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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과 홍준표, 1999년 3월, 미국행 함께 준비"

1999년 4월 8일, 뉴스메이커 기사에서 밝혀져


이명박 후보에 쏟아지는 의혹을 막아내는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장 홍준표 의원 역시 거짓말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홍준표 의원은 이명박 후보는 1999년에는 미국에서 자신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귀국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다 언론에서 출입국 기록 공개를 요구하자, 1999년 2월 22일부터, 3월 20일까지 이명박 후보가 한국에 체류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홍준표 의원의 해명은 이명박 후보와 별도로 또 다른 거짓말 의혹을 사고 있다. 홍준표 의원이 1999년 3월 경에 이명박 후보와 한국에서 긴밀하게 서로 왕래를 하고 있었다는 당시 관련 기사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주간 뉴스메이커 1999년 4월 8일자 원희복 기자의 기사 주인공은 당시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대법원 확정판결 받아 의원직을 박탈당한 홍의원이었다. 이때는 홍의원이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문제가 되는 대목은 다음이다.

"큰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다. 그 놈 머리는 좋은데 그 동안 통 공부 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국 회의원도 그만둘 것이고, 또 힘들게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니까 모습이 달라지더라.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 버지 기사가 나오는 신문도 챙기더 라.” 그는 변호사 사무실 기반을 다져놓 고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할 예정이다. 같은 당 이신범 의원과 미국에 있다 귀국한 이명박 전 의원이 연구소나 대학에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그는 “미국에서는 21세기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 공부하고 오겠다”며 “돌아 오면 정말 ‘지도자’를 해 보겠 다”고 말했다. 기자가 다시 정치로 돌아갈 만큼 정치가 가치가 있느냐 는 질문에 그는 “정치를 자꾸 냉소 하면 진짜 정치가 도둑소굴이 된 다”고 웃어 넘겼다"

즉 홍의원의 미국 유학은 당시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이명박 후보가 주선했다는 점이 이 기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뉴스메이커의 발행날짜는 1999년 4월 8일이다. 아마도 취재시점은 3월 중하순 경일 것이다. 그렇다면 홍준표 의원과 이명박 후보는 1999년 3월, 미국행 문제로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의원은 지금 시점까지도, 이명박 후보의 1999년 행적에 대해 아는 바 없다는 투로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뉴스메이커의 기사 내용으로 보면, 이명박 후보의 1999년 2월과 3월, 한국에서의 행적을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홍의원으로 보인다.

이명박 후보에 이어, 홍의원조차 거짓 논란에 휘말리면서, BBK 공방의 진실게임의 축은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지는 분위기이다.

*다음은 뉴스메이커 기사 전문

[뉴스메이커]1999-04-08 2516 자

홍준표의 마지막 정치 발언모래시계 검사로 이름을 날리다 국회의원이 된 홍준표 의원이 3월 9 일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 변호사로 돌아갔다. 본인의 말대로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선거운동권도 없어지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는 3월 3일 대정부 질문으로 마지 막 의정 활동을 했고, 8일 국회 신상 발언을 통해 귀거래사를 속기록에 남겼다. 그리고 8일 김홍신·안상 수·김영선 의원 등 희망연대 회원 10여 명과 지역구에 마지막 의정보 고서를 돌렸다.

