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싸잇의 정치 섹션 코너 ‘정치셀럽’은 정치권에서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과의 인터뷰’를 다룹니다. 인터뷰 대상은 전현직 국회의원이나 정당인 등에 국한하지 않고, 정치 분야에서 대중에 영향력 있는 유튜버, 법조인, 언론인, 학자, 기타 일반인 등의 셀럽을 포함합니다. 이들과 현 시국, 정치 철학, 목표, 개인사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갈등과 화만 돋우는 정치’가 아닌 ‘흥미롭고 배울 게 많은 정치’를 조명하고자 합니다. |
인싸잇=백소영 기자 ㅣ 뜨거운 취재 열정을 가슴에 안고 27년 동안 현장을 누빈 기자가 있다. 전쟁터와 재난 현장을 넘나들며 민완기자로 활약했던 인물, 바로 이영풍 전 KBS 기자다. 현재 그는 유튜브 채널 <이영풍TV>를 운영하며 정치 유튜버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대한민국자유유튜브총연합회(대자유총)를 설립해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표현의 자유 수호와 뉴미디어 창작 언론의 권익 보호를 위한 활동에도 나섰다.
1995년 KBS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특파원과 해운·항만 전문 기자로 활동하며 여전히 언론계에서 회자될 정도의 특종을 만들어 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탈레반의 박격포가 쏟아지는 아프가니스탄 최전선에서 카메라 앞에 마이크를 들고 현장을 누빈 사람이 바로 이영풍 기자였다. 당시 아프간 내부에 진입한 국내 방송사는 KBS가 유일했고, 당연히 현장에서 포착한 잠깐의 장면조차 곧 특종이 됐다. 폭음과 먼지 속에서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곳이 기자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영풍 기자는 KBS 개국 이래 처음으로 지방총국에서 서울 본사로 발령받은 상징적 인물이 됐다. 이로부터 20여 년이 흘러, 그는 또 다른 전선에 섰다. 이번에는 해외 전장이 아닌, 공영방송 내부였다. 공정방송을 요구하며 그가 외친 한 문장, “KBS가 민노총 해방구입니까!!”라는 유튜브 쇼츠 영상이 약 46만 회 조회수를 기록하며 빠르게 확산됐다. 각 지역에서 지지자들이 농성장을 찾아 그와 함께 했고, 공영방송 정상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메시지가 담긴 500여 개의 화환이 전국에서 모여 KBS 본관과 신관을 둘러쌌다. 그는 현장에서 ‘풍기자님’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2023년 뜨거운 여름, KBS 로비와 아스팔트 위에서 이어진 농성은 45일 만에 해임 통보로 마무리됐다.
이후 KBS 사장 공모에 도전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중앙노동위원회는 화해를 권고했으나,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경제학도에서 출발해 종군기자, 공영방송 간부와 평기자를 거쳐 해직 언론인이 됐고, 지금은 뉴미디어 시대의 자유우파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스스로 표현한 대로 “따뜻한 온실에서 거친 광야로” 나온 그는 현재 대자유총 회장으로서 언론의 공정성과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인싸잇>은 이영풍 전 기자와 함께 KBS에 몸 담았던 27년의 기억, 공정방송 투쟁의 전말, 해직 이후의 삶 그리고 대한민국 언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깊이 이야기를 나눴다.
- 경제학도 출신으로 기자의 길을 선택하셨는데, 언론을 택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
“저는 원래 은행원이 되려고 했다. 지금 2030 청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당시에는 취업이 매우 잘 됐고 추천서를 10개씩 들고 있었다. 경제학과 출신들은 보통 행정고시를 보거나 은행으로 갔다. 한국은행이나 수출입은행 같은 안정된 직장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그때 조선일보와 SK, 즉 당시 선경에서 대학생 논문 현상 공모를 진행했고 거기에 도전했다. 1등 상금이 500만 원이었다. 그 시절 국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40만 원 정도였는데 500만 원이면 엄청난 돈이었다. ‘저거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도했지만 떨어졌다. 그런데 그 논문을 쓰고 떨어진 뒤 느낀 게 있었다. 정보화 시대가 오고 있으니 정보를 다루는 회사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정보를 다루는 회사가 어디인가를 고민했고 답은 언론사였다. 조선일보와 선경 논문 현상 공모에서 떨어진 경험, 그리고 학교 도서관 앞에 붙어 있던 포스터 한 장이 진로를 갈랐다.”
