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은이라는 한 무명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사회에 큰 파장을 던지고 있다. 한 언론이 그녀의 사인을 ‘아사’로 알리면서부터다. 최고은의 죽음은 스승이었던 소설가 김영하가 사인을 부정하면서 무성한 뒷말을 남기고 있지만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가 활동하던 공간이 화려한 영화계였다는 점이다. 현재 대한민국 영화계는 할리우드의 공습을 이겨내고 자국영화가 절반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하는 전 세계적으로 드문 시장이다. 인도를 제외하면 이런 사례는 선진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적어도 한국 영화계가 전례 없는 호시절을 구가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번영의 한 가운데서 저개발 국가식의 양태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점이 있다. 영화인들의 사회적 발언과 책임에 관한 문제다.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진보강박증은 유명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현재 가장 왼쪽에 위치한 집단이 영화계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고, 화려한 유명세를 즐기는 영화계는 소위 패션좌파들의 소굴이다. 배우 조재현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영화판에서 선거 때 한나라당 찍었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는다’고 고백했다. 한나라당은 엄연히 선거를 통해 집권한 여당이지만 이런 현실이 영화계에서만큼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박찬욱, 봉준호, 변영주 등의 감독들은 아예 진보신당의 당원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붉은 광장의 한 가운데서 1970년대 청계천 노동자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최고은의 죽음은 단순한 영화계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이 나라 진보좌파를 참칭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위선이 만들어 낸 결과다. 오늘날 한국 영화계는 재벌기업의 투자자금과 상영관 배분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곳이다. 박찬욱이나 봉준호처럼 평단과 시장의 반응을 고르게 누리는 자들은 재벌의 지원과 스태프에 대한 착취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들은 과연 이런 영화계 시스템의 공모자인가, 아닌가? 두 감독이 모두 한국영화 흥행신기록을 세웠던 것을 상기해보자. 과연 그때의 스태프들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있었을까? 이들은 ‘네가 하면 착취, 내가 하면 예술’이라는 이중적 잣대를 세상에 들이대고 있다.
이런 영화계 인사들의 행태가 어디서 기인하는지 잘 보여주는 글이 있다. 최근 김규항은 한겨레 칼럼을 통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물론 오연호, 조국 같은 분들에게, 즉 개혁적인 중산층 엘리트들에게 이명박인가 노무현인가는 ‘그 밥에 그 나물’이 아니다. 그들에게 이명박인가 노무현인가는 정권은 물론 학술, 문화, 방송, NGO 등의 헤게모니를 ‘우리가 갖는가 저들이 갖는가’가 달린 절체절명의 일이다. 그들에게 그런 정권교체가 세상이 뒤집히는 수준의 변화라는 것, 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변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을 존중한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권교체를 굳이 ‘진보집권’이라 부르는 것이다.”
김규항의 의견을 빌리면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진보놀음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밥줄과 사회적 명성이 혼합된 ‘절체절명의 일’이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 이해관계를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포장할 때 최고은과 같은 이들을 사회적 사각지대에 방치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조선 문객의 후예들
이런 위선은 글쟁이들의 세계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황석영은 지난 2007년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노대가들이 늙어가면서 글 쓰는 행위를 무슨 하늘이 내려준 형벌처럼 엄살을 떨고 과장하는 것에 구토를 느낀다’고 했다. 문인들의 행위가 역겹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황석영이 언급한 노대가는 고은이라는 것이 문단의 중론이다. 한때 ‘대통령병 환자’라는 말이 유행했던데 비춰보면 그를 ‘노벨문학상 환자’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 해마다 노벨상 시즌이면 노르웨이에 죽치고 앉아 노골적으로 상을 구걸한지가 몇 해째다. 이런 풍경은 단순한 노시인의 망령이 아니라 노벨상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한국문단의 상징적 풍경이다.
그런데 이렇게 노벨문학상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나오는 얘기가 있다. 정부가 지원금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 번역도 팍팍 밀어주고, 문인들에게 창작지원금도 보조해야 문학이 산다는 얘기다. 하지만 평소에는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들처럼 말하던 이들이 정작 자신들의 밥그릇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대기업 경제연구소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경제적 지원이 문학을 발전시킨다는 논리야말로 자본중심적 발상이다. 도대체 자본을 투자해서 발전하지 않는 분야가 어디에 있는가? 스포츠, 대중예술, 과학 어느 것 하나도 경제적 지원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오늘날 아시아를 휩쓰는 한류열풍이 과연 경제발전 없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결국 한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물적 토대의 뒷받침에 의해서 발전이 가능하다.
현재 진보문인이라 평가받는 이들 가운데는 생존 중에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관을 지을 정도로 호사를 누리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관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사회적 대우는 과분하다 못해 본말이 전도된 경우다. 최근 들어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사업인 ‘메세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데 이들의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평가는 어떤 것이었나? 그들의 주장처럼 한국기업이 정경유착과 노동자들을 착취한 대가로 돈을 벌었다면 그 더러운 돈은 받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문예부흥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메디치 가문은 고리대금업자였다. 당시 가톨릭이 금하고 있던 사악한 일을 통해 번 돈이 유럽의 문화를 융성시킨 바탕이 되었다. 현재 한국 대중들 대다수가 사회적 기업가로 착각하고 있는 19세기 미국의 산업재벌들은 당대에 ‘강도귀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들이 현재와 같은 인간의 얼굴을 가지게 된 데는 한 세기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시공을 초월해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정작 피터 드러커가 가장 위대한 기업가 정신의 소유자로 꼽았던 한국기업가들은 여전히 저평가 된 채로 말이다.
돈을 번다는 것, 혹은 한 사회가 근대화한다는 것은 그렇게 이전투구의 세상에서 진주를 건져 올리는 행위다. 그 과정이 결코 아름다울 수 없고, 그래서 그 주체들을 비난할 수만은 없음을 민중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글쟁이, 영화쟁이들만큼은 이런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것은 이들에게 애당초 현실적인 노동윤리가 부재한 탓이 아닐까?
조선시대 세도가의 집안에는 한 가지씩 기예를 보유한 문객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문화계 인사들의 원형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의 폐해는 그들이 신세를 지는 세도가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정작 그들의 예술을 지탱했던 것은 그 시대에 고된 노동을 떠맡았던 일반 백성들이었다. 도대체 문간방에서 고매한 학식을 자랑하고 예술을 논하는 것이 대중들에겐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그 문객들이 당대의 대중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기는 했을까?
해방 후 북으로 간 카프 문인들 상당수가 숙청된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입으로 제 아무리 주절거려도 글쟁이들이란 결국 기생하는 근성이 뼛속깊이 각인된 자들이라는 것을 공산주의자들은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나라의 근대화 과정을 업신여기면서도 과실을 논할 때면 제일 먼저 숟가락을 얹는 자들에게 이 사회는 너무 관대한 듯하다. 북으로 가면 제일 먼저 처형당할 이들이 대한민국을 비난한 덕에 잘 먹고 잘 산다면 이보다 더 불공정한 사회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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