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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평정하고 출발선에 선 정동영을 분석한다

[임두만의 대선분석 2] 여권신당 정동영 후보의 강점과 약점


지난 15일 치열한 경선전 끝에 신당은 정동영 후보를 당의 대통령 후보로 정식 지명했다. 그러나 정치 분석가들은 정 후보가 사분오열된 여권을 하나로 묶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그동안의 신당 경선이 지난 8월 치러진 한나라당의 경선과 비교해도 매우 험악한 파열음을 내며 경선판이 깨지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로 계파 간 심각한 분열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 후보는 후보로 지명되지마자 스스로 몸을 낮추며 경쟁자들을 예우하고 그동안 각을 세웠던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사과하는 등 여권통합작업에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 결과 경쟁자였던 손학규 이해찬 두 후보로부터 선대위원장직을 승낙 받으며 적극적인 협조를 끌어냈고 신당의 잠재적 대주주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으로부터도 확실한 지지를 약속 받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 정 후보가 진짜 정치인이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즉 경선에서 승리한 대통령 후보임에도 약속시간이 30분 이상 늦은 패자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만나면서 몸을 낮추고, 손 전 지사의 “차가 막혀서 늦었다”는 변명을 웃으며 받아넘기면서 손 전 지사가 스스로 멋쩍게 만들므로 그의 지지를 이끌어 낸 것만 봐도 그의 정치적 기질을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패자 이해찬 전 총리와의 회동장소를 대학로의 한 중국음식점으로 잡은 것도 예사롭지 않다. 이는 둘 사이가 서울대학교 입학 동기인데다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민청학련 사건에 함께 연루되어 고초를 당하면서 일궈 온 우정으로 돌아가려는 정 후보의 치밀한 안배였던 것으로 밝혀진 것을 보면 더 그렇다. 특히 이해찬 전 총리가 후보경선 텔레비전 공개토론에서 둘 사이의 관계가 절친하다는 것을 밝히려는 정 후보를 향해 “거 친구 친구 좀 하지 마세요”라고 면박을 줬던 일을 생각하면 정 후보의 대인관계 기질을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즉 ‘경쟁자 이전에 30년 친구로 돌아가서 날 좀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기에는 두 사람의 회동장소가 그만큼 합당한 자리도 드물었을 것이라는데서 정 후보로서는 최선의 안배를 한 것이다. 그래선지 두 사람은 회동 첫머리부터 지난 대학시절을 떠올리며 환담을 나눴고 회동결과 세간의 예측을 빗나갈 정도로 매우 화끈한 지원을 이해찬 전 총리로부터 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이 같은 전개는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의 회동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두 사람의 회동에서 자신에게 깍듯이 선배님으로 호칭하며 예우하는 정 후보를 김 전 의장이 매우 흡족해 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회동은 분위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이제 대선까지 딱 두 달 남았는데 저보다 두 배 더 뛰어주십시오"라고 협조를 구한 정 후보에게 "그동안 놀았으니 뛰겠다"고 김 전 의장이 답한 것으로 전폭적 지지를 끌어내는데 성공할만큼 정 후보의 경선 후 처세가 돋보인다.

발빠른 정동영 여권을 평정하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친 정 후보는 22일 이들 3인과 오충일 대표까지 모인 5자회동에서 후보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키로 한 합의를 끌어냈다. 이날 당산동 당사에서 '5인 회동'을 한 이들은 "당의 통합, 화합을 기초로 대선에서 기필코 승리하여 제 3기 민주 정부 수립할 것을 다짐한다"며 "국민경선을 통해 선출된 정 후보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대선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정 후보는 이날 '5인 회동'에서도 참석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그 간의 노고를 치하,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김 전 의장에게 "김 전 의장의 살신성인, 헌신적 결단이 있기에 지금의 대통합민주신당이 가능했다"면서 "선배님의 못 다한 뜻을 이어 받겠다"고 말했고, 이에 김 전 의장은 악수를 청하며 "고맙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정 후보는 특히 막판까지 치열한 경합을 펼쳤던 경선 후보들의 '아름다운 승복'에 대한 감사에서 "당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제가 대선 후보가 돼서가 아니다. 다른 후보들이 대승적인 차원에서, 훌륭하게 경선을 마무리 해줬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감동을 줬다"며 "창당 이래 최고의 감동적인 순간이었다"고 추켜세웠다고 신당 대선 기획단의 최재천 대변인은 밝혔다.

