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것도 옛말이다. 사회 곳곳에 노인혐오가 팽배해 있는 까닭이다. 이를 부채질하는 것이 진보좌파진영이다. 열린우리당 시절 쏟아져 나왔던 노인 비하 발언을 떠올려 보라. 여기에는 세대 간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대립이 숨어 있다. 진보진영의 주축을 이루는 386세대가 이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세대가 사라져 줘야 한다. 산업화의 신화를 보존하고 있는 노인들이 386의 역사관과 충돌하기 때문이다.진보진영이 노인들에 대해 덧씌운 혐의가 있다. 젊은 세대가 겪는 현재의 경제적 고통을 모두 그들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한국 노인들은 온통 부자들뿐이다. 그들이 부동산을 장악하고, 연금을 펑펑 타 먹는 탓에 젊은 세대가 빈곤해 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다 맞는 것도 아니고 다 틀린 것도 아니다. 한국사회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곳곳에서 불균형이 발견되는 것은 맞다. 그 가운데서도 대기업 집단과 부동산 재벌들은 젊은 세대가 결코 따라갈 수 없는 격차를 만들어 놓았다.그러나 세대 간의 헤게모니 게임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산시장과 노동시장을 구분해서 봐야한다. 자산시장은 소위 ‘마태효과
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안철수가 과잉 평가되는 사회현상을 비판했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이 안철수 개인에 대한 공격과 이병철, 정주영 회장에 대한 숭배로 받아들여 유감이었다. 필자가 대학생들의 조사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업하고 싶다’던 학생들이 정작 모시고 싶은 경영자로는 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기업가를 첫 손에 꼽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을 대상으로 ‘입사하고 싶은 기업’ 순위를 매기면 만년 1위를 차지하는 것이 삼성전자다. 반면 안철수연구소는 저런 순위에 끼지도 못한다. 왜 안철수라는 사람은 인기 있는데 안철수연구소는 인기가 없는가? 왜 삼성전자는 인기 있는데 창업자는 기억하지 못하는가? 필자는 이 불일치가 뿌리 깊은 한국적 현상이라고 느꼈다. 많은 분들이 시대적 변화에 따라 기업가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는 주장을 펴지만 이 또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렇다면 한국이 낳은 최고의 사회적 기업가가 안철수인가 말이다. 젊은 학생들의 기억에는 안철수가 직원들에게 주식을 분배한 것만 기억에 남는 모양인데, 이미 그런 사회적 환원은 유일한이라는 초창기 기업가가 실천한 바 있다. 더욱이 그는 조국의 식민지시절 미국에서 독립운동에까지 참여한
조선의 역사는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후기로 구분한다. 우리가 유교국가로 알고 있는 조선은 실제로 조선 후기 사회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 유교국가로의 전환에 200년이 걸렸다. 현재 대한민국은 조선이 망한지 10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문화적 관성으로 볼 때 현재의 한국인들은 여전히 공고한 유교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이런 인식을 정당화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인물관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경영자는 스티브 잡스다. 애플사의 실적이 상한가를 지속하면서 왜 한국에는 이런 인물이 없느냐는 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한국 같은 유교사회에서 그와 같은 인물이 출현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최근 인터넷 구인구직회사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모시고 싶은 CEO를 조사한 결과 안철수가 41.2%의 지지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이 조사결과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랍게 다가온다. 우선은 그가 경영 일선을 떠난 지 10년이 다 돼가는 전직 경영인이라는 점이다. 그의 삶에서 경영자로 존재했던 시기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를 더 이상 의사로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기업가로 평가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런 평가의
한동안 잠잠하던 대학생들의 시위가 재연됐다. 과거 민주화를 위해 궐기하던 학생들이 이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나섰다. 어쨌건 진보진영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아마도 ‘Again 2008’을 기대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대학생들이 궐기하자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진 집단이 있다. 바로 교수들이다. 이들이 지식인의 상징처럼 사회적 발언권을 독점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욱이 교수사회는 언론인, 법조인과 더불어 정치권에 입문하는 비율이 가장 높다. 그만큼 현실문제에 대한 책임도 지대하다. 그 덕분인지 오늘날 한국사회의 청렴도는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러나 지금 대학생들의 시위에 직면해서 우리사회는 과거의 관성을 벗어날 때가 되었다. 이제 비판의 권리를 독점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예외를 인정받았던 지식인 사회에 감시의 시선을 돌려야 할 때다. 현재는 대학생들에게 관심이 집중되지만 대학 구성원들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 가운데는 시간강사도 포함된다. 이들은 결코 학문적 업적이 아닌 다른 이유로 인해 대조적 대우를 받는다. 한국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는 대학캠퍼스가 기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시간강사와 교수들의 처우는 극과 극이다. 그런데 미주알고주알
