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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인식문제연구회 세미나] 사도금산에서의 조선인 전시노동 실태 (5)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발표문 ‘1940-5년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의 이주, 동원, 근로환경, 그리고 일상생활 - “강제연행”·“강제노동”론(論) 비판 –‘


※ 본 자료는 2022년 3월 23일, 일본 역사인식문제연구회(歴史認識問題研究会, http://harc.tokyo)의 학술 세미나 ‘사도금산에서의 조선인 전시노동 실태(佐渡金山における朝鮮人戦時労働の実態)’에서 발표된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발표문 ‘1940-5년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의 이주, 동원, 근로환경, 그리고 일상생활 - “강제연행”·“강제노동”론(論) 비판 –(1940~5年 佐渡鉱山朝鮮人労働者の移住、動員、勤労環境、及び日常生活 ―『強制連行』・『強制労働』論批判―)(한국에서 원격 발표)입니다. 사진과 캡션은 미디어워치가 별도로 덧붙였습니다.



[일본 역사인식문제연구회 세미나] 사도금산에서의 조선인 전시노동 실태


1. 머리말 : ‘사도금산에서의 조선인 전시노동 실태’에 관하여


2. 니시오카 쓰토무 역사인식문제연구회 회장의 발표문 ‘조선인 전시노동과 사도킨잔’


3. 카츠오카 칸지 레이타쿠대학 교수의 발표문 ‘전후 일본의 조선인 전시노동연구사’


4. 야마모토 유미코 나데시코 액션 대표의 발표문 ‘ILO조약의 해석과 관련해 전시노동은 강제노동조약 위반인가?’


5. 나가타니 료스케 역사인식문제연구회 연구원의 발표문 ‘사도킨잔의 조선인 전시노동의 실태’


6.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발표문 ‘1940-5년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의 이주, 동원, 근로환경, 그리고 일상생활 - “강제연행”·“강제노동”론(論) 비판 –‘


7. 황의원 미디어워치 대표이사의 발표문 ‘한국내 일본 사도금산 세계유산등재 반대운동 실태‘




1940-5년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의
이주, 동원, 근로환경, 그리고 일상생활 
- “강제연행”·“강제노동”론(論) 비판 -
(1940~5年 佐渡鉱山朝鮮人労働者の
移住、動員、勤労環境、及び日常生活
―『強制連行』・『強制労働』論批判―)


이우연(李宇衍, 한국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발표자소개] 한국 전라남도 광주 출생으로, 성균관대에서 이씨 조선 후기 이래 산림과 그 소유권의 변천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 하버드대학 방문 연구원, 규슈대학 객원교수,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서울의 중심에서 진실을 외치다(ソウルの中心で真実を叫ぶ)’(일본어번역판, 후소샤 2020년), 공저로 이영훈 편집 ‘반일종족주의(反日種族主義’(일본어번역판, 분게이슌주, 2019년), 이영훈 편집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反日種族主義との闘争)’(일본어번역판, 분게이슌주, 2020년) 등. 



1 조선인 전시동원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전시기(戰時期) 사도광산으로의 조선인 이민과 동원에 관한 한국과 일본의 언론보도와 선행연구는 모두 비전문가 또는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연구자가 1965년에 출간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朝鮮人强制連行の記錄)’을 카피엔페이스트(copy and paste)해온 것에 불과하다.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의 저자는 일본 조총련의 조선대학(朝鮮大學) 교수로서, 이 책의 저술이 한일 국교회복을 저지하기 위해서였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조선인을 일본으로 데려가는 과정은 “노예사냥”, 즉 ‘강제연행’이었고, 일본에서의 노동은 “노예노동”, 즉 ‘강제노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조선인을 동원하는 방법은 ‘모집’, ‘관알선’ 및 ‘징용’, 세 가지가 있었는데, △ ‘모집’은 일본에서 회사 직원들이 와서 농민들에게 공지하고 문자 그대로 모집하는 것, △ ‘관알선’은 모집과 동일하되, 법률적 규정은 없지만 면(面)사무소와 경찰 주재소가 일본에서 파견된 모집담당자를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것, △ ‘징용’은 법적 강제 하에 시행되었던 것이다(응하지 않을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엔 이하의 벌금에 처했다. 1939~45년에 서울 쌀 1석(石) 도매가격이 38~47엔이다. 김낙년·박기주·박이택·차명수 편(2018), ‘한국의 장기통계 II’ p. 822). 

단, 징용도 영장의 발부로부터 시작하여 그 수령, 신체검사, 검사 결과의 통지를 거쳐 합격자가 소정의 장소와 시간에 출두하기까지 두 주 가량의 시간이 소요되는 법률적 절차를 밟아 진행되는 것이었던 만큼, “집에서 자고 있는데”, “논에서 일하고 있는데” “끌고 갔다”라는 기억은 역사적 실태와 다르다. 이는 한국전쟁에서의 ‘가두징집’(영장 없이 학교 앞, 집이나 길에서 강제로 하는 징집)과 식민지기의 전시동원에 관한 기억이 서로 착종하고 혼동함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사도의 사례 : 임금에 관하여

1939년 9월 이후의 ‘모집’과 달리, 1942년 2월 이후 취해진 ‘관알선’이라는 조선인 동원방법은 1940년 조선총독부의 ‘노무자원조사’에 근거한다. 관알선에 의한 동원에 있어서 조선인의 반응과 그로부터 읽을 수 있는 “강제성”의 정도가 매우 다양했던 것은 그것을 강제하는 단일한 규칙으로서, 동원방법과 불응자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법률이 없었고, 단지 일본에서 건너온 회사 노무계 직원 그리고 조선의 면서기와 주재소 경찰이 조선 청년에게 행정적으로 홍보, 권유 또는 강제하였기 때문이다.

사도광산에는 1939년 9월 일본정부에 의한 전시노무동원 개시와 1940년 2월부터 시작된 사도광산의 모집 실시 이전부터 조선인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와 취업한 출가(出稼)노동자가 존재했다. 이들은 직접 전시노동자들을 지도·관리하거나 그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전시동원은 큰 범주(당면 전쟁의 승리라는 일본정부의 정책적 지향과 무관하게), 기업 입장에서는 노동력 부족에 대한 대책이었고, 조선인에게는 조선반도 밖으로의 노동력이동, 이민이었다. 이렇게 보면 전시 조선인의 일본행은 큰 범주에서 해방 이후의 해외이민과 연속적인 성격을 갖는다.