-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하셨다.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현장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종군기자로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과 그 순간에도 취재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제가 입사했을 당시에는 기자들이 사무실에 머물며 앵커 역할을 맡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사무실에 앉게 되면 현장을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기자에게 현장은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저는 현장을 좋아하는 기자였다. 우리가 취재하는 현장은 화재나 살인 사건처럼 처절한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한의 현장은 전쟁터였다. 그래서 종군 특파원으로 현장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한 이후 전쟁을 취재하는 특별팀이 꾸려질 것이라 예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종군 특파원을 선발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자원했고 선발돼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전쟁터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현금 문제였다. 카드 결제가 불가능했고 현금만 사용할 수 있었다. 취재팀은 수천만 원의 현금을 휴대하고 있었다. 현금을 지니고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강도의 위협이 상존했다. 최전방에서는 포탄이 날아들었다. 극도의 위험 속에서 취재를 이어가야 했다. 목숨을 내놓고 현장에 임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저는 최전선까지 진입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 타슈켈라 전선까지 이동했고 탈레반이 박격포를 발사하는 지점 인근까지 접근해 취재를 진행했다. 그곳에서의 기록은 대부분 특종이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내부에 들어가 있던 방송사 기자는 KBS가 유일했다. 현장에서 목격한 사실을 기록하는 것 자체가 특종이 되는 상황이었다.”
-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족들의 반대도 컸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가족들에 알리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그 사실이 알려진 뒤 크게 혼이 났다. 처음에는 파키스탄으로 간다고 말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당시 아이들이 각각 1살과 3살이었다. 가장으로서 무책임하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 저는 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판단을 했다.”
- 2016년 신사업기획부장을 맡았다가 2018년 평기자로 내려갔다. 간부에서 평기자로 보직이 변경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박근혜 정부 시절 임명됐던 간부들이 대거 보직 해임됐다. 저 역시 그 대상 중 한명이었다. 당시 저는 박근혜 정부 국정 과제 가운데 하나였던 창조경제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핵심 사업인 ‘VR 체험존’을 여의도 KBS에 만든 책임자였다. 해당 사업은 회사 자체 예산이 아니라 국책 사업으로 선정돼 추진된 건이었다. 국책 사업으로 약 30억 원이 넘는 규모였고 어렵게 완성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사장이 교체되자마자 바로 보직에서 해임됐고 이후 평직원으로 근무하게 됐다.”
- 이후 공영노조 부위원장과 정책공정방송실장을 맡아 불공정·편파 방송 저지 투쟁에 나섰다. ‘민노총 KBS’라는 표현을 공개적으로 사용했는데, 실제 내부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공유되고 있었나. 당시 KBS 내부 상황을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그들은 ‘민노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 대해 부담스러워 한다. 꼭 ‘민주노총’이라는 명칭을 사용해 달라고 요구하는데 ‘민주’가 없는 노동조합이다. 그런데 KBS는 대한민국 시청자에 대한 공적 책무를 지닌 공영방송이자 공공기관이다. 이러한 기관에 민노총이 들어가서 노동조합을 결성해 민노총 사상을 주입하고 프로그램 제작과 편성에 반영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하기 위해 ‘민노총 KBS’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다. 당시 KBS 내부 상황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민노총 언론노조 세력의 난동 그리고 편파 방송의 진원지로 급락했던 시기라고 정의내리겠다.”
- 2023년 1인 농성에 나서며 “KBS가 민노총 해방구입니까”라고 외쳤다. 이러한 투쟁과 발언을 결심하게 된 판단이나 확신은 어떤 계기에서 비롯된 것인가.
“보도본부 간부가 저를 사무실로 불러 유튜브 출연 시 말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그 자체가 언론 탄압이라고 봤다. 민노총 언론노조는 언론 자유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지만, 우파 정권이 권력을 쥐었을 때는 삼선 슬리퍼를 신고 출근하는 대통령 뒤에서 대놓고 고함을 지르는 게 MBC 기자 아니었는가. 그런데 좌파 정권이 되면 문제 제기를 덜 하는 것 같고, 때로는 거기에 장단을 맞추는 모습도 보였는데 KBS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KBS는 좌파든 우파든 정권을 비판하고 견제하고 감시해야 하는 저널리즘 기능을 가진 언론사이기 때문이다. 민노총이 KBS를 장악한 구조가 된다면 대한민국이 불행해진다고 봤다. 이런 확신이 속에서 그 함성을 외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 당시 유튜브를 통해 해당 쇼츠 영상이 확산되며 큰 화제를 모았다. 대중에게 왜 그토록 강하게 전달됐다고 보는가.
