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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와 동양적인 것의 슬픔

충무로와 진중권의 어색한 세발 달리기


*자유게시판의 upbar님의 글입니다.

최근 개봉영화 하나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 포털사이트의 뉴스 기사하나마다 떠있는 무슨무슨 논란은 높아져버린 역치로 인해 왠만해서는 논란아닌 일상에 불과한데, 이 개봉영화에 관한 논쟁은 수그러들기는 커녕 확대심화되고 있다. 바로 심형래 감독이 야심차게 내놓은 SF영화 ‘디워’때문이다. 여기저기서 개봉과 동시에 영화에 대한 비난의 글을 누군가가 성토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모 방송사에서는 이 영화를 논제로 토론까지 벌였다. 내가 우연찮게 그 방송을 보게 되었을 때, 진중권 교수는 ‘반디워’의 패널로 출연하여 그야말로 ‘열나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가 ‘일개 영화’의 토론에 나온것도 의외였지만 그의 공격적인 태도와 날카로운 언사로 ‘디워’를 그야말로 난도질하는 모습은 더욱 놀라웠다. 그의 주장과 논지는 차치하더라도, ‘이렇게 인기있는 디워를 깠으니 내일부터 한껏 욕먹겠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각오는 되있겠지.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인터넷 포탈에 걸린 그의 관한 기사는 자신에 대한 ‘정상적인 비정상’의 대중들의 예상된 반응이라는 인터뷰가 실렸다. 뜬금없이 이게 왠 해괴한 말이던가. 이때부터 ‘진중권 대 대중 대 평론가’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뭔가 생산적인 논의의 출발이 될 것이라는 기대로 시작한 100분 토론은 첨예한 갈등만을 초래한 채, 논의는 네티즌의 심기만 한껏 긁어놓고 그렇게 끝나버렸다.

진중권이 북쪽으로 간 까닭은?; 충무로와 진중권의 어색한 세발 달리기

우선 나는 영화 ‘디워’를 보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하겠다. 안본 것을 봤다고 하고 싶지만 안본 것을 봤다고 할 수는 없기에, 또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디워’ 그자체가 아니기에 굳이 영화를 보고 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개봉전부터 심형래라는 인물과 그가 만드는 영화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그에 관한 기사가 있으면 꼼꼼히 챙겨 읽어보았다. 그가 내 어릴때의 우상이거나 그의 슬랩스틱 코메디에 반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가 만들었던 최대 히트작 ‘영구와 땡칠이’를 비디오로도 본적이 없다. 그가 나온 코메디프로는 그냥 재미있게 웃고 넘기면 그만이었다. 내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이미 전번의 처참한 실패를 맛보고 ‘신지식인 1호’에서 ‘사기꾼’으로 추락한 그가 몇 년동안 혼신의 힘을 들여 제작∙감독한 그의 영화의 귀추가 주목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한국영화의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분명 그의 영화는 ‘기대작’이었다. 이는 비단 나뿐만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정도의 ‘정상적인’ 기대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귀추는 영화가 개봉 된지 일주일이면 파악할 수 있다. 영화개봉 후 몇 시간이면 쏟아지는 네티즌의 평점과 영화평은 ‘클릭질’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범람한다. 아무리 상영관을 독식한 대작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금새 막을 내리고, 입소문이 퍼진 영화는 상영관수를 늘려 100만 관객을 만드는 모을 수 있는 ‘회전율’이 빠른 장사다. 영화는 문화지만 극장은 전장이다. 냉정할 정도로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기민하게 대처한다. 그저 관객은 보고싶은 영화만 보면 된다. 그런데 개봉 전 시사회를 봤던 영화 평론가들의 평은 그야말로 악평일색이었다.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비하한 평론가도 있었지만 이렇게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독립영화 감독의 글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의 상황에서 기어코 불꽃을 지피고야 말았다. 그는 심형래의 영화를 직접적으로 가리켜 ‘미제를 모방한 토스트기’에 비유하며 저주에 가까운 말을 '토내냈던' 것이다. 이때부터 네티즌들은 광분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 글을 읽고, 반박의 글을 쓰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참았다. 역설적으로, 이젠 잘못 댓글 달았다간 ‘파시즘’이라는 표현은 식상하고, ‘~빠’소리 듣기 딱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100분토론’에서의 불쾌감은 그 정도를 넘어섰다. 적어도 그 독립영화 감독의 글은 개인적인 블로그에서 어젯밤에 쓴 일기처럼 너무나 감정적으로 써놓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나, 100분토론에서 진중권교수와 충무로)의 언발란스한 조합은 보는사람을 하여금 너무나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디워는 계속 흥행을 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진중권교수는 너무나도 명확하면서도 간결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애국주의’와 ‘심형래 인간극장’이 그것이다. 그러한 결론은 한국영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통해 도출한 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짧다. 토론에서 목청높이며 했던 이야기를 경청해 봐도 한국영화시장과 제도적 갈등이나 관객들의 욕구에 대한 냉철한 분석은 없었다. 자신의 블로그에서 댓글놀이를 하느라 다른 댓글을 읽어보았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영화와 한국 영화계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이미 지난해 스크린 쿼터 반대투쟁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이는 황우석 사태 등 현재 문제가 되고있는 네티즌들의 폭력성과는 또 다른 문제다.) 당시 한국영화와 문화를 사수하자며 노메이크업과 수수한 차림, 굳은 표정으로 벌인 영화배우들의 일인시위에 대해 네티즌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한미 FTA반대를 위해 투쟁하는 농민들과 손을 잡고 스크린쿼터를 사수하려 했을 때는, 아예 스크린 쿼터를 폐지하자는 댓글이 심심치 않게 보였을 정도이다. 이런 현실에서 애국심이라니. ‘디워’ 관객이 ‘금모으기운동’ 수준의 ‘관람운동’이라도 벌였단 말인가. 너무나도 뜬금없다. 물론 심형래 감독이 보여준 그의 열정은 충분히 영화를 흥행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애국’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온적은 없었다. 그런데 진중권 교수의 입에서 ‘애국주의’라는 말을 꺼내자, 그것은 실체의 옷을 입고 드러났고, 일약 디워를 옹호하던 팬은 ‘인디펜더스데이’의 마지막 장면을 채우던 대중처럼 묘사되고 만다. 게다가 ‘디워’의 관객수 몰이가 평론가와 충무로에 대한 불신의 반동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애국주의’의 증거로 둔갑시키고, 그리고 여차하면 ‘파시즘’이라는 ‘노란카드’를 꺼내기 딱 좋은 증거로 만들었다. 이러느니 차라리 애국주의보다는 파시즘이 더 괜찮게 들린다.