다른 사업장과 마찬가지로 사도광산에서도, 1944년 9월 이후의 징용노동자를 포함하여, 조선인 전시노동자에게 임금을 정상적으로 지불하였다. 강제저축, 근로소득세, 건강보험료, 연금보험 등을 공제(차감)하고 그 나머지를 조선인에게 지급하였는데, 그 공제 항목은 일본인 근로자와 동일하며, 저축을 제외하면 공제액은 큰 금액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의 가족에게 송금하거나 현지에서 소비하는 등 지출 방법으 결정할 수 있었다. 공제 항목에서 액수면에서 일본인과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저금인데, 그 이유는 일본인과 달리 조선인 가운데는 가족이 없는 단신(單身) 노동자가 대부분이었고 따라서 저축할 수 있는 여력이 일본인 가족 부양자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사도광산이 조선인에게 지불하지 않거나 미처 지불하지 못해 법무국에 공탁한 1인 평균 203엔이라는 액수, 또 미쓰비시에 비견할만한 다른 거대 재벌인 미쓰이 계열사의 공탁금액을 1945년 경의 조선인의 월급(사도광산의 경우, 평균 100엔 이상) 수준과 비교하면, 그 금액은 1~2개월 월급에 해당하여 대단한 고액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강제동원론자들은 공탁이 있다는 그 자체를 근거로 하여 조선인 동원의 경제적 “수탈성”을 주장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 종전 이전 도망자나 종전 후 급거 귀환한 자의 경우, 정산하고 돌려받아야 할 돈이 소액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강제저축 등 근로자에게 인도되지 않고 급료로부터 공제된 금액은 그것을 포기하는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간 정상적으로 수령해 온 임금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소액이었다. 공탁금을 두고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강제노동의 근거로 삼거나, 계획적, 조직적, 대규모적, 민족차별적 착취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 

3 사도의 사례 : 일상생활과 대우에 관하여


사도광산을 포함하여 전시기 일본으로 간 조선인의 주거(기숙사 사용료, 사택의 경우 임대료, 목욕장 등 공동시설은 무료거나 시장가격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었다), 주식(主食: 미, 맥, 두류, 기타)과 칼로리 섭취는 조선에 남아 있는 농민은 물론이고 사업장 바깥에 있는 일본인보다도 훨신 좋았다. 종전 직전, 사업장 내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식량과 식단은 동일했는데 조선인은 일본인보단 대식(大食)하였으므로 그로 인해 조선인 입장에서는 식사 제공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였고, 향신료(고추, 마늘 등)가 제공되지 않았고, 그것이 조선인의 불만을 초래했다. 종전 직전, 흉작과 미군 폭격에 의해 유통체계가 손상, 원할히 작동하지 못하게 되자 조선인이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식량부족으로 큰 곤란을 겪는 지역, 경우가 있었다. 향후, 일본으로 간 조선인과 조선에 있던 농민의 생활수준을 체계적으로 비교하는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사도광산은 다른 조선인을 동원한 사업장에 비해 가족과 생활하는 자가 많았다. 전쟁 이전부터 노동이민으로 온 조선인, 또 1939년 이후에 전시노무동원과 무관하게 일본으로 건너와 취업한 노동이민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사도광산을 비롯하여 전시기에 조선인이 동원된 사업장에서 조선인 사망자나 중상자가 일본인보다 많은 것은 특별한 민족차별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업장의 노동수요와 노동공급이 일치한 결과였다. 즉 건강한 청장년 일본인은 군대로 징집되었고(해외에 있는 일본군은 1937년 65만 명, 43년 358만 명, 44년 540만 명, 45년 734만 명으로 폭증했다. 전시 말기에는 20-40세 남성의 60.9%가 군에 있었고, 200만 명이 사망하였다. 본토 내에 건강한 청장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본 사업장은 건강한 청년이 필요했고, 그렇게 동원한 그들을 갱외노동보다는 근력이 필요한 갱내노동에 배치한 결과이다.

다른 사업장에 비교하면, 사도광산은 집단쟁의가 훨씬 적었다. 1940년 동원 개시 이후 조선인 쟁의는 총 3건이었는데, 그 원인은 기숙사에서 지급되는 식사량의 부족, 작업용품의 대여비용, 도박으로 경찰에 신고된 동료를 “구출”하려다 발생한 사건이었다. 

4 도망은 강제노동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사도광산의 조선인 도망자의 비율은 다른 사업장에 비해 훨씬 낮다. 조선인에 대한 처우가 양호하였고, 탄광과 달리 사고의 위험도 작았고, 또 많은 조선인이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전시노무동원 노동자는 다수가 도망하였는데, 이는 전쟁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또 조선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인에 비해서 훨씬 낮은 비율이었지만, 일본인도 역시 상당한 규모가 도망하였다.

“강제노동론”파의 주장과는 달리, 도망을 “조선인의 저항”으로 볼 수 없다. 조선인은 조선인 중 약 60%가 동원된 탄광이나 사도광산과 같은 기타 광산에서 지하노동을 하기를 기피했을 뿐이다. 사업장에서 일하다가 도주하는 자는 물론이고, 여행비용을 들이지 않고 안전하게 일본으로 도항하는 방법으로 노무동원을 이용한 자, 즉 후쿠오카 등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도망하거나 오사카, 교토, 도쿄 등 중간 기착한 대도시에서 미리 연락해둔 조선인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도주한 자, 계약기간 종료 후 귀환비용을 회사로부터 받은 후 도망한 자, 그때 가족은 귀환시키고 자신만 새 직장을 찾아 도주한 자 등, 이들 모두가 조선으로 귀환하지 않고, 일본 내에서 보수나 근로환경이 더 좋은 곳에서 취업하였다. 이들 도망자를 찾아내기 위한 일본 정부의 특별한 정책이나 수단은 발동된 일은 그다지 볼만한 것이 없고, 도망자가 적발된다고 해도 월급의 20~40%에 해당하는 벌금에 처해졌을 뿐이고, 그들에게 가장 큰 처벌은 오히려 조선으로 강제 송환당하는 것이었다. 하물며 군수공장이나 전쟁 시설을 건설하는 현장에서도 이 도망자들을 기꺼이 고임금으로 고용하였는데, 이들 사업장 모두 현금은 매우 풍족했지만 노동력이 극히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무시한 채 도망을 “저항”, 나아가 “잔제(反帝)” “반전(反戰)” 투쟁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역사왜곡이다.