“저는 이 영상이 그렇게까지 확산된 지도 사실 몰랐다. 사람들이 영상들을 보고 농성장까지 방문해주시는데 이게 웬일이지 싶었다. 첫 번째는 유튜브의 힘을 그때 알게 됐고, 뉴미디어인 유튜브의 영향력을 깨닫게 됐다. 또 하나는 심정적으로 그 사람들이, 영상을 본 사람들이 KBS라는 직장은 굉장히 안락한 직장이라고 생각하는데 고용 안정이 보장되고 연봉도 많이 받는다. 그런데 저 정신 나간 젊은이가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지, 기존에 그냥 편안하게 조용히 살면 될 텐데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이 더 주목하지 않았나 싶다. KBS는 안락한 직장이자 소중한 국가 기관이다. 여기에서 신분 보장과 좋은 연봉을 받는 만큼 그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도 져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소리를 지른 것이다.”
- 유튜브를 통해 상황이 알려지면서 KBS에 ‘근조 화환 보내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는데, 당시 체감은 어땠나.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충격 그 자체. 왜냐하면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유튜브가 없었으면 저는 바보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유튜브 영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화환 보내기 운동을 주도했고, KBS 외곽 전체를 사각형으로 쫙 둘러싸듯 근조화환이 들어왔다. 제 기억으로는 한 500여 개 정도 왔다. 화환 하나가 보통 5만 원 정도라고 보고 500개면 상당한 금액이다. KBS 수신료가 한 달 2500원인데 화환 하나가 수신료의 약 20배다. 1년 치 수신료가 3만 원인데 그것보다 더 많은 돈을 내면서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영풍이라는 사람을 응원해 준 것이다. KBS에서 그런 일은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충격 그 자체였다. 국민적인 분노로 확산되니까 민노총 세력도 힘도 못쓰고 손도 못 대더라. KBS 주인은 국민이지 민노총이 아니기 때문이다.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매우 강력한 효과였다.”
- 텐트를 치고 장기간 농성을 이어가셨다. 물리적 고통보다 더 힘들었던 순간과 그 시간을 버티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고립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스스로 바보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장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농성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응원을 보내주셨고, 그분들과 함께 순간순간을 계속 갈 수 있었다.”
- 농성 45일 차에 해임 통보를 받고 최종 해고 처리됐다.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제가 혼자였다면 나가서 어떻게든 먹고살겠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송을 하면 몇 년씩 걸리지만 복직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버틸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가족이 있으니까 상황이 달랐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이건 정말 할 짓이 아니구나 싶었다. 나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지만 가족들이 받는 충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게 가장 가슴 아팠다.”
- KBS 재직 시절과 이후 유튜브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삶은 어떻게 달라졌나.
“따뜻한 온실에서 거친 광야로 나온 것이다. 다만 KBS에서 27년 동안 방송을 해왔기 때문에 유튜브 활동이 어렵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구독자도 점차 늘어갔다. 특히 좋았던 점은 표현의 자유였다. KBS에서 방송할 때는 보도형 표준어를 사용해야 했지만, 영남 출신인 저에게는 사투리가 있다. 그런데 유튜브에서는 이러한 사투리를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아주 즐겁게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 부산 서구동구 지역구에서 총선에 도전했는데 최종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다. 실제 정치 현장에서 느낀 괴리, 이른바 ‘아스팔트 정치와 제도권 정치의 차이’는 무엇이었나.
“유권자들에게 직접 전화를 돌려보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정말 후보가 맞느냐’는 것이었다. 후보가 직접 전화를 한다는 사실에 놀라며 ‘후보가 왜 나에게 전화를 하느냐’는 반응도 있었다. 그래서 ‘후보가 맞고, 이 번호는 개인 번호이니 언제든지 민원 사항이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안내를 했다. 그러자 많은 유권자들이 후보가 직접 전화를 하는 것은 처음 본다며 놀라더라.
결국 이게 무슨 얘기인가 하면, 제도권 정치인들이 자신의 지역구 주민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스팔트 현장에 나와 있으면 그런 부분을 직접 체감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 때도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국민들이 무엇을 느끼고 분노하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제도권 정치로 들어가게 되면 이러한 현장을 벗어나게 된다. 쉽게 말해 현실과 동떨어진, 이른바 ‘구름 위에서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점이 제도권 정치가 지닌 가장 위험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우파를 화나게 하려면 거짓말을 하고 좌파를 화나게 하려면 사실을 말해주어라’라는 루스벨트의 말을 자주 인용하시는데, 본인의 언론 철학과 어떻게 맞닿아 있나.