최재천 대선기획단 대변인은 "정 후보가 특히 손 전 지사를 향해 '정치 대선배로서 대승적인 차원에서 후배를 위해 승복해 주신 것에 크게 경의를 표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한 뒤 "조속한 시일에 '17대 중앙선거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킬 것'이라며 "위원회 구성에 대해선 정 후보에게 전적으로 일임하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이는 곧 지난 경선 당시만 해도 경선이 끝나더라도 신당이 온존하게 대선진용을 꾸릴 수 있을 것인가에 의문부호를 던졌던 정치 평론가들의 예측을 보기 좋게 뒤엎은 신속한 행보인 것이다.그리고 경선이 끝난 지 2개월이 넘도록 당의 화학적 화합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 비해 정 후보가 매우 뛰어난 정치력을 갖고 있음을 입증한 것이기도 하다.

또 경선이 끝난 지 두 달이 넘었음에도 경쟁자였던 박근혜 전 대표 및 그 측근 지지그룹과 지금도 경쟁을 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는 한나라당 사정에 비해 신당은 구 열린우리당, 민주당 일부, 손학규 그룹, 오충일 대표를 비롯한 재야그룹 등 다양한 성분의 인자들이 모여 급조한 정당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매우 빠른 속도로 화학적 결합을 이뤄내고 있다. 이것이 정동영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이다.

정치인 정동영의 탄생과 성장

정동영은 사실 현재 각 정당에서 대선후보로 지명을 받은 후보들 중 정치경력이 가장 일천하다. 물론 지난 1997년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으로 변신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에 비하면 정 후보는 1996년 15대 총선에 출마, 당선되었으므로 정치경력이 더 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권영길 후보는 그 이전부터 이미 민주노총 위원장으로서 정치일선에서 활동했던 반 정치인이었으므로 사실상 현 후보 중 문국현 유한킴벌리 전 사장을 빼고는 가장 짧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후보가 이처럼 급격한 정치적 성장을 한 것은 바로 지금과 같은 정 후보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 놀라운 순발력을 보인 정치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동영 후보가 대중 정치인으로 급부상 한 것은 방송기자로 출발, 뉴스앵커로 성공한 이미지를 가지고 김대중에게 발탁되어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을 맡으면서 부터다. 그는 1996년 4월 치러진 제 15대 총선에서 전주 덕진구에서 출마, 전국 최다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정치권의 히어로로 등장했다. 이후 그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로부터 총애를 받으며 대변인에 발탁 되었다.

이렇게 대변인이 된 그는 김대중 총재가 정계 은퇴 후 복귀하면서 통합민주당을 깨고 국민회의를 창당한데 따른 세간의 비난을 촌철살인의 논평으로 막아내는 등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전국최다득표율을 연거푸 차지하면서 새천년민주당의 소장파 리더가 되었다. 또 이를 기화로 최고위원에 당선되는 기염까지 토한다. 정치경력 4~5년 만에 일약 여당의 중진 반열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오늘의 정동영이 탄생된 것은 아니다. 그는 결단할 순간에 결단하고 치고받을 순간에 치고받을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 이는 그를 정치적으로 키웠다는 평가를 들으며 그의 정치적 은인이라고도 회자되는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과 청와대에서 맞짱을 뜬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소장파 리더에서 승부사가 된 정동영의 1차 승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비리가 온 나라를 강타하며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정부여당이 지리멸렬하던 2002년, 그는 청와대에서 있었던 대통령과 민주당 당직자들의 회동에서 대통령을 면전에 두고 권노갑의 2선 퇴진을 주장하면서 민주당의 정풍운동에 불을 댕겼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당의 대주주 동교동계와 정면 승부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정동영의 첫 번째 승부수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의 또 다른 소장파 히어로 김민석 전 의원은 정동영의 행태를 기회주의라 비판하며 권노갑 등 동교동계를 옹호했다. 이 때문에 그는 동교동계의 단물을 빨아들이며 정치적 성장을 한 뒤, 동교동이 힘을 잃어가니, 뒤에서 칼을 꽂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여론은 정동영의 개혁성에 높은 점수를 줌으로서 정동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동영이 승부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승부사 정동영의 2차 승리 국민경선 지킴이

