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잠잠하던 대학생들의 시위가 재연됐다. 과거 민주화를 위해 궐기하던 학생들이 이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나섰다. 어쨌건 진보진영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아마도 ‘Again 2008’을 기대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대학생들이 궐기하자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진 집단이 있다. 바로 교수들이다. 이들이 지식인의 상징처럼 사회적 발언권을 독점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욱이 교수사회는 언론인, 법조인과 더불어 정치권에 입문하는 비율이 가장 높다. 그만큼 현실문제에 대한 책임도 지대하다. 그 덕분인지 오늘날 한국사회의 청렴도는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러나 지금 대학생들의 시위에 직면해서 우리사회는 과거의 관성을 벗어날 때가 되었다. 이제 비판의 권리를 독점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예외를 인정받았던 지식인 사회에 감시의 시선을 돌려야 할 때다.
현재는 대학생들에게 관심이 집중되지만 대학 구성원들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 가운데는 시간강사도 포함된다. 이들은 결코 학문적 업적이 아닌 다른 이유로 인해 대조적 대우를 받는다. 한국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는 대학캠퍼스가 기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시간강사와 교수들의 처우는 극과 극이다. 그런데 미주알고주알 세상에 할 말 많은 교수들이 왜 이런 현실에는 침묵하는 것일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현재 교수들이 받는 사회적 대우가 과연 정당한가 하는 점이다. 한국 대학등록금이 높아 보이는 것은 사립대학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탓이다. 미국 사립대학과 등록금을 비교해 보면 한국 사립대학은 여전히 1/5수준에 머무른다. 그런데 교수 연봉만큼은 미국과 별 차이가 없다. 만일 현재의 한국 대학등록금을 살인적 수준이라고 표현한다면 학생들의 고혈을 빠는데 일조하는 것이 교수집단인 셈이다. 더욱이 고용의 안정성과 방학, 안식년 등의 혜택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신의 직업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사회의 또 다른 희생자들도 있다. 청소노동자들의 경우다. 이들은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저임금 노동자가 겪는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대학사회에서 가장 고령이면서 불안한 고용구조와 극단적인 저임금을 감내하는 처지다. 진보적 교수들이 비판하기 좋아하는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대학에서 가장 첨예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양극화의 진실은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할까?
조교들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마지막 남은 봉건적 피지배층을 꼽으라면 이들을 꼽아야 한다. 조교들에 대한 교수들의 사적 지배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인문학의 위기라고 엄살떠는 이들 역시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적 발언을 보면 다들 점잖고 고상한 데 왜 교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통 받는 것일까?
이쯤 되면 교수들을 대학 내에서 악의 축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을 성 싶다. 그런데도 이들이 사회적 감시를 벗어나 있는 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관심을 바깥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의 티끌을 찾아 헤맨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대학생들의 궐기에 박수쳐 주는 이라면 교수들의 위선과 과도한 사회적 권리에 대해서도 반드시 칼을 대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생계형 논객들의 비애
대학교수들이 안정된 철밥통 때문에 타락해 간 사례라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언제부턴가 또 다른 비판적 지식인으로 등장한 논객들의 경우다. 이들 중 일부는 오로지 글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눈물겨운 생계형 논객들이다. 문제는 자신들이 써대는 글줄에 밥줄을 기대고 있는 이들이 개인적 이익에 초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노무현 관장사로 먹고사는 노빠 기관지들이다. 일각에서는 노무현이 남은 지지자들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고 평가하는데, 노무현의 자살로 가장 큰 반대급부를 본 것이 아마 이들일 것이다.