사도광산에서도 1945년 8월 15일 종전 후에 다른 사업장에 취업해 있던 도망자 가운데서 적지 않은 조선인이 귀사(歸社)하였는데, 이는 다른 사업장과 마찬가지로 사도광산 측에서 도망자에게도 조선으로의 귀환비용을 지급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다.

5 역사적 사실을 밝혀라

조선인 동원은 “강제연행”이었는가? ‘모집’과 ‘관알선’에서 면사무소나 주재소의 행정적 지원이 있었고, 때로는 그것이 “강압적”이었지만, 조선인과 일본 기업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경제적 계약이었다. 계약은 조선이나 일본 사업장 도착 후에 체결되었다. 조선에서 총독부 관헌이 위압을 행사하여 일본행을 강요한 사례가 관알선에서 종종 발견되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조선 내에서 도망하는 등, 조선인이 일본행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에 일본 기업이나 총독부가 법률적으로 강제할 방법은 없었다. 이와 달리 징용은 법률적 제재(制裁)를 동반하였고, 그 개념 자체가 그렇듯이 그 동원은 강제였다. 즉 징용의 경우, “강제동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 자명한 사실이지만, 모집과 관알선의 경우에 면사무소나 조재소가 발동하는 위압을 “강제동원”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조선인 동원을 “강제노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국과 일본의 좌익세력은 국제노동기구(ILO)가 1932년에 공포하고 일본도 동년에 비준한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Forced Labour Convention)’에 의거할 때, 조선인 전시동원은 강제노동이었고, 일본은 이 협약을 위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쟁은 공동체와 국가의 존속에 관련되는 것이므로 그 노동은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해석도 강력하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이 이 협약을 비준한 것도 2021년 2월의 일이었고, 그만큼 각국의 사정에 따라 조약의 해석과 적용이 달라진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과 관련하여, 더 중요한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법률이나 조약 상의 개념을 파악하는 현재 우리의 인식’의 관계에 대한 문제다. 이 개념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이 역사라는 객관적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세력들이 위 법률이나 조약 상의 “강제노동” 개념에 얽매여 있고, 또 자신들이 스스로 구속되기를 마다 하지 않은 바로 그 개념으로 한국과 일본 국민들까지 구속하려고 한다. 그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강제노동”이라는 개념을 규정해 두면 그에 따라 자연히 형성되고, 실제로 그렇게 전대되어 왔던 역사에 대한 주관적, 집단적, 이데올로기적인 “이미지”, 즉 지배적인 기존 역사상(歷史像)을 자유로운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시노무동원이 “강제노동”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대해, 법률이나 조약을 해석하는 데 앞서 역시 우선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밝혀야 한다.

조선인 전시노동자의 노동을 “강제노동”이라고 할 수 없다. 우선, 모집과 관알선은 그 성질이 계약관계였고, 따라서 계약기간이 양자 간에 합의되거나 적어도 명기되었다. 사도광산에서 1940년에 조선인을 모집할 때 계약기간은 3년이었지만,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2년이었다. 일본 기업은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계약기간이 종료된 조선인이 계약을 갱신하여 취업기간을 연장하도록 고향방문, 장려금 지급, 임금인상, 가족초청 등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였다. 일부에서 계약 연장을 강요하였다고 주장하나, 그 또한 법률적 강제수단을 갖추지 못하였고, 계약기간이라는 면에서 그 약속을 빈번하게 위반한 것은 조선인 측이었다. 기업에게 어떠한 배상도 하지 않은 채 임의로 사업장을 떠나는 도망이 무려 40%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계약기간 종료 후 조선으로의 귀환이나 재직 중인 사업체와의 재계약을 결정하는 권한과 자유는 조선인에게 있었고, 협상력도 조선인이 더 컸다. 

일본 기업에서 근로에 태만할 뿐만 아니라 성실한 근로보다 “집단행동”에 집중한 조선인들을 “불량(不良)”하라고 조선으로 강제 송환하였고, 중간에 부모의 장례등 가정사가 있거나 계약기간을 연장한 근로자에 대해서는 “일시귀향”을 허용하였지만, 많은 이들은 귀사(歸社)하지 않았다. 이 사실도 “강제노동”이라는 주장과 양립할 수 없다. 당시 조선인 전시노동자는 일본인 공장노동자나 사무직 근로자보다 높은 임금을 지급받고 있었고, 질병 따위로 인한 결근을 허용하는 등 일반적인 노동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사도광산의 조선인을 포함하여 주색잡기(酒色雜技)가 문제가 될 만큼 일상생활은 자유로웠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조선인의 노동생산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규칙·제도라는 수준에서는 노동, 근로환경, 의식주에 있어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는 일은 없었다. 근로시간 종료 후나 1개월에 2-4회였던 휴일의 외출도 자유로웠다. “철조망을 친 담벽”이나 “망루”, 조선인의 노동이나 탈주를 감시하는 “총을 든 군경”이 있었던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 영화 ‘군함도’ 따위에서 그려지는 “조선인 강제노동”은 신화(神話)다.

6 자신의 의지로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

조선인 “전시노무동원”이 이루어지던 1939~45년에 일본으로 도항한 조선인은 약 240만 명이다. 그러나 일본 기업과 정부가 전시동원으로서 데려간 것은 그 중에서 약 72만 명에 불과했다. 이들을 “전시노동자”라고 부르자는 일본측 제안을 수용할 수 있다. 그 외에 168만 명이 전시동원의 개시와 함께 전에 없이 크게 열린 자유로운 도항의 문을 통해 일본으로 이주했고, 그 대부분은 돈벌이를 위한 몇 년의 단기 노동이민이었다. 일본행에 대한 규제가 현저히 약화되고 일본 내 노동력이 극도로 부족하였으므로, 통계에 잡히지 않는 다수의 밀항자도 존재하였지만, 그 수는 알 수 없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와 같이 전시동원과 관계없이 돈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온 노동이민자를 “일반노동자”, “집단 이입 외 노동자”라고 하였다.