필자는 4월13일자 미디어워치 97호에서 손학규 대표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서민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당에서 이런 인물이 후보로 나와 대권을 잡는다면 그는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보낸 트로이 목마인가?’ 보수와 진보를 넘나든 그의 이력이 미래에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사유는 보다 현실적 문제로 다가왔다. 지난 4.27 재보선의 최대 접전지 분당을에서 손학규가 생환함으로써 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당면과제가 되었다.그를 당선시킨 분당 민심의 변화에 대해 좌파언론은 특유의 설레발이식 분석으로 도배하고 있다. 어제까지는 정의를 말살하고 기회주의를 만연시킨 주범처럼 묘사하더니 하루아침에 ‘합리적 중산층’ 운운하는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워낙 정치철새들에 익숙한 좌파들이기에 이념의 급선회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설령 그런 분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분당주민들의 회심은 한국형 양심선언 이상으로 평가하기 힘들다. 그들이 정부여당에 등을 돌린 이유로는 부동산 가격의 폭락이 빠지지 않는다. 뒤집어 말하면 부동산 가격만 상승했다면 정부여당에 대한 지지가 계속되었을 거라는 의미다. 분당에서 승패를 갈랐다는 30, 40대들의
본발 쓰나미로 실종된 것 같던 4.27 재보선에 대한 관심이 뒤늦게 불붙고 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분당 출마선언으로 전국 4개 지역이 모두 관심지역으로 떠올랐다. 분당은 전·현직 여야 대표의 대결이라는 점과 강원은 전현직 MBC 사장간의 대결이라는 점, 그리고 김해와 순천은 각각 친노세력과 난닝구의 부활이 관전 포인트다.전체적으로는 대통령의 임기 중반에 펼쳐진다는 점에서 지난 지방선거처럼 중간평가적인 성격이 있지만 유시민을 둘러싼 야당 내부의 역학관계도 흥미롭다. 언제부턴가 유시민이라는 이름 석 자가 곧 선거의 주요 변수가 되어버렸다. 한 번도 조용한 적 없던 이슈메이커지만 그를 향한 공격은 여당이 아닌 야권 내부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과거 피아를 가리지 않고 독설을 난사한 경력으로 볼 때 자업자득인 셈이다. 하지만 난처한 것은 그가 아니라 민주당이다. 명색이 제1야당이면서 매번 유시민 하나를 극복하지 못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모습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유시민식 정치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 것이 민주당인 것을.민주당이 그를 버거워 하는 것은 비록 싸가지 없을지언정 틀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옳은 소리를 거북하게 해야
미네르바 박대성씨의 최근 모습이 화제다. 2009년 언론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던 거구였다. 엉뚱하긴 하지만 외모만큼이나 낙천적이었을 법한 그는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다. 스스로 밝힌 이유가 놀랍다. 감옥에 있는 동안 응원부대로 남아있을 줄 알았던 좌파진영에서 순교를 종용했다는 것이다. 낯선 이들로부터 죽음을 재촉 받고, 이제는 그 정체성마저 의심받는 처지에 몰리자 끼니를 거의 잇지 못한다고 한다. 한때 인터넷 경제대통령으로 추앙받던 그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미네르바가 보여주는 모습은 좌파들의 선동에 대처하는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교훈을 준다. 그들이 쳐주는 박수소리에 취하는 것이야말로 더 없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순교에 대한 좌파들의 열망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김지하 역시도 옛 동지들에게 동일한 경우를 겪었다. 그의 부인 김영주씨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지하의 수감기간에 대한 증언을 했다. 박정희 체제 하에서 7년을 옥살이하는 동안 그를 괴롭힌 것은 동지들로부터 받는 순교에의 종용이었다. 그 배신감에 김지하는 출옥 후 정신병원을 전전했는데, 그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케 한다. 1991년 분신정국
최고은이라는 한 무명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사회에 큰 파장을 던지고 있다. 한 언론이 그녀의 사인을 ‘아사’로 알리면서부터다. 최고은의 죽음은 스승이었던 소설가 김영하가 사인을 부정하면서 무성한 뒷말을 남기고 있지만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가 활동하던 공간이 화려한 영화계였다는 점이다. 현재 대한민국 영화계는 할리우드의 공습을 이겨내고 자국영화가 절반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하는 전 세계적으로 드문 시장이다. 인도를 제외하면 이런 사례는 선진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적어도 한국 영화계가 전례 없는 호시절을 구가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번영의 한 가운데서 저개발 국가식의 양태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또 다른 점이 있다. 영화인들의 사회적 발언과 책임에 관한 문제다.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진보강박증은 유명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현재 가장 왼쪽에 위치한 집단이 영화계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고, 화려한 유명세를 즐기는 영화계는 소위 패션좌파들의 소굴이다. 배우 조재현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영화판에서 선거 때 한나라당 찍었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는다’고 고백했다. 한나라당은 엄연