‘디워’는 왜 충무로와 진중권으로부터 공격받아야 하는가? 여기서는 내가 간결하게 결론을 내리고 싶다. 다름 아닌 ‘디워’가 거대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헐리우드의 그것보다는 여전히 비교도 안되는 금액이지만, 한국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들인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거대 자본이 투입된 영화에 대해 충무로가 심형래 감독을 동업자로 생각하든 말든,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충무로에 있어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넘기 힘든 벽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나 ‘내츄럴 시티’ 등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했던 영화들의 참담한 실패의 결과는 악몽 그 자체였다. 게다가 한국영화의 위기론이 흘러나오고 있는 이 시점에서 작품성이 떨어지는 그의 영화가 실패할 경우, 준 것도 없지만 받은 것도 없는 충무로에 엄청난 탄흔지를 남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영화 시사회 후 기자와 평론가들로부터 악평을 받았으니, 분명 충무로의 입장에서는 그의 영화가 달가울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영화가 흥행하고 있으니, 충무로는 당황스럽지만 안도의 한숨을 쉴 법도 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영화의 흥행과 동시에 충무로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조성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 영화’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중추적인 스테이지였던 충무로가 오히려 네티즌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충무로는 뭔가 어긋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급기야는 영화사 대표가 토론에 나와 심형래 감독은 거대 자본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했으므로 충무로에서 소외받은 감독이 아니라는 억지 주장을 펼치게 된다. 물론 내가 심형래 감독이 충무로에서 소외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거대자본의 유치=충무로의 영향력’으로 전개되는 공식은 어이없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 한국영화의 비합리적인 구조를 스스로 고백한 것과 다름없음을 보여준다.게다가 진중권 교수는 이에 보태, '코메디언 경력을 상징자본으로 활용해 막대한 자본을 유치'했다며 심형래 감독이 마이너리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전작 '용가리'의 참담한 실패를 상기한다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런 '정크본드'에 난 투자하지 않을것이다.심형래 할아비가 와도 말이다.