정동영의 두 번째 승부수는 새천년민주당 국민경선에서 끝까지 남아 경선지킴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이인제 대세론이었다. 이는 동교동계의 대선 전략이기도 했지만 또 동교동계와 김대중 당시 대통령으로서는 이인제 의원에게 정치적으로 마음의 빚이 있었다.

김대중은 이 의원이 1997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무려 500만표 가까운 득표를 한 대가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따라서 동교동계와 김대중은 이인제에게 마음의 빚을 갚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더구나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필적할만한 후보도 사실 이인제뿐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 측근비리가 온 나라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면서 민주당은 회생이 어려워 보였다. 이에 당의 정풍운동에 성공한 정동영을 필두로 천정배, 신기남 등이 당의 대선후보 선출을 국민경선을 통해서 뽑는 제도를 주장, 관철시키며 우리나라 정당 역사상 최초로 제한적 오픈프라이머리 제도가 도입되었다.

정동영은 이 제도를 도입한 당사자로서 대선후보 경선에 소장파의 리더 자격으로 출진했다. 그러나 당선이 유력시 되던 이인제 후보가 다크호스 노무현 후보에게 광주경선에서 패하며 전국에 노풍이 불었다. 따라서 애초 후보경선에 나섰던 한화갑, 유종근, 김중권, 김근태 후보가 중도 탈락하고 이인제 후보까지 대전충남 경선을 앞두고 후보를 사퇴함으로서 민주당의 경선은 막판에 맥이 빠졌다.

그러나 정동영은 달랐다. 거의 꼴찌 수준의 득표를 하면서도 끝까지 경선을 완주했다. 이 때문인지 경선 마지막 주에 치러진 경기도 경선에서 후보당선이 확정된 노무현 후보를 누르고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결국 그는 노무현 후보 공동 선대본부장을 맡았으며 희망돼지 운동을 벌여 돼지아빠로 불리는 정치적 성공을 한다. 또 노무현 당선 1등 공신으로서 다보스포럼 한국 정치인 대표로 연설을 하는 등, 그야말로 정치적 출세가도를 걷는다. 정동영의 두 번째 승부수도 성공한 것이다.

정동영의 정치도박 민주당 분당과 노무현의 정치도박 대통령 탄핵 자초

이어서 다시 정동영의 세 번째 승부수가 나온다. 그것이 바로 지난 2003년 민주당 분당에 앞장서며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것이다.

2002년 대선가도에서 민주당은 노무현 후보를 선택했으나 후보 자신의 몇 차례에 걸친 실수로 인해 지지율이 급락, 정권재창출에 빨간불이 켜졌다. 이에 당시 월드컵 바람을 타고 높은 지지를 얻고 있던 정몽준으로의 후보교체론이 나오며 급기야 후단협이 생기는 등 당은 화학적 결합을 하지 못했다.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과 그 측근 지지그룹은 겉으로는 민주당의 환골탈퇴를 주장, 당의 쇄신작업에 나섰으나 이는 내심 민주당을 노무현 당으로 만들 수 없음으로 신당을 창당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이를 앞장서서 이끈 사람이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이다.

따라서 이들 세 사람을 일컬어 천신정이라고 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민주당을 깨고 새로 창당한 열린우리당의 초대 의장으로 정동영이 당선된다. 이는 천신정으로 이름이 붙여진 것만 봐도 그가 어떤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즉 천정배가 이론을 제공하고 신기남이 돌쇠노릇을 했는데 그 이삭은 정동영이 얻은 것이다. 그리고 정동영은 열린우리당 초대 당의장으로 총선 승리라는 전리품을 챙긴다. 하지만 이는 총선을 앞두고 좌충우돌 정치권을 뒤흔든 노무현 대통령 때문이다.