지난해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피격사태로 인해 국방의 중요성이 한층 강조되고 있다. 그 가운데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군가산점 부활 방안이 거론되면서 또 다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헌재에서 위헌 판결이 내려진지 10년이 지났으나 해묵은 문제는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다. 왜 군가산점 대책은 사회적 논란만 일으키고 해결되지 않는 것일까?한국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아주 고약한 전통이 있다. 자신들 집권 이전의 역사를 온통 ‘5000년 썩은 역사’로 매도하는 것이다. 이들은 마치 군가산점을 인정하던 과거의 대한민국은 여성과 장애인을 억압하는 사회였던 것처럼 얘기한다. 하지만 과거 우리사회가 그런 시스템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대해서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여성부는 지난 1월11일 보도자료를 통해 ‘위헌 논란이 있고 극소수에 혜택을 주는 군가산점보다 제대군인 전체가 혜택을 받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똑같은 소리를 10년째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바로 그 현실적 방안은 지금부터 모색해야 될 사항이 아니라 위헌판결이 내려진 1999년 시점 이미 정책으로 실시되었어야 할 문제다. 지난 10여 년 간
연초 매일경제신문에서 30대들의 사회의식을 조사한 기사가 실렸다. 386세대처럼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20대처럼 관심의 대상도 아닌 잊혀진 세대를 주목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들이 한동안 한국사회에서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가 새롭게 주목받는 것은 특이한 정치적 성향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막연히 386세대를 진보라고 평가하는 인식과는 달리 30대들은 선거 때면 가장 진보적인 투표행태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매일경제신문의 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이들이 20대 때는 결코 진보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30대들은 세월을 거슬러 가는 특이한 집단이다.물론 보수화되거나 진보화된다는 것이 나쁜 의미는 아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상의 자유가 있고 생물학적 연령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의사를 드러낼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의 정치적 선택이 과연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이었나 하는 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자해에 가까운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30대들은 현재의 20대들이 보여주는 탈정치화, 개인주의 등의 신세대문화를 만든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현재의 정치성향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20대들은 진보정권 10
2000년대 초 여성계에서 박근혜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진 적이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경쟁력 있는 정치인에 불과했던 그녀는 이제 누가 뭐래도 대선승리에 가장 근접한 거물급 정치인이다. 여성계에 한정됐던 논의가 전체 대한민국의 현실적 고민으로 다가온 것이다. 한국에서 대선을 앞둔 5개월은 조선왕조의 500년과 같다고 얘기한다. 그만큼 한국사회의 변화 속도는 빠르다. 이런 사회에서 진보주의자 노릇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몇 년에 한 번씩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는 어제의 진보가 오늘의 수구로 전락해 버린다.흔히 보수진영에서는 진보진영이 한국현대사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진보진영 내에서도 한국사회의 성취에 가장 인색한 것은 여성계 인사들이다. 경제기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물질적 변화가 여성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을 법도 하지만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여전히 여성지옥이고 야만의 땅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세대 간에 있어 또 다른 폭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한국사회의 변화속도를 감안한다면 노인들과 젊은 세대 사이에는 수 백 년의 시차가 존재하는 셈이다. 더욱이 일부 미래학자들 가운데는 한국을 미래에 가장 근접한 사회로 평가하