9일 대법원 판결 직후 당사에서 기 자를 만나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담담히 그간 심경을 토로했다.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 이유서에 ‘내가 유죄라면 김대중 대통령도 유죄’라고 썼다. 내가 하급 당직자 의 탈법 선거운동을 몰랐다는 이유 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김 대통령 이 대통령 선거 때 지방에서 일어난 당원의 탈법 선거운동 사실을 알았 느냐 몰랐느냐와 똑 같은 논리다.” 그는 이번 판결이 사법부의 문제가 아닌 정권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 는 “법원을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면서 “이런 사법 운영은 나 라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고 말했 다. 홍 전 의원은 “사법부가 거듭나 기 위해선 이 정부가 사법부를 존중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가 사법부의 재판에 영향을 미 쳤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그 근거로 항소심 선고 이틀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홍준표 재판은 항소 기각이냐 무죄냐만 문제된다’는 발 언을 들었다. 이것은 자신의 사건이 청와대에 보고되고 결론이 조율되고 있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사실 이번 판결이 있기 1주일 전 그 가 파악한 대법원 분위기는 ‘위원 장이 모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무죄를 의미하는 것으 로 그는 내심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3일 국회 대정부 질 문 이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더라 는 것이다. 그는 국회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김대중 정권은 지금 어 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김 대통령 의 실정을 조목조목 따졌다. 그는 이 대정부 질문이 대법원 판결에 영향 을 미친 것이냐는 질문에 시인도 부 인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재판 과정에서는 여러 가 지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1심 공 판에서 재판장은 판결문 원본도 없 이 선고하고, 판결 2주 만에 사표를 냈다. 항소심에서는 재판부 구성 변 동도 없는 상태에서 재판장이 교체 됐다. 더구나 항소심 배석판사가 이 사건 판결 후 사표를 냈다. 이후 법 원 일각에서는 ‘합의과정에 대한 항명’이라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어떻든 재판은 끝났다. 그의 의원직 도 떨어졌다. 본인도 “이젠 선거법 위반이라는 족쇄가 떨어진 것”이라 며 홀가분하게 웃었다. 그는 “15대 국회에서 무려 28명의 국회의원이 도중하차하면서 대부분 고별사 한 마디 못하고 신문 1단 기사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며 “가는 자와 남는 자라는 제목으로 각 신문에서 사진을 크게 실어준 나는 그런 면에 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3년여 국회의원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96년 노동법 파동 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나와 김문수·권철현 의원 세 명 이 끝까지 반대했다. 그런데 위에서 그렇게 반대하려면 탈당하라고 하더 라. 어쩔 수 없이 새벽 날치기에 참 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가장 가 슴에 걸린다. 그때 끝까지 반대해 노 동법을 철회시켰다면 YS 정권이 그 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 이다. 회한이 남는다.” 그는 국회의원을 하며 가장 보람을 느꼈던 것은 지역구 재건축 법률을 통과시켰을 때라고 했다. 그는 의원 직을 그만두니까 의외로 좋은 점도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큰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다. 그 놈 머리는 좋은데 그 동안 통 공부 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국 회의원도 그만둘 것이고, 또 힘들게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니까 모습이 달라지더라.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 버지 기사가 나오는 신문도 챙기더 라.” 그는 변호사 사무실 기반을 다져놓 고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할 예정이다. 같은 당 이신범 의원과 미국에 있다 귀국한 이명박 전 의원이 연구소나 대학에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그는 “미국에서는 21세기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 공부하고 오겠다”며 “돌아 오면 정말 ‘지도자’를 해 보겠 다”고 말했다. 기자가 다시 정치로 돌아갈 만큼 정치가 가치가 있느냐 는 질문에 그는 “정치를 자꾸 냉소 하면 진짜 정치가 도둑소굴이 된 다”고 웃어 넘겼다.

그는 현직 대통령과 총리의 ‘아픈 곳’을 곧잘 찔러댔으며 법사위와 정보위를 넘나들며 거침없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부었다. 심지어 자 신의 당 총재 면전에서도 ‘핏대’ 를 내며 바른 소리를 하기 일쑤였다.

그는 여당에 큰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여의도 주변에서는 그의 의 원직 상실에 ‘박상천 법무부장관이 가장 좋아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 가 나돌고 있다. 그만큼 그는 법사위 에서 박 장관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 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목 소리는 여의도 주변에서 당분간 듣 기 어렵게 됐다. 그는 “오늘(9일) 언급으로 나의 정치적 발언은 끝났 다”고 말했다.

원희복 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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