2003년 말, 명색이 대통령까지 가세하면서 새로운 여당으로 창당된 열린우리당은 창당 당시 원내 의석 40여석, 국민 지지도 10% 안팍이었다.

더구나 대북송금 특검 수용으로 대통령의 인기도는 형편없었고 이라크 파병 찬성으로 새로 창당된 열린우리당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의 현상을 타개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당선 1년여 만에 치러질 총선에서 참패. 식물대통령으로 전락할 위기였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건 도박을 감행했으며 이 도박이 대 성공을 거둔다. 그것이 바로 대통령 탄핵사태다.

2004년 2월, 총선을 두 달 여 앞둔 국회 본회의장,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는 국회의장의 방망이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정동영의 울부짖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데 이 울부짖음은 총선직전까지 우리나라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전국에 리바이벌 방영되었다. 촛불시위대가 광화문을 덮었고 총선은 해보나마나였다. 그리고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압승, 정동영의 세 번째 승부수가 성공하는 찰나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승부사 정동영의 모습을 본다.

즉 탄핵 바람이 전국을 휩쓸고 다니며 열린우리당 외엔 어떤 정당도 선거운동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지경에 몰려있을 때 정동영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패착을 하는 것이다. 대구에서의 노인폄하발언이 그것이다. 정동영은 이 발언 때문에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당했는데 이때 정동영은 당선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후보를 사퇴하면서 당의장 직까지 버리는 승부수를 던진다.

이로써 열린우리당은 이 파문을 수습하고 총선에서 승리하며 이는 정동영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후일 정치평론가들은 말했다.

또 다른 승부 두 번, 노무현 정부 참여와 퇴각 및 열린우리당과 함께 죽기

그리고 정동영은 총선 이후 통일부장관을 맡으며, 화려하게 대선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것이 그의 네 번째 승부수다. 즉 통일부 장관 재직 기간 동안 북한을 직접 방문 김정일과 담판을 지은 뒤 개성공단 사업을 착수, 완성시키고 퇴임한 것으로 그의 승부수는 성공한다.

2006년 4월, 그는 다시 또 그의 정치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승부수를 던진다. 2004년 4. 15 총선 이후 계속 지리멸렬한 열린우리당의 재건 선장을 맡은 것이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누가 당의장이 되어도 그해 6월 치러질 지방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그만큼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인기는 형편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주위의 권유도 물리치고 이 난파선 열린우리당 호의 선장이 되어 키를 잡았다.

그러나 천하의 정동영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열린우리당은 지방선거에서 말 그대로 참패했다. 당연히 그 책임은 당의장 정동영이 져야했다. 그는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당의장 직에서 물러났다. 이를 바탕으로 정동영은 노대통령 세력과 단절을 선언한다. 참여정부에 대한 날선 비판을 퍼부으며, 결국 자신이 당의장으로 있었던 열린우리당도 탈당한다. 그리고 이는 그의 여섯 번째 승부수였다.

화려한 변신, 열린우리당 탈당과 여권신당 대선후보 쟁취

이후 자신이 만든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정동영은 자신이 온몸으로 지켜낸 노대통령과 단절하며, 민주당 분당에 대해 사과했다. 민주개혁세력의 위기는 모두 민주당 분당에서 기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 같은 민주당 분당에 대한 사과를 바탕으로 호남에서 지지세를 확보하며 호남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것이 이번 경선에서 광주전남지역 1위를 한 원동력이다. 그리고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적자임을 자인한 이해찬이 광주전남지역 꼴찌를 한 것으로 증명된다.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정동영은 결국 김근태가 예비후보 자격까지 내던지며 모은 세력을 바탕으로 창당된 신당의 대주주가 된다. 그리고 신당은 김대중의 지원까지 받으며 민주당 일부를 흡수, 원내 141석이라는 거대 정당으로 거듭났다. 그런데 승부사 정동영은 끝내 이 당의 명실상부한 대통령 후보로 지명도 받아냈다. 정동영의 여섯 번째 승부수도 성공한 것이다.