동 기간, 전시동원으로 일본에 온 72만 명 중에서 약 25%가 모집, 40%가 관알선, 35%가 징용 방식을 통했다. 모집은 기본적으로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고, 관알선과 징용에서도 약 4할이 도주하여 건설현장 등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전시노무동원”과 무관한 일용직 “자유노동자”가 되었으므로, 전시노동자 중 55%(25%+75%*0.4)인 약 40만 명이 자유의사를 관철한 것이다. 관알선이나 징용으로 일본에 왔지만, 전시동원을 고소득의 일자리로 적극적으로 수용한 자(계약을 연장한 자나 계약기간 종료 후 다른 사업장에 취업하는 것으로 그 의사를 드러낸 자 등)도 적지 않았을 것이나, 그 수는 아직 알 수 없다. 보수적으로 추론하면, 전시노동자의 45%, 즉 32만 명 가량이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본으로 이동한 것이다. 

240만 명 중 32만 명으로 1939-45년간 이루어진 조선인의 일본 이주라는 한국사 최초, 가장 큰 인구이동의 성격을 규정할 수는 없고, 208만 명을 중심에 놓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도광산의 예에서 보듯이, 1939년 9월 이전에 이미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사도광산과 함께 또 하나의 대규모 금광인 스미모토고노마이 금산(住友鴻之舞 金山)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전시노동자를 지휘·관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사도광산만 아니라 다른 사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들 208만 명 이상의 자유로운 이주 노동자와 32만 명의 전시노동자는 서로 무관한 존재가 아니었다. 양자는 일본 노동시장에서 공존하고 때로는 같은 사업장에서 근무하였다. 도망은 전시노동자가 자유로운 이주 노동자가 되는 루트였고, 전시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업장은 지상(地上)노동이나 상대적 고임금과 같이 더 유리한 조건 하에 있는 자유 이주노동자의 존재를 의식하여야 했다.

전체로 봐서 이 기간은 한국사에서 최초로 최단기간에 자유 노동이민이 폭발한 시기였고, 그 주체들은 넓어진 경제활동의 영역을 개척한 해외 자유이민자로 규정할 수 있다. 187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기간의 소위 “제1차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이루어진 국제이민과 독립 이후에 전개된 한국의 국제이민이 바로 이 시기에 시작된 것이다. 비록 그 형태가 식민지적·전시적(戰時的)이었으나 기본 성격은 해외이민이었다. “식민지적”이라고 함은 이 이민이 지배국 일본의 규제 하에 이루어졌고, 이민자는 “2등 국민”의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1937년 이후 조선인의 일본 도항 정책이 급변하였고, 조선인의 이주는 그에 규정되었다. “2등 시민”은 “2등”임에 따르는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의 가능성을 말하지만, 다른 한편 “식민지적”이었다고 함은 조선인이 외국인이나 적국 전쟁포로가 아니라, 일본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지녔음을 뜻한다. 조선인은 “징용”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자유를 위한 도망”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 그를 잘 표현해준다. 

전시 조선인 이민이 “전시적(戰時的)”이었다는 것은 노동이민이 전쟁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이루어져 취업의 자유가 제한되는 경우, 즉 조선인 전시노동자를 상대로 하여 탄광이나 광산과 같이 조선인이 기피하였던 직종이 우대·강제되는 상황도 엄존하였다는 측면을 가리킨다. 이와 동시에 전쟁이라는 상황은 이민의 가능성을 단기간에 급속히 폭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일본인 남성의 대규모 징집에 의해 초래된 노동력의 부족으로 인해, 조선인에 대한 처우는 시장균형이 아니라 일본 정부나 기업의 경영 외적 정책에 결정되었고, 이는 역설적으로 식민지 피지배 인민이 그들의 인적자본 수준을 상회하는 후우(厚遇)를 받는 상황을 초래했다. 전시이민은 이와 같이 일견 모순되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39-45년에 이루어진 일본을 향한 조선인의 이동을 “해외이민의 식민지적·전시적 형태”로 파악하고, 전시노무동원도 그 일환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라는 문제 역시 한일 양국 국민이 그러한 관점에서 공감하고 수용하여야 할 것이다.


관 알선


관알선’은 일본 기업에서 파견된 직원들과 함께 관헌(군면 사무소 직원과 주재소 경찰)이 다른 한 축이 되어 실시되었지만, 그들을 통제하는 단일한 법률을 구비하지 못한 행정적 조치에 의해 동원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동원의 성과는 그들의 헌신성에 따라 상이하였다. 


즉 1) 동원의 절차와 불복 시의 처벌을 규정한 강제적인 법률상의 근거를 갖지 못하였으므로 결정적인 집행력을 가지지 못했다. 2) 동원 과정은 모집과 인솔을 담당하는 일본 기업 노무과 직원의 노력 여하, 군(郡) 노무담당자와 면서기, 경찰서와 주재소 경찰, 지주나 구장(區長) 등 지역 유력자의 협조와 적극성 여하, 농촌 조선인의 협조, 기피와 저항 여하의 조합에 따라 여러 다른 모습으로 현상하였다. “강제나 다름없는”, 즉 “연행”이 나타나기도 하고, 조선인에게 “제발 가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따라서 동원 실적도 군면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전시동원이 이룬 성과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계획 인원에 비교한 동원 인원 수와 함께 ‘도망’의 빈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도망을 두고 조선인이 일본행 자체를 거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들은 석탄을 캐는 탄광이나 금을 캐는 지하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광산 따위의 직종을 기피한 것이다. 일본 사업장에서 도주하더라도 조선의 고향으로 귀환하기는커녕 건설현장이나 공장 등 다른 사업체에서 근무하는 선택을 취한 것이 그 근거가 된다. 이 점에서 조선인의 도망은 최근 한국, 일본 등지에서 동남아에서 온 근로자가 사업장으로부터 도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이다.  