“그러한 말이 있다. 방송사에서 제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 중 하나가 ‘PD는 구성을 하고 기자는 팩트를 쫓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음모론이나 논리보다도 우선하는 것은 팩트이다. 팩트는 가장 기본적인 진실이다. 예를 들어 1 더하기 1은 2라는 것이 팩트이며, 1 더하기 1이 5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제가 방송에서 자주 인용하는 말이 ‘좌파를 화나게 하려면 사실, 즉 팩트를 말해주라’는 것이다. 이 말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인류가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우파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고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좌파는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 공산주의의 태동 과정에서 보듯 선전과 선동을 주요한 투쟁 수단으로 삼아 왔다. 선전과 선동이 반복되면 사실이 왜곡되고, 이른바 솔방울로 수류탄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게 아니겠는가. 이러한 것들이 인류의 지성을 파괴하고 인류를 비이성적인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팩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될 수록 선진국된다. 이러한 ‘팩트 존중’의 철학이 바로 저의 언론관이자 소신이다.”
- 방송에서 꾸준히 시청자들에게 ‘공부’를 강조해 온 점이 인상적인데, 국민들이 왜 반드시 ‘정치 공부’를 해야 한다고 보는가.
“일단 진실을 바로 알 수 있는 뉴스를 많이 보면서 공부를 해야 된다. 지금 사실은 대한민국처럼 가짜 뉴스가 잘 먹혀 들어가는 나라가 별로 없을 것이다. 가령 과거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의 대선 승리를 막았던 김대업의 가짜 뉴스, 그 다음에 2008년도 이명박 정권 초기에 벌어졌던 광우병 가짜 뉴스, 또 오세훈 서울시장 생태탕 가짜 뉴스, 윤석열 전 대통령 관련 가짜 뉴스 등 여러 사례가 있다.
이러한 가짜 뉴스를 타파하려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이겨낼 수가 없다. 우리가 소위 말해서 팔랑귀라고 하지 않는가. 귀가 예민한 사람들은 굉장히 자극적인 뉴스나 현란한 뉴스를 들으면 쉽게 흔들려버린다. 대한민국의 지성 수준이 그 정도에 머물러 있으면 가짜 뉴스, 즉 사기꾼들이 해먹기 딱 좋은 사회가 된다는 말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항상 공부하는 자세로 사실, 즉 팩트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는 공부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 현재 대자유총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는데, 개인 방송을 넘어 조직을 만든 이유와 앞으로의 운영 계획은 무엇인가.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이런 말 있지 않은가. 기본적으로 유튜브는 1인 미디어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다. 그래서 아주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자유롭게 이야기하다 보면 전체적인 맥락을 벗어날 때가 있다. 그래서 협회라는 조직을 통해 공론의 장에 대한 공통적인 흐름, 큰 흐름을 만들어내려고 한 것이다. 지금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제일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는 게 1인 미디어 사업자들 아닌가. 그런데 협회라는 단체가 없으면 법률적인 소송 같은 것이 걸려올 때 굉장히 대응하기 어렵다. 그러한 부분을 동시에 막아내기 위해서, 즉 법률적인 지원과 공론의 장을 만들어가는 보편적인 흐름을 함께 만들어가자는 필요성 때문에 대자유총을 만들게 됐다.
앞으로는 대자유총 채널을 하나 만들 계획이다. 유튜브 계정을 만들어서 대자유총 소속 1인 미디어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생산한 좋은 콘텐츠를 사후적으로 선별해 편성하고, 일정한 시간대를 구성해 지속적으로 방송할 예정이다. 제가 방송사에 있었기 때문에 방송사에서 운영하던 원리를 그대로 가져오면 된다. 지금 유튜브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 가능성이 있는 큰 시장이다. 그래서 앞으로 대자유총 방송국이 하나가 만들어진다고 보면 된다.”
- 기자 시절과 현재를 비교했을 때 대한민국 언론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과거 기자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파편화된 팩트를 찾아다니는 사냥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 기자들은 월급쟁이가 됐다. 이게 지금 대한민국 언론의 비극이다. 언론은 월급쟁이가 아니라 사냥꾼 같은 자세로 숨겨진 진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신문, 종편, 지상파에서는 그게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 그 역할이 유튜브로 옮겨온 것이다. 그래서 유튜브 시장은 앞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도 일정 부분 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저널리즘 기능까지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앞으로의 대자유총의 역할이 중요하다.”
- 선배 기자로서 후배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
“언론인으로서의 양심을 가지고 살아라, 그 말을 하고 싶다. 언론인은 좌파도 우파도 어느 편도 아니다. 국민 편이다. 국민을 향한 양심을 가지고 진실과 사실을 알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언론인의 본분이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 언론인, 교수, 정치평론가로서 다양한 역할을 해오셨는데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거짓말하지 말고, 사실을 말하라. 그렇게 하면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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