한국 도서시장에서 사회과학 서적이 부활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전반기에 ‘정의란 무엇인가’가 시장을 평정한 이후 하반기에는 한국학자 장하준의 저서가 다시 붐을 일으키고 있다. 장하준은 분명 이 시대 한국 지식인들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꼽히는 정통 학자라기보다는 대중적 글쓰기를 통해 영향력을 넓히는 공공적 지식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그러나 한국사회는 장하준을 마냥 뿌듯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마치 박찬호나 박지성이 해외 빅 리그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그를 온전히 한국 지식인 사회가 탄생시킨 인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평가하면 한국 내에서는 장하준과 같은 토종지식인이 태어날 수가 없다. 단지 한국어가 주류언어가 아니라는 이유만은 아니다. 한국의 지식생태계가 끝없이 내부를 지향하는 폐쇄적 성향 때문이다. 지난 2005년 KBS1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이런 장면이 생생하게 방영된 바 있다. 당시 장하준은 대표적 진보좌파 지식인으로 꼽히는 진중권으로부터 상식 이하의 공격을 당했다. 그러나 그날의 논쟁으로 상처를 입은 것은 장하준이 아니라 진중권이었다. 그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한국 진
북한의 기습폭격으로 시작된 연평도 사태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다. 분명 사안으로 봐서는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사건인데 너무 조용해 섬뜩할 정도다. 세상이 이렇게 조용한데는 유명 인사들의 침묵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해병대 출신 인사 몇몇만이 주목을 받았을 뿐 지난 2008년 광우병 시위 당시 쏟아져 나왔던 유명인들의 주옥같은 어록에 비하면 낯설기 짝이 없다. 과연 광우병의 공포가 전쟁의 공포보다 컸던 것일까?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도 유명 인사들이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뚜렷한 특징은 이들 대다수가 좌파적 성향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진작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미국 대선이 치러지면 할리우드에선 민주당에 대한 지지발언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과거 미스 유니버스 대회 출전자들이 틀에 박힌 듯 ‘세계평화’를 운운한 것처럼 셀러브리티들의 세계에서 좌파 커밍아웃은 하나의 패션이다.그렇다면 왜 유명 인사들은 친좌파적 발언에 집중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대중 스타들에게 진보담론은 쿨한 이미지를 전파하는 좋은 소재다. 지금처럼 ‘애국’과 같은 단어가 진부해진 세상에서 ‘인권’, ‘평화’와 같은 구호는 대중의 폭넓은 지
지난 6월 지방선거 출마 후보자들의 병역사항을 공개한 내용을 보면 뜻밖의 결과가 눈에 띈다. 한나라당이 병역면제 정당이라는 사회적 관념과는 달리 민주당의 병역미필자 비율이 더 높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보면 국회의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지난 17대 국회에선 한나라당 21.4% 대 열린우리당 25.4%, 현재의 18대 국회에선 한나라당 15.4% 대 24.6%로 모두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병역면제 비율이 높다. 민주화세력을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 학생운동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이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라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이제는 군대 대신 감옥 갔다 온 이들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공통된 인식을 도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실상 386정치세력이 수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 집요하게 보상을 요구하는 부분이 바로 수감이력이다. 우리사회가 언제까지 이들에게 인질로 잡혀있을 수는 없는 이상 한번쯤 정리가 필요하다. 더욱이 한홍구의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 진보진영의 병역미필자들 문제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병역문제에 대해서는 시민단체가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병들의 복무 여건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지난 6월 KBS 심야토론에서는 지방선거에 드러난 30대들의 목소리를 듣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그동안 사회적 발언권을 가지지 못했던 자들을 배려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기획이었다. 패널로 출연한 이들은 386논객만큼 익숙지는 않은 얼굴로 우리사회 30대들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드물게 찾아온 기회는 생산적이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표심을 긍정하는 측으로 참여한 고재열과 탁현민은 마치 한국의 30대들이 여전히 오렌지족이기라도 한 듯 묘사했다. 특히 탁현민은 30대들이 민주화 운동에 무임승차한데 대한 부채의식이 있다고 발언함으로써 자학적 역사관을 드러냈다. 이 정도면 세뇌교육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수준이다. 가치관의 차이를 떠나 사실관계 자체가 왜곡되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도 무리는 아니다. 전대협 의장님께서 솔방울로 화염병을 만들고 나뭇가지로 쇠파이프를 만들었다는 전설을 만들어 내지 않은 게 다행인지 모른다. 이날 토론은 의식 있는 척 하는 젊은이들이 어떤 프레임에 갇혀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오늘날 386의 권력은 역사를 장악한데서 나온다. 그것은 자신들을 미화하기 위해 철저히 조작된 역사다. 386정치건달들이 무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