1940년 3월 12일, 총독부 내무국장은 각 도지사에게 ‘노무자원 조사 관련 건(勞務資源調査ニ關スル件)’을 통첩했다. 1939년 3월말 기준으로 “각자의 지방 실정을 고려하여 이상(理想) 경지면적을 설정하고, ‘노무자원조사표’를 작성하여 4월 말일까지 조선총독부에 제출”하도록 지시했다(노영종(2016), p196). 1개 면에 5명씩의 조사원을 두도록 하였는데, 전국 2,271개 면에 총 11,355명이 동원되었다.(노영종(2016), p198) 예를 들어, 충청남도는 관할 167개 면의 노무자원을 조사하여 1940년 5월 17일에 내무국에 보고했다. 835명의 조사원이 16,700호(총호수 223,372호의 7.8%에 해당한다)를 조사한 것이었다.(노영종(2016), p294)



조선총독부가 조선 전역의 노동력 자원을 처음으로 조사, 검토한 것은 1939년 7월로 확인된다. 이를 거쳐 1940년 3월 12일 내무국장 명의로 각 도지사에게 ‘노무자원 조사 관련 건’을 통첩함으로써 총독부는 도를 통해 각 군, 읍면에 대하여 1939년 3월말 기준으로 ‘각자의 지방 실정을 고려하여 이상(理想) 경지면적을 설정하고, ‘노무자원조사표’를 작성하여 4월 말일까지 조선총독부에 제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조사에서는 부와 읍을 제외하고 ‘면’만을 대상으로 한 점과 노동 출가(出稼, 타관벌이) 또는 전업(轉業)이 가능한 자의 수와 그것을 희망하는 자의 수를 조사한 것이다.(노영종(2016), p196).


각 도는 조선총독부의 예산지원을 받아 각 면 내에서 ‘면내 사정에 통효(通曉)한 자’를 조사원으로 임명하여 노무자원을 조사하게 하였다. 1개 면에 5명씩의 조사원을 두도록 하여 전국 2,271개 면에 총 11,355명이 임명되었다.(노영종(2016), p198)  예를 들어 충청남도는 관할 167개 면의 노무자원을 약 한 달 기간 동안 조사하여 1940년 5월 17일, 조선총독부 내무국에 그 결과 보고하였다. 1면당 5명의 조사원이 각각 200호씩 맡아 1면당 1,000호를 대상으로 조사하였으미 총 835명의 조사원이 16,700호(총호수 223,372호의 7.8%에 해당한다)를 실지 조사한 것이다. 이때 노동출가(勞動出稼)·노동전업을 위한 가능자 수와 희망자의 인원도 조사되었다.(노영종(2016), p204).


세대별 조사서는 세대주의 본적, 주소, 직업을 비롯하여 가(家)의 개인별 성명, 나이, 세대주와의 관계, 이름, 나이, 건강상태, 노동 출가 또는 노동 전업 희망의 유무, 논밭 경작면적, 생활상황(연수입과 연지출) 12개의 항목을 기입하게 되어 있다. 직업은 자작농, 자작겸 소작농, 소작농, 농업노동자, 건강상태는 강(强), 보(普), 약(弱)으로 구분하였다. 출가와 전직 가능자는 남자 연령 20∼44세, 여자 연령 12∼19세로서 건강상태가 보(普)이상인 자 중에서 조사되었다.(노영종(2016), p196). 각 군에서 이 결과를 도에 보고하면, 각 도에서 이를 합산하여 총독부에 보고하였고, 총독부는 이를 합산하여 ‘노무자원조사표’를 작성하였다. 


‘노무자원조사표’에 기록된 조사 결과는, 도별·호별 이상면적 16~35반보(反步, 1반보는 1/10정보=300평), 전국 이상호수(理想戶數) 2,035,264호, 과다 잉여(剩餘)호수 1,023,491호, 노동 출가·전업 가능자는 남자 20-30, 31-40, 41-45세(12-19세의 여자도 계산되었다)에 대하여 각각 232,641, 534,068, 274,887, 118,581명, 합계 927, 536명, 그 희망자는 각각 20,767, 158,919, 61,502, 21,893명, 합계 242,316명으로 추정되었다. 1936년말 현재, 총경지면적은 4,941,584정보, 농가총호수 3,058,755호였다.(허수열(1985), p308-10)


과잉호수가 가장 많은 도는 전남으로 161,722호(도 전체 농가의 15.8%)이고, 강원도 142,296호(13.9%), 경북 132,525호(12.9%), 경남 124,228호(12.1%), 전북 85,418호(8.3%) 순이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강원도에 75.1%가 집중되어 있다. 특히, 가능자 수와 희망자 수가 삼남지방(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집중되어 있다.(노영종(2016), p201~202). 일본으로의 동원도 삼남지방에 집중되었는데, 이것도 관알선이 ‘노무자원조사’에 근거하였음을 증명하는 사실이다.



1940년 3월 말부터 ‘노무자원조사’를 실시한 총독부는 1940년말 ‘조선총독부 노동자알선 요강’과 동(同) ‘세칙’을 제정·공포한다. 우선 노동자의 알선을 받고자 하는 사업주는 노동자 사용계획서를 사업지 관할 도에 제출한다. 도는 이에 의거하여 ‘예상 소요 노동력수 조서’를 작성하고 ‘노무자원조사’ 결과를 근거로 하여 ‘도내 노무조정계획’을 수립하여 총독부에 보고한다. 총독부는 이들 ‘도내 노무조정계획’을 취합하여 ‘본부(本府) 노무조정계획’을 수립하여 각 도에 시달한다. 각 도는 이에 의거하여 ‘도내외 알선 실시계획’을 수립한 후 이를 각 군에 시달하고, 그와 동시에 사업주에게도 같은 내용을 지시한다. 