이와 동시에 네티즌들은 평론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관객들이 느낀 영화의 완성도와 평론가-이 표현에는 영화기자도 포함된다-들의 그것의 괴리는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심형래 감독과 그의 영화에 대해 정도를 넘어선 인격적으로 비하의 글을 썼던 몇몇 평론가들에게 집단적인 비난의 글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평론가 대 대중의 구도로 묘사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진중권 교수가 100분토론에 나와서 평론가의 대표자로 나와 네티즌들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비판하며 평론과 서사구조에 대해 강의하는데까지 이르자 네티즌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100토론에서의 논의 자체만 놓고 본다면 그의 평론에 대해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너무나도 객관적인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론 내내 강조했던 평론의 객관성에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쓴 전문적인 영화평론을 본적이 없어서 그가 얼마나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영화평론의 객관성이라는 것이 서사구조를 파악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관객들의 영화에 대한 욕구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화야말로 욕구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독의 욕구이기도 하고 관객의 욕구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그의 ‘냉철한 객관성’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 왜 관객들의 욕구를 애국주의로 호도함으로서 순수 애국주의마저 저급의 감성으로 추락시켜 관객과 애국주의 모두를 두 번 죽이는가? 이쯤되면 그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영화평론가적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가운데 충무로와 진중권교수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 채 같은 토론 자리에 앉았으니 네티즌들이 불편한 심기를 갖는 것은 당연했다. 시사프로그램의 진행자를 맡았던 그가 구조적인 모순을 떠안고있는 충무로에 대해서는 ‘같은편’에 앉아서 함구하고 관객들을 가르치려드는 모습은, 중간중간 날카로운 질문을 했던 방청객보다도 논점에서 벗어나 있었다.왜 디워가 네티즌들의 행태를 가르치는 '시범 케이스'가 되어야 하는가.

어쨌든 그가 받아들인 네티즌의 모습은 평론가에 대한 전쟁선포로 들렸는지, 토론이 끝난뒤에도 마치 평론가의 대표 선수인냥 네티즌과의 싸움을 지속했다. 처음부터 ‘디워’는 없었고, 그의 꼭지를 돌게한 ‘네티즌’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이성을 잃은 네티즌들의 언어폭력과 무례함에는 전혀 동조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네티즌들은 처음부터 논쟁의 대상도 아닌 것이다. 이성을 잃은 그들에게는 무대응이 최선의 대응이다. 그저 순수하게 네티즌에 관한 문제라면, 인터넷 실명제와 연령제도 등에 관해 토론주제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단지 '디워'가 진중권교수의 즐거움을 전혀 자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면, 진중권교수가 영화를 보았던 극장은 영화관람료를 환불해주길 바란다. 예전에 어느 영화관에서도 영화가 재미없다는 관객들의 항의에 극장 영화관람료를 환불해주었던 전례가 있지 않은가.


디 워’와 ‘동양적인 것의 슬픔’*

이 논쟁에서 또 하나의 소외된 대상이 있다. 바로 이무기로 대표되는 한국문화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디 워’는 한국 영화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임과 동시에 우리 문화에 대한 고찰을 한번 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사실 심형래 감독이 한국문와 전설을 성공시키겠다는 포부와 의지는 마치 ‘무한도전’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우리가 영화를 때깔나게 헐리우드 영화처럼 만들려고 노력해도 헐리우드의 그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게다가 그렇게 만들어서도 안된다. 그것은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라 할 수 없다. 한국문화는 이미 슬픔을 느꼈다. 우리는 동양적인 것을 서구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의 시선으로 비춰지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우리조차 철저히 한국적인 것에는 어색하고, 동양적인 쉬크함이 모던함으로 평가받는 현실을 슬퍼해야만 한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서구문화와 결합할 것인가 아니면 독자적인 전통계승을 이어나갈 것인가. 문화라는 것은 주변 문화와 결합되고 융합되면서 발전된다. 여기서 철저히 한국적인 것으로 나가든, 한국적인 상상력과 서구의 그것을 결합하든 그러한 노력 자체가 모두 중요한 의의가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슬프지만 어쩔 수 없이 조선시대의 사랑을 서구적으로 바꾸고-스캔들-, 한국 전설을 미국에서 환생-디워-시켜야 한다. 이것이 그나마 한국 문화를 보편적인 것으로 퍼뜨리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스스로를 옭아매는 오리엔탈리즘의 굴레를 벗어던져야 한다.'데우스엑스 마키나'는 되고 왜 '권선징악'은 안되는가. 미국에서 ‘디워’는 한국에서의 프리미엄을 얻지 못할 것이며, 결코 미국사람들이 한국의 전통에 대해 관심갖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평론가의 모습에서 ‘동양적인 것의 슬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앞서말한 관객들의 욕구란 다름아닌 발전'가능성'이다. 관객들은 그 '가능성'에 주목하는데 왜 그는 보지 못하는 것일까. 중대한 영화사적 기로에서 발전적인 대안 없는 평론은 고답담론에 불과하다. 하긴, 오리엔탈리즘에 빠져있는 제갈량이 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장비의 고뇌를 어찌 이해할수 있겠는가.

동양적인 것의 슬픔은 이화여대 중문과 정재서 교수님의 평론과 평론집의 제목이며, 이의 내용이 인용되었습니다(정재서,《동양적인 것의 슬픔》, 살림출판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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