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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4월13일자 미디어워치 97호에서 손학규 대표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서민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당에서 이런 인물이 후보로 나와 대권을 잡는다면 그는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보낸 트로이 목마인가?’ 보수와 진보를 넘나든 그의 이력이 미래에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사유는 보다 현실적 문제로 다가왔다. 지난 4.27 재보선의 최대 접전지 분당을에서 손학규가 생환함으로써 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당면과제가 되었다.

그를 당선시킨 분당 민심의 변화에 대해 좌파언론은 특유의 설레발이식 분석으로 도배하고 있다. 어제까지는 정의를 말살하고 기회주의를 만연시킨 주범처럼 묘사하더니 하루아침에 ‘합리적 중산층’ 운운하는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워낙 정치철새들에 익숙한 좌파들이기에 이념의 급선회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설령 그런 분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분당주민들의 회심은 한국형 양심선언 이상으로 평가하기 힘들다. 그들이 정부여당에 등을 돌린 이유로는 부동산 가격의 폭락이 빠지지 않는다. 뒤집어 말하면 부동산 가격만 상승했다면 정부여당에 대한 지지가 계속되었을 거라는 의미다. 분당에서 승패를 갈랐다는 30, 40대들의 표심을 높게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물을 빨아먹을 때는 침묵하고 자신에게 섭섭하게 대하면 양심 선언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분당주민들에게 천당 같던 시절은 노무현 정권 시기였다. 그것은 노무현과 코드가 맞아서도 아니고 열린우리당의 행태가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그 시절 부동산이 폭등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노빠들은 당시의 부동산시장 과열을 서울 시장이었던 이명박의 뉴타운개발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시기 분당의 부동산 폭등은 누구 탓으로 돌려야 하나. 이명박의 서울시장 임기와 손학규의 경기도지사 시절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적어도 분당주민들에게 그의 임기 기간은 둘도 없는 호시절이었다. 서울 종로에서 낙선했던 손학규가 분당에서 당선된 데는 이런 연유도 있지 않았을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손학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선거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누가 되더라도 부동산 시장을 띄우지 못하면 정치적 사망이라는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난 정권에서 최고 권력자로부터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선언을 들어야했다. 당시까지 시장이란 삼성과 같은 대기업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제 부유한 유권자들이 부동산을 매개로 다시 정치권력을 길들이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제 이 나라의 정치권력은 목사 앞에 무릎 꿇고, 부동산 권력집단 앞에 빌빌 기는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다.

분당에서의 승리 후 대권주자로서 손학규의 지지율은 급상승하고 있다. 특히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이었던 호남표심이 결집하고 있다는데, 이는 참으로 난닝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형태의 지지를 통해 자신들이 무엇을 얻었는지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모양이다. 지난 1998년 경기도지사 선거 당시 한나라당의 후보였던 손학규는 ‘한승헌 감사원장이 고문으로 있는 호남향후회가 불법적으로 선거운동을 한다’며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에 호소한바 있다. 이런 인물의 득세는 곧 호남의 악몽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손학규는 한나라당에서 주류지역인 영남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만년 군소후보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이 탈당으로까지 이어진 원인이었다. 그러나 역으로 그는 수도권에서 자신의 승리를 빌미삼아 민주당의 호남후보 불가론을 전파하게 될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순천지역구를 순순히 민주노동당에 양보한 것도 호남을 포기해야 승리한다는 공식을 다시 한 번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손학규의 호남포기론은 향후 더욱 강화될 것이다.

개발독재 근대화론

손학규의 성공은 무엇보다 우리사회에 또 하나의 사회학적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바로 개발독재가 한국사회를 근대화시켰다는 담론이다. 이것은 보수진영에서 광범위하게 인정받는 논리다. 그런데 이를 입증하는 것이 현재의 민주당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이광재는 지난 3월 ‘이젠 손 대표같이 예측가능한 분이 대통령이 되는 걸 보고 싶다’고 했다. 덧붙여 손학규가 ‘나라가 어려울 때 민주화 운동을 했고, 국회의원, 도지사, 당대표를 역임한 분’이라고 강조했다. 이광재가 손학규의 훌륭한 이력으로 언급한 것 중 중요한 부분은 한나라당에서 쌓은 것이다. 그런 이력이 훌륭한 정치지도자로서 예측가능한 원천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필자는 이광재의 이런 관심법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손학규의 행적을 어떻게 보면 예측이 가능한가? 그가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 공화당과 민정당의 맥을 잇는 정당에서 승승장구 하는 모습이 예측 가능했을까?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잘 나가던 시절 민주당의 대표가 된 현재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었을까? 허기사 노무현 대통령이 침 뱉었던 손학규에게 이광재가 투항할 것도 예측하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아마도 그런 예측은 이광재처럼 변절 내비게이션이 장착된 인물에게만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정직하게 말하면 한국정치사에서 손학규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은 일찍이 없었다. 이런 인물이 진보진영 내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은 이미 한국 진보세력이 변절과 굴종으로 점철된 집단임을 반영하는 것이다.

손학규는 한국군의 초석이 되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들, 일본제국주의의 관료출신으로 대한민국 정부에서 출세했던 이들과 비교할만하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렇게 일제가 남긴 제도와 인적자원이 한국의 경제개발을 이끌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에도 나름의 진실은 있다. 다만 이런 주장에는 펄쩍 뛰던 이들이 사실상 동일한 인물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평가를 하는데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런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순수하게 진보진영 내에서 성장한 인물이 대권후보가 되고 유권자들의 믿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진보진영 내에 과연 그런 인물이 존재하는가?

지난 민주당 정권 10년이 범한 가장 큰 잘못은 바로 강남, 분당 사람들에게 누가 되도 손해 볼 것 없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사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공세는 보수진영에서 할 소리가 아니라 좌파정당이 할 얘기다. 과연 민주당 정권 기간이 한국 상류층들에게 불행한 시기였던가 말이다. IMF시절 강남 부유층들이 표정관리를 하느라 애먹었다는 얘기나, 노무현 정권 시절 부동산 폭등에 대한 향수를 아직 간직하고 있다는 얘기는 민주당 정권이 기층민중 다수에게 잃어버린 10년이었음을 의미한다.

손학규의 성공이 두려운 것은 이 사회에서 최소한의 선택권마저도 사라지게 했다는 점이다. 과거 한국 보수층에게는 김대중에 대한 공포나 노무현에 대한 혐오가 있었다. 그것이 과도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은 문제겠지만 진보와 보수가 일정한 단층선을 형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더 큰 문제는 아예 그런 경계조차도 사라진 것이다. 선거란 최소한의 선택권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손학새와 수첩공주가 맞붙는 선거는 그 선택권마저 앗아가고 있다.

물론 정권의 교체에 따라 하루아침에 팔자가 급변하는 인물들도 있다. 정권교체에 목숨을 거는 것은 바로 이들이다. 그러나 그런 이들을 위해 왜 다수의 사람들이 헌신해야 하는가? 왜 가난한 자들이 부자정당에 투표하느냐는 소리도 그만하기 바란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모두 부자들을 위한 정당인데, 왜 한쪽을 찍을 때만 그런 소리를 하는가? 한남동 부자만 부자고, 강남, 분당부자는 부자가 아니란 말인가? 벌써부터 내년 선거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를 아프게 하는 정치인들의 재주가 놀랍다. 정권교체에 콩고물이라도 기대할 자들은 비판적 지지론을 우려먹으려 들겠지만,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권할 권리마저 박탈하려 들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한국 진보세력은 자신들이 때리는 시어미보다 더 혐오스러운 말리는 시누이처럼 비춰지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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