였다. 생동감 있는 연기는 물론, 공연을 거듭하며 자연스럽게 쌓인 합이 느껴지는 말 그대로 ‘이유 있는 안정감’이었다.

 

이 안정감의 출발점은 2022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공연이 시작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연 이후 이번 서울 내한에 이르기까지 제작진은 핵심 배역을 중심으로 같은 배우들을 계속 기용하며 안정적인 캐스팅 체계를 유지해 왔다.

 

특히 치히로 역의 카미시라이시 모네와 하쿠 역의 다이고 코타로는 2022년 초연부터 4년째 함께 주연을 맡아 온 오리지널 캐스트다.

 

2022년 일본 초연을 비롯해 런던·중국·서울 공연까지 전 시즌에 이름을 올리며 핵심 배우로 자리 잡았다. 

 

4년 동안 해외 공연을 함께 소화하며 맞춰 온 호흡은 시선과 동선, 대사와 장면이 매끄럽게 이어지져 긴장도가 높은 장면에서도 흐름이 깨지지 않는다.

 

일본 커뮤니티에서는 두 주인공을 두고 ‘모네·다이고 콤비’, ‘안정적 파트너’라고 부르고 있다.

 

 

주연 라인뿐 아니라 유바바 역도 공연의 인상과 완성도를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캐릭터이다.

 

영화에서 유바바의 목소리를 연기했던 나츠키 마리(夏木マリ)는 2022년 초연부터 무대에 선 오리지널 캐스트다. 원작 공개 이후 20년 넘게 같은 캐릭터를 연기해 온 배우가 직접 무대에 선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공연의 존재감을 한층 부각하게 만든다.

 

아울러 이번 서울 공연에는 나츠키 마리 외에도 연극·버라이어티·드라마를 오가는 하노 아키와 연기 경력이 풍부하고 연기파 배우로 불리는 타카하시 히토미가 유바바 역에 캐스팅해 연기파 배우들의 활약이 이어졌다.

 

세 배우 모두 일본 현지에서 발성과 딕션은 물론 연기력까지 검증된 배우로 유바바의 분노와 탐욕, 코믹함과 위압감을 각기 다른 해석으로 구현해 캐릭터에 입체감을 더했다.

 

특히 필자가 관람한 회차에서 유바바를 맡은 타카하시 히토미는 일본 연기파 배우답게 원작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무대 환경에 맞게 캐릭터를 확장했다.

 

묵직한 발성과 리듬감 있는 말투를 통해 유바바의 위압감과 쌍둥이 언니 제니바의 부드러운 강단을 동시에 표현해, 타카하시 히토미가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높은 몰입감을 이끌어냈다.

 

이 공연의 연대기와 해외 투어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초연부터 작품을 이끌어 온 오리지널 캐스트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려운데, 단순한 캐스팅 조합을 넘어선 장기 파트너십이 공연 전체의 안정감을 끌어올렸다는 분석이다.

 

일본 전역 공연을 넘어 해외 무대까지 흔들림 없이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 주연 배우들의 축적된 호흡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초연부터 작품을 지켜 온 오리지널 캐스트에 그치지 않고 연기파 배우들을 기용해 새로운 캐스트가 한 무대에서 교차하는 구조, 그리고 수년간 축적된 출연진의 경험이 작품의 중심을 지탱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더 나아가 오리지널 캐스트의 경험 위에 새로운 캐스트의 해석이 더해지면서 과거 명작의 재현물이 아니라 현재 공연 시장에서 소비되고 평가되는 현재형 공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왜 韓에서 뮤지컬이 됐나


뮤지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내한 공연이 확정되자, 1차 티켓 오픈과 동시에 매진되는 등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막을 올렸다. 지나간 20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세대를 넘어선 일본의 소프트 파워 흡인력을 입증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장기적인 소프트 파워 전략을 한국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할까.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한국에서는 ‘뮤지컬’로 소개됐지만, 일본과 세계 투어를 거친 영국 등에서는 일관되게 ‘연극’으로 분류됐다는 점이다.


실제로 해당 공연은 노래와 오케스트라를 포함하고 있으나, 대사와 연기가 공연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전통적인 뮤지컬 문법으로 분류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때문에 국내 관객들 사이에서도 ‘뮤지컬이 아닌 연극이다’는 지적도도 이어진다.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별개로, 연극으로 제작된 작품이 작품의 형식과 무관하게 국내 공연 시장의 흥행 논리에 따라 ‘뮤지컬’로 호명된 셈이다.


이는 한국 공연 시장이 연극보다 뮤지컬 소비에 편중돼 있다는 구조적 특성과 맞물려, 흥행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원어 공연에 대한 리스크를 장르 명칭으로 상쇄하려는 국내 공연 산업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강국에 머무르지 않고, 만화·영화·연극·콘서트 등 다양한 장르로 IP를 장기적으로 확장해 왔다. 공연·전시·굿즈로 이어지는 콘텐츠 파생 산업 역시 체계적으로 구축돼 있다. 반면 드라마 강국으로 불리는 한국은 여전히 영상 콘텐츠를 무대·공연·라이브 산업으로 연결하는 데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이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내한 공연은 일본의 장기적 소프트 파워 전략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는 사례로 평가된다. 동시에 한국 공연 산업이 특정 장르에 머문 채, 자국 콘텐츠의 확장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되묻게 한다.

 

뮤지컬 중심의 산업 구조를 넘어, 뮤지컬 장르만 활성화될 것이 아닌, 10년, 20년 이상 장기적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경쟁력을 갖춘 다양한 장르로 확장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