총독부가 각 도에 알선노동자를 할당하여 내려보내면, 도는 부군도(府郡島)에, 군도는 읍면에 순차적으로 할당한다. 할당을 받은 읍면은 ‘출가·전업 희망자’와 ‘출가·전업 가능자’ 명부를 작성하여 두었다가, ‘국민총력읍면연맹’과 동 ‘부락연맹’의 협력을 얻어 노동자를 동원한다. 이때 읍면에서는 경찰·관헌과 긴밀히 연락한다. 다른 한편, 조선총독부는 1942년 2월 20일에 ‘조선인 내지 이입 알선 요강(朝鮮人內地移入斡旋要綱)’과 동 ‘세칙’을 제정ㆍ공포하여 일본 등지로의 ‘관(官) 알선노무자 공출’을 개시한다.(허수열(1985), p306-328) 단 이 중에서 ‘희망자와 가능자 명부’는 발견된 것이 없는데, 실제로 작성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야말로 대규모 조사인력과 시간, 비용이 ‘실지조사’에 소요되었을 것인데, 그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임금

[표] 임금의 지출

단위 : 상단은 엔화, 하단은 %


자료출처 : 1940년은 일본광산협회(1940),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半島人勞務者に關する調査報告)’, 박경식 편집(1981) 제2권, pp. 1-300. 1941년은 노동사정조사소(勞動事情調査所)(1942), ‘히타치광산의 반도인 노무자에 대하여 말한다(日立鑛山に於ける半島人勞務者と語ろ)’, 박경식 편집(1981) 제 1권, p. 90. 1943년은 스미모토 고노마이광산(住友鴻之舞鑛山), ‘쇼와 18년도 반도인 통계관계철(昭化十八年度半島人統計關係綴)’의 1~3월 분. 모리야 요시히코(守屋敬彦) 편집(1991), ‘전시 외국인 강제연행 관계 사료(戰時外國人强制連行關係史料)’ III 朝鮮人 2 下卷. 월말 현재 수는 1~3월 평균이다. 1944년은 석탄통제회 규슈지부(石炭統制會九州地部)(1945), ‘탄산에서 반도인의 근로관리(炭山に於ける半島人の勤勞管理)’, 박경식 편집(1991) 제2권, p. 209. 1945년은 모리야 요시히코(1996: 128).


[표] 다른 직종 임금과의 비교

자료 : 이우연(2019), ‘조선인 임금 차별의 허구성(朝鮮人賃金差別の虛構性)’, 이영훈 편저, ‘반일종족주의(反日種族主義)’, 분게이슌주(文藝春秋). 1943년 교원임금은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2022), ‘사도금광, ‘강제노동’ 주장하는 이들은 1차 자료부터 보라(强制勞動派は一次史料を讀め)‘, ‘세이론(正論)’ 2022년 4월호. 광부 임금은 사시마광산(佐島鑛山)(1943), ‘반도노무관리에 부쳐(半島勞務管理ニ付テ)’.

 



산업재해와 직접부·갱내부


조선인의 66%가 광산에서 일하였고, 게다가 그중에서 90% 가량이 갱내부였다. 이렇게 경험이 없는 미숙련 노동력인 조선인이 탄광, 광산 노동력의 갱내의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업무를 맡게 되면서, 노동재해의 증가, 생산능률의 저하, 자재소비량의 증가를 초래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석탄공제회 근로부 문서에 따르면, 갱내부 중 직접부에는 채탄부, 충전부, 굴진부가 있고, 갱내부 중 간접부에 사조부, 운반부, 기계부, 공장부, 잡부, 조수가 있다. 갱외부에는 조수, 선탄부, 운반부, 기계부, 공작부, 전기부, 잡부가 있다(조수, 운반부, 기계부, 공작부, 잡부는 갱내에도 있고, 갱외에도 있음). 


단기(근로보국대, 정신대 등)의 일본인과 조선인을 제외한 일본인 “일반” 212,604명과 조선인 “피강제연행” 83,299명 중에서 직접부는 일본인이 59,874명, 조선인이 56,949명으로 조선인은 일본인의 95.1%에 해당하며, 갱내부는 일본인 127,153, 조선인 76,892명으로 조선인이 일본인의 60.5%에 해당한다.(나가사와 시게루(長澤秀)(1987), p157-159)


[표] 1943년 전국 “주요탄광” 조선인과 일본인 직접부, 갱내부, 갱외부 직종별 구성과 사망률 

노동과학연구소(労働科学研究所)(1943a) ‘반도 노무자 근로상황에 관한 조사 보고(半島労務者勤労状況に関する調査報告)’ 중 탄광 170-3쪽

사망률과 중상률의 단위는 천분비(Permil).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인이 많은 사고를 겪은 것은 그들이 대부분 갱내부, 특히 직접부로 일하였으므로 사고를 겪기 쉬운 여건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근속기간이 일본인보다 훨씬 짧고 숙련도가 낮아서 일본인에 비해 갱내사고 발생에 훨씬 더 취약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석탄통제회 동부지부 관내에 속하는 죠반탄전에서 1942년 7월부터 1944년 9월 기간 사고를 기록한 ‘재해원부(災害原簿)’에 따르면, 사망률은 조선인이 일본인의 4.3배, 중상률은 1.7배라고 한다.(야마다(山田) 외(2005), p186). 이와 같이 일본인에 비해 높은 사망률과 부상률에 대하여 논할 때는 직접부나 갱내부의 비율, 근속기간 등을 살펴봐야 하는데, 그에 대한 자료는 매우 부족하고 그와 같은 관점에서 서술된 연구는 거의 없다.


정혜경에 의해 집필된 지원재단(2019)에서는, 일본 전지역 조선인 노무자 사망률은 0.9%(1939.10-1942.10), 후쿠오카 관내는 1944년 1월 기준 0.6퍼센트, 고노마이광업소는 1.7%다. 그런데 한국 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접수한 “피해자” 148명과 사망자 9명이라는 신고에 근거하여 “9명의 사망자는 148명 중 무려 6%에 이른다......당시 일본지역 탄광과 광산노무자의 사망률과 비교해보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과장된 허구적 수치다. 사도광산(1943) 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1940년 2월부터 1943년 5월까지 동원된 조선인은 1,005명이고 그 기간에 사망한 자는 10명으로 0.1%가 안 된다.


물론 이 사람들 중에서 1943년 5월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 사이에 사망한 사람도 있겠지만, 도주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다수가 계약기간 종료와 함께 귀환하였고, 따라서 그들이 1943년 5월 이후에 사도광산에서 근무한 기간은 매우 짧았을 것이므로, 추가 사망자 수는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만약 정혜경이 주장하는 것처럼 6%의 사망률이 되려면, 9명에 더해 사망자 59명이 추가로 발생해야 한다. 이것은 극히 비현실적이다.