딴지일보의 총수 김어준은 노무현만큼이나 아찔한 롤러코스터의 주인공이다. 한창 IT붐이 일 당시 그는 주목받는 청년 기업가였다.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투자자금을 감당 못해 외제 고급승용차를 몰고 한창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 그가 포털사이트 야후로부터 800억 인수제의를 거절한 것은 ‘아이러브스쿨’과 함께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한 사례로 꼽힌다. 거품이 절정을 구가할 때 그는 ‘8조원으로도 키울 수 있는데 왜 매각을 하냐’는 호기를 부렸다. 그 후 IT거품의 붕괴와 함께 딴지일보는 신화 속으로 사라져 가는 듯 했다. 그러던 딴지일보가 노무현의 죽음 이후 노빠들의 성지로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오연호의 오마이뉴스 역시도 노빠 기관지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이들은 이명박 정권이 누군가의 밥줄을 끊는 정권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여기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멀쩡히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밥줄을 끊었을 리 없다. 그런 이들은 정권의 부침에 따라 자신의 생계가 걸린 이들이며 정권교체에 목숨을 거는 것도 이들이다. 오마이뉴스는 2000년 김대중 정권 당시 창간했는데, 정부의 지원 없이 오마이뉴스가 성장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등장 후 오마이뉴스는 ‘10만인 클럽’이라는 후원단체를 결성한다. 자생적으로는 굴러가기가 거의 불가능했다는 방증이다.
이들 노빠 장사꾼들에게 이명박 정권은 참 고마운 존재다. 대학등록금이 언제 가파르게 올랐는지, 야당 원내총무가 그 시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모든 것이 4대강 탓이고, 이명박 때문이라고 주장하면 그만이다. 이명박은 단지 이명박이기 때문에 악일뿐이고, 노무현은 그 자체로서 선한 존재일 뿐이다. 거기에 그 이상의 판단 기준은 없다.
정치웹진 서프라이즈의 경우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사이트는 아예 처음부터 현직 언론인이 노골적으로 노빠 장사를 하겠다고 만든 경우였다. 이런 곳의 논객들이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울 리 없다. 2004년에는 노무현 정권의 이라크 파병정책으로 진보진영에서 공개적인 지지철회 선언이 잇달았다. 서프라이즈 역시도 처음엔 파병 반대 여론이 우세했다. 그런데 2004년 1월13일 청와대에서 친노 성향의 논객들을 대거 초청, 식사를 접대한 뒤 게시판의 여론은 급변했다. 비전투병 파병은 곧 파병철회로 연결될 거라는 자가발전식 글들이 잇달았고, 파병에 대한 비판은 자취를 감췄다. 그 후로도 청와대에서는 주요 논객들을 초청해 식사를 제공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마다 친노 논객들은 얌전히 정부의 요청에 순응했다. 이런 장면은 참으로 지켜보기 역겹다. 초기 불제자 같은 걸식집단도 아니면서 여기저기 밥 한술 얻어먹으러 다닌 노고가 눈물겹다고 해야 할까. 인터넷 세계에서는 조금만 친(親)한나라당적이거나 반(反)민주당적인 댓글이 달리면 곧바로 알바라는 공격이 들어온다. 하지만 진정으로 인터넷 세계에서 알바들을 고용한 정권이 누구였는지는 잘 따져볼 일이다.
이런 생계형 논객들이야말로 한국여론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주범들이다. 김어준이나 오연호는 한 때 호기롭게 외쳤던 것처럼 정말 가치 있고 자생력 있는 회사를 키우는데 우선하길 바란다. 정부나 방문자들에게 손 벌리는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선정적인 황색언론의 수준을 넘을 수 없다. 지금 이 사회가 절실히 기다리는 것도 말 잘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는 문제해결사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도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진보 지식인들은 한국자본주의의 천민스러움이 대한민국 초기 정치지도자들 때문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승만이나 박정희 같은 독재자들도 물질적인 면에서는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인품보다는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였던 정주영이 소박한 삶을 살았던 것과 같은 이유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듯이 돈도 써본 놈이 쓸 줄 아는 법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성장했던 한국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청렴했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화 이후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복병을 만났다. 지도자 스스로는 청렴하고자 했으나 주변 인사들의 타락으로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지켜봐야 했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자본주의가 뼛속 깊이 각인된 자들이다. 자본의 유혹을 경계하고 항체를 길러야 하는 것은 지식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 시대의 독립된 지성은 자본으로부터 독립이 최우선적으로 담보되어야 한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세상의 전방위적 공세로부터 고고한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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