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들, 개인의 집단인 그들 다수의 의식이 특정한 지점에서 생성돼 하나의 방향으로 모아지는 현상이 분명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균열을 내, 더 멋진 꼬뮌을 만들고 그걸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그러한 생각과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현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월드컵때도 그랬고, 효순-미선 사건 때도 그랬고, 황우석 때도 그랬고, 탄핵 때도 그렇고, 디워로 시끄러운 요즘도 그렇다.
영화를 보지 않은 나로선 영화에 대해 얘기하긴 어려울 게다. 그냥 이무기가 용 되는 장면 보며 감탄하면 되는 영화 한 편 가지고 뭐 이리 말들이 많나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인데...
아무튼 내 생각은 이렇다. 디워를 포함해 저 위에 언급한 5차례의 현상에는.. 모두 '국가'라는 존재의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는 것. 도대체 이놈의 나라에선 '국가'를 언급하지 않으면 그 어떤 집단적 대중의식도 형성될 수 없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대중의식은 철저하게 '국가'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 방향성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국가적 자존심이 무너졌다. 국가의 자존심을 세워야 한다" 는 공통분모만큼은 분명히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 자존심의 실체가 축구든 여학생이든 과학자든 대통령이든 영화기술이든 말이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이라는 공통분모를 말할 수 있다. 즉, 조금이라도 비판을 할 수가 없으며 몇 마디 입을 열었다간 곧바로 역포화가 날아온다는 거다. 당신들이 만들어내는 열풍은 매우 국가주의적이며, 마초적이고, 획일적이다. 라는 식의 비판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국가'라는 권위에 대한 집단적 존중에서 나오는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역설적으로 대중의 지적 수준이 높아짐에서 도출되는 부분도 있다.
다시 말해 비판을 받는 이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비판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는 말이다. 뭐가 국가주의적이고, 마초적이며, 획일적인지... 그런 말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비판들이 (설령 진지하더라도 - 비웃는 식이면 더하다) 힘을 내지 못한다.
영화 공공의적2에서 "그래 난 씨발 우리나라 4강 갔을 때 빤쓰만 입고 광화문네거리에서 춤 췄다"는 강철중 검사의 발언을, 이 맥락에서 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 때문이다.
물론 효순-미선 사건이나 탄핵 사건의 양상은 이 경우 정치적으로, 사회교육적으로 다르다. 나는 분명히 '본질'뿐 아니라 '양상'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경우 '양상' 자체를 더 고민하긴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출발점만 본다면, 이 사건들에 대한 조선일보식 비판들에 대한 아주 평범하고 의식이 미미한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해 본다면 공통점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좋을 만한 지점도 있다. 그러한 집단적 의식들이 꼭 건강하지 못한 것들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황우석의 경우엔 만만찮은 '반미감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반미감정'은 평택 문제 등 절대 다수의 對미국문제에선 발휘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집단적 다수의 의식 속에 미국은 강자요 횡포자라는 감정이 자리잡은 건 확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삼성' 등 자본적 강자에 대해서도 자리잡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강자가 지배하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강자를 극복하기 위해 연대해야 한다"고 갈리는 건 그 다음 문제다.
디워의 경우에도, '비주류에 대한 연민'이 조심스럽게 확인된다. '실제로는' 심형래가 충무로에서 강자다 아니다라는 팩트적 논란을 떠나 "그는 영화계에서 비주류요 약자일 것이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그에 대한 연민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거다.
이 역시 물론, 성공하지 못하고 찌질하고 도전하지 못하는 비주류들에게까지 폭넓게 미치는 연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 역시 그 다음 문제다. 비주류로서 고생하고 천대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자체가 출발점이다. 어쨌든 다들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게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괜한 지적일 수도 있겠다만 분명 현실은 현실이다.
이런 면에서 비주류로서의 우리 자신에 대한 연민과 설움 때문에 심형래 추앙 현상이 빚어졌다고만은 보지 않는다. 만약 우리 자신에 대한 연민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심형래의 경우, '세계 속의 비주류'가 아니라 '이 사회 속에서의 비주류'인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게 더 크다고 생각한다.
왜일까. 심형래와 디워를 둘러싼 논쟁은 한국축구와 황우석에 대한 것과는 다르다. 이걸 편하게 한 범주로 묶어서 생각하는 이들은 심형래를 둘러싼 차원이 한 가지 더 있음을 알면서도 쉽게 망각하거나 굳이 부인하려 하는 것 같다.
심형래가 디워를 통해 헐리우드를 정복하고 한국적 CG 어쩌구 하며 애국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건 맞다. 그러나 대중의 상당수가 그를 지지하는 건 그가 한국적 설움을 대표해 세계에 도전하는, 그런 민족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차원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영구하고 바보 개그나 하면서 찌질하게 놀던 개그맨이 난데없이 기술력 있는 괴수SF영화를 만들겠다며 도전한,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구의 책임이건 상관없이) 상처입고 좌절한 그 과정이 분명히 또다른 하나의 차원을 이루고 있다.
물론 심형래가 정직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실제로 돈도 많이 벌었고, 개그맨의 주류였다. 그러나 자신이 마치 '꼴찌인생'이었던 양 깎아내리며 신파 마케팅을 한 측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도 짚어봐야 한다. 과연 바보 개그하던 사람이 SF영화 하겠다고 나섰을 때, 앞에서 뒤에서 수군수군대는 그런 문화가, 우리 영화계에 정말로 진정으로 전혀 없었을까?? 절대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국의 집단적 문화는 그렇게 쿨하지 않다. 애국주의 마케팅이 없었던 이경규가 이 맥락에서 심형래와 같이 분류될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물론 이경규는 신파 마케팅도 심형래처럼 심하게 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영화계 비주류'로서의 좌절의 차원) 따라서 그런 과정을 통해 여기까지 온 사람에 대해 대중이 지지를 보내는 것을 간단하게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학력 위조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어제 근무를 하면서 이 논란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들을 죽 취재하고 인터뷰했는데.. 그들의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위조하고 조작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들이 그렇게밖에 할 수 없도록 만든 사회의 책임도 크지 않냐는 거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학력이든 지식이든 경력이든, 뭐가 안되는 조건과 상황에서 출발해 악전고투하는 사람들에게 대중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은 더욱) 분명히 관대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고투끝에 '성공했다'고 인식되는 사람들에는 특히 그렇다.
이것은 사회문화적으로 공동체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의 극복을 오직 개인의 노력과 고투로만 해내라고 요구한다는 점에서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또 그런 노력과 고투를 하지 않고, 좌절하고 퍼져버린 사람들에 대해 매우 차가운 것도 옳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이건 출발점이라는 거다.
이것이 '비주류인 자신을 향한 연민'이든, '비주류인 타인-집단을 향한 연민'이든,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든, 대중 안에는 분명히 공동체가 사회문화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잘못에 대한 인식이 있으며, '철저히 개인적인' 차원이긴 하지만 그 잘못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암묵적인 지지를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의 집단적 의식을 움직이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움직임을 통해 사회를 좀더 진보적으로 바꿔나가고자 꿈꾸는 이들이라면, 대중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저항을 지지하도록 놔두지 말고 이것을 좀더 집단적이고 공동체 전체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저항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출발점이 확인된 이상 말이다.
* 편집자 柱 : 이 칼럼의 필자인 임명현 기자는 MBC 사회부 사건취재팀 기자로서 '네이션코리아'에만 무 원고료로 특별기고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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