사도광산의 사망률은 오히려 다른 사업장에 비해 매우 낮았다고 보아야 한다. 40%를 넘는 조선인이 일했던 탄광과 달리, 금광은 암반이 견고하여 낙반사고의 위험이 훨씬 작고, 탄진이나 가스가 폭발하거나 화재가 발생하는 경우도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수치를 조금만 오해하거나 잘못 만지면,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결론에 이르고 역사상(歷史像)을 왜곡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규폐증 


히로세 테이죠(廣瀨貞三)가 서술한 바(히로세(廣瀨)(2000), p13), 1944년에 사도광업소의 규폐를 조사한 의사 사이토 켄(斎藤謙)의 ‘규폐병의 연구적 시험 및 보유(珪肺病の研究的試験・補遺)’에 따르면, 착암부 810㏄, 운반부 360㏄, 지주부 350㏄, 갱부 240㏄의 분진을 흡입한다. 이 시기에 해당 직종에 종사하는 자가 많았던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인이다.


1943년 5월 말 조선인은 운반 294명, 착암 123명, 지주 56명, 외운반(外運搬) 49명이다. 사도광산에서 “기타”로 분류한 직종에 해당하는 조선인은 없었는데, 그와 달리 일본인은 기타가 321명, 제광(製鑛) 85명, 운반 80명, 잡부 52명, 정지(整地) 46, 지주 39명(합 522명)이었다. 아이카와 마치(相川町)(1995)에서도 조선인은 주로 운반부, 착암부, 지주부로서 주로 갱내부였음을 지적했다(p. 681), 


‘두산백과’에 따르면, 규산이 들어있는 먼지가 폐에 쌓이면 규산의 기계적·화학적 작용에 의해 폐에 염증이 생긴다. 이 염증은 폐에 상처를 남기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폐가 온몸에 산소를 공급하는 데 문제를 일으킨다. 이런 만성질환을 규폐증이라고 한다.


규폐증은 만성적인 진폐증이다. 탄광이나 광산에서 많이 발생하지만, 사도광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규산의 농도에 따라 규폐증의 발병속도는 달라지는데 규폐증이 발생하려면 보통 15~20년이 걸린다. 동원된 조선인노동자의 근무기간은 가장 길게는 6년, 보통 2~3년, 도망자의 경우 불과 수개월인데, 이중에서 진폐증이 광범하게 발생했다는 히로세(廣瀨)(2000), 지원위원회(2019), 정혜경·이상의(2021) 및 정혜경(2022)은 주장은 다분히 과장이다.




쟁의


히로세 테이죠(廣瀨貞三)가 집단행동과 쟁의에 대해 서술한 바(히로세(廣瀨)(2000), p13-14), 조선인의 “투쟁”은 두 건이 확인된다. 첫째, 1940년 2월 17일, “(조선인: 필자) 전원을 수용하는 합숙소의 설비가 부족하여 일시적으로 40여 명이 광산직원이 경영하는 신포(新保)숙소를 사용하게 하였다. 도급제도 하에서 공급 부족이 발생해 항시 불만이 있었는데, 2월 17일에 숙박자 40명이 최재만(崔在万)을 대표로 하여 개선책을 요구하였고, 불온한 상황이었지만, 광산 측이 그 요구를 받아들여 바로 그날 해결했다”고 한다.


둘째, 1940년 4월 11일에 사도군 키리나이초(桐内町)의 조선인 노동자 97명이 “3월분의 임금을 지급받은 후, 모집에 응할 때의 조건과 다르다며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했다”. 이는 아이카와 경찰서의 “조정에 의해 노동조건에 대해 회사 측에서 선처하는 것으로” 하여 4월 13일에 “해결”됐다. 그러나 주모자 3명은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이러한 쟁의가 발생한 이유를 사도광업소 노무담당자는 급여 외에 식비(당시 하루 50전)와 침구 (1조(組) 50전), 또 무료로 지급한다고 생각했던 지하족대(지카타비) 등 작업필수품이 모두 본인이 부담해야 했다는 사실과 노무과 직원 일부가 극단적인 차별의식 가졌기 때문이라고 회고하였다.


한국의 강제연행·강제동원론자들은 집단행동을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항으로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한다. 정혜경(2022)은 사도광산의 쟁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일본의 국가총동원 체제기에 끌려온 조선인은 다양한 형태로 저항했다......‘1942년 4월 29일, 미쓰비시 사도광업소 소속 조선인 노무자 3명이 경관에 연행되자 동료 160명이 사무소로 난입해 항의하다가 8명이 체포’되었다는 자료도 있다. 3건 가운데 2건은 경찰이 개입했다.


정혜경은 얼핏 보아 조선인에 의한 “노사분쟁”처럼 보이는 이 사건의 실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서술하지 않았다. 한국인 독자들이 “대규모 저항”으로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서술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조선인의 고약한 집단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실체를 가졌다. 히로세(2000)는 ‘특고월보’를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는데, 사건의 계기는 도박이었고, 대규모 집단행동으로 증폭된 이유는 여기에서도 분명한 이유가 서술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광산의 ‘방’이나 숙소에서는 도박이 널리 행해졌다. 조선인도 서서히 이 습관에 물들기 시작했다. 조선인은 심야에 인적이 드문 수풀 속이나 화장터에서 양초를 밝히고 도박을 했다. 1942년 4월에도 아시카와 숙소에서 이한봉(李漢鳳) 등 3명이 화투로 도박을 하던 중 일본인 노무과원이 이를 발견하여, 3명을 관할 경찰서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 동료 조선인 160여 명은 동료를 빼내기 위해 숙소 사무실에 쇄도했고, 노무과원에게 상해를 입히고 사무실의 창문 유리 36장이 깨졌다. 이로 인해 아이카와 경찰서 경관이 급파되어 주모자 8명을 검속했고, ‘진무(鎮撫)’(진압하고 선무함)하여 해산시켰다(히로세 테이조(廣瀨貞三)(2000), p16).


조선인의 집단행동에 대한 일본 경찰의 대처에 대해 살펴보자. 나가타니(長谷)(2021)의 ‘특고월보’ 분석에 따르면, 조선인 노동자의 집단행동에 대해 “엄중경고”, “엄중훈계”, “엄유(嚴諭)”, “조정”, “설득”, “위무(慰撫)”하였고, 폭력에 의한 진압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즉 노사분쟁을 포함하여 조선인의 집단행위를 경찰이 무력진압·해산하고 조업을 속행하게 한 사례는 없었다. 경찰이 출동해도, 경고, 훈계, 설득하고 다독이는 데 그친다. 사도광산에서도 경찰이 조선인을 무력해산·진압한 일은 없다.


사도광산의 경우, 다른 사업장과 달리, 조선인이 관계되는 분쟁은 별로 발생하지 않았다. 종전 후에도 조선인이 기업에 대해 항의하고 집단적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사도광산에서는 그런 일도 없었다. 종전을 사도광산에서 맞은 히라이(平井)는 “대체로 훈련 또는 지도가 적절했고, 종전 시에도 타지방에서 볼 수 있는 폭동 등도 없이 (조선으로: 필자) 귀환시킬 수 있었다”고 썼다(p486).




영양섭취


조선남부 조선인과 일본 전시노동자의 영양섭취에 대해 살펴보자.


[표] 조선남부 조선인과 일본 전시노동자의 영양섭취

자료: 육소영(2017), [식품수급표 분석에 의한 20세기 한국 생활수준 변화에 대한 연구], 충남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박사학위 청구논문, 도노무라(外村大)(2012), 186쪽

주: 1合=140g(490kcal), 100g은 350kcal으로 환산.


조선남부의 경우는 육소영 씨의 2017년 박사학위논문을 이용했고, 일본의 배급량은 미국 전략폭격단이 조사한 결과를 이용해 곡물 부피를 칼로리로 환산했다. 


일본으로 동원되어 간 조선인 중 가장 배급이 적은 21세 이하 갱외부를 제외하면, 조선인보다 열량흡수가 훨씬 높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인 갱외부는 예외적인 존재였다. 배급은 거의 일본정부와 석탄통제회와 같은 기업단체들이 그 양을 규정하였므로 회사 간에 큰 차이가 없다. 1937-40년에는 탄광ㆍ광산의 중노동자에게는 1941년 주식(主食) 배급량의 1.4~1.5배가 지급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도 조선에 잔류한 조선인보다 영양공급이 월등하였다. 단백질의 경우 당시 일본에서 1인 일일 최소 소요량을 76g으로 보았는데, 미국 전략폭격단(USSBS)의 자료를 인용한 Cohen(1949)에 따르면, 1945년 8월에 최악의 상황이 되어 37.9g으로 떨어졌다. 


조선에 잔류한 청년과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 전시노동자나 탄광, 광산 등에 취업한 전시노동자의 세 배에 달했던 자유 이주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현재로서는 우선 영양섭취와 관련하여 일본행을 선택한 조선인들이 조선남부에 잔류한 사람들보다 훨씬 유리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자료

* 石炭統制會九州地部(1945), ‘炭山に於ける半島人の勤勞管理’, 朴慶植 編(1991) 第2卷, ‘朝鮮硏究資 料集’ 第2卷, 1-245.

* 佐渡鑛山(1943), ‘半島勞務管理ニ付テ’

* 新潟新聞

* 勞動事情調査所(1942), ‘日立鑛山に於ける半島人勞務者と語ろ’, 朴慶植 編(1981) 第1卷, ‘朝鮮硏究 資料集’ 第1卷, 56-96.

* 住友鴻之舞鑛山, ‘昭化十八年度半島人關係綴’, 守屋敬彦 編(1991), ‘戰時外國人强制連行關係史料’ III 2 下.

* 日本鑛山協會(1940), ‘半島人勞務者に關する調査報告’, 朴慶植 編(1981) 第2卷, 1-300. 

* 勞動科學硏究所(1943a, 5月), ‘半島勞務者勤勞狀況に關する調査報告’, 勞動科學硏究, 朴慶植 編(1982), ‘朝鮮硏究資料集’ 第1卷, 339-521.



논저

* 김낙년·박기주·박이택·차명수 편집(2018), ‘한국의 장기통계 I’, ‘한국의 장기통계 II’, 해남. 

* 육소영(2017), ‘식품수급표 분석에 의한 20세기 한국 생활수준 변화에 대한 연구’, 충남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박사학위 청구논문.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2019), ‘일본지역 탄광ㆍ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 미쓰비시(三菱) 광업(주) 사도(佐渡)광산을 중심으로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19 일제강제동원 피해 진상조사 학술연구용역보고서.

* 정혜경(2022), ‘자료를 통해 본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2022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학술 세미나 자료, ‘사도광산 강제동원 역사왜곡’.

* 정혜경·허광무 글·사진(2021), ‘탐욕의 땅,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과 조선인 강제동원’, 도서출판 선인.

* 長谷亮介(2021), ‘朝鮮人勞働者の勞働現場の實態’, 西岡力 編(2021), ‘朝鮮人戰時勞働の實態’, 一般財団法人産業遺産国民会議

* 朴慶植(1965), ‘朝鮮人强制連行の記錄’  

* 法政大學大原社會問題硏究所(1964), ‘太平洋戰爭下の勞動者狀態’, 東洋經制新報社.

* 西成田豊(1997), 在日朝鮮人の‘世界’と‘帝國’國家 , 東京大學出版會.

* 守屋敬彦(1988), ‘国家統制下における新興鉱山の労働者募集 : 鴻之舞金鉱山を例として’, ‘道都大學紀要’ 第7号, 11-43.

* 守屋敬彦(1996), ‘アジア太平洋戰爭下の朝鮮人强制連行と遺家族援護’, ‘道都大學紀要’ 15, 81-138.

* 勝岡寬治(2019), ‘朝鮮人戦時労働者の実態について-韓国大法院判決の原告を中心に-’, ‘歴史認識問題研究’ 4, 19~44.

* 深町純亮 監修 佐谷正幸 著(2005), ‘炭鉱の真実と栄光 : 朝鮮人強制連行の虚構’, 日本会議福岡筑豊支部

* 長澤秀(1987), ‘戰時下上磐炭田における朝鮮人勞鑛夫の勞動と鬪い’, ‘史苑’ 47(1), 梁泰昊 編(1993), ‘朝鮮人强制連行論文集成’, 明石書店, 146-204에 재수록.

* 朝鮮人强制連行眞相調査團(1974), ‘朝鮮人强制連行强制勞動の記錄’, 現代出版社. 

* 竹內康人(2013), 調査 朝鮮人强制勞動 1 炭鑛編 , 社會評論社.

* 外村大(2012), 朝鮮人强制連行 , 岩波書店.

* Cohen, Jerome Bernard 1949. ‘Japanese Economic History 1930-1960’, Vol. II,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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