대통령 후보 정동영이 가진 강점...남북화해세력의 대표

이런 정동영의 성공은 또 1차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확실한 후계자가 되는데도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면서 균열되기 시작한 민주당이 결국 분당된 것을 매우 아쉽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동안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어느 쪽에도 힘을 실어준 일이 없다.

열린우리당 사람들을 만나면 열린우리당 편인 것 같다가 민주당 사람들을 만나면 또 민주당 편으로 보였다. 다만 지난 보궐선거에서 자신의 차남인 김홍업씨를 민주당의 공천으로 고향인 신안에 출마사켰던 것으로 봐서 내심은 민주당 편이었던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관측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 오자 김 전 대통령은 스스로 팔을 걷어부치고 통합을 종용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전에 민주당 공천으로 당선된 아들의 민주당 탈당을 막지 않았다. 결국 김홍업 의원은 신당에 가담했으며 이로써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중이 통합을 반대한 민주당에서 떠나 신당으로 힘을 실어준 것으로 세간에서는 판단했다. 정동영은 이 정당의 경선에서 후보가 된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아직 현존하는 정치인 중 가장 확실한 지지기반을 가진 전직 대통령으로써 그의 후계자로 추인받는다는 것은 곧 남북화해세력의 후계자로 인정받는 것이나 진배없다. 특히 야당인 한나라당이 냉전 수구이념을 버리지 않고 있는 한 민주평화세력의 대표라는 상표 하나로 확실한 한나라당 대항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무기다. 그리고 정동영은 스스로도 개성공단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자신의 가장 확실한 상표로 내세우고 있으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전폭적 지지는 금상첨화일 것이다.

또 다른 강점...광범위한 대선전문가 그룹 확보

정동영 후보가 신당의 후보가 됨으로 정 후보는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에서 이겨본 경험이 있는 광범위한 대선 전문가 그룹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매우 대단한 강점이다.

물론 한나라당도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들어 낸 경험이 있기는 하나 사실상 이들이 당선된 두 번의 선거는 야권 분열에 의한 어부지리와 3당 합당으로 얻은 영남+충청지역의 세몰이 선거였으므로 진정한 진검승부는 김대중-이회창 선거와 노무현-이회창 선거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의 여권은 이 두 번의 진검승부에서 모두 승리한 막강한 선거 전문가 그룹이 포진하고 있다.

이 전문가 그룹은 정책공약, 조직, 선거슬로건, 여론몰이, 바람몰이 등에 매우 잘 훈련된 그룹이다. 따라서 이들은 오프라인 여론과 온라인 여론까지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는 미디어 선거까지도 현재의 한나라당 그룹보다 한 수 위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벌써부터 그 같은 조짐은 나타나고 있다. 신문이나 인터넷에서부터 방송까지 확실하게 이명박 대 정동영 싸움으로 몰아가는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이제 정동영 후보는 이 같은 강점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승부수를 던지며 대선 가도에 진입했다. 그의 세븐은 말 그대로 럭키세븐이 될 것인가? 그것은 그가 승부사이므로 그 승부수를 던질 때마다 남긴 자국을 어떻게 지우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에게 약일지 독일지 알 수 없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설정, 이에 따른 친노세력의 지원 또는 비토, 그 외 흩어진 범여권 지지층을 어떻게 묶어낼 것인지가 그의 승부가 성공할 수 있느냐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승부사 정동영의 약점, 배신자와 쇼맨이라는 닉네임

그렇다면 정동영에겐 또 어떤 약점들이 있는가?

우선 그에게는 배신자라는 닉네임이 붙어있다. 정치적 은인 권노갑을 배신하고 정치적 고향인 동교동과 민주당을 배신하고 정치적 그늘인 노무현을 배신하고 정치적 성장터인 열린우리당을 배신했다는 평가를 어떻게 넘을 것인지가 그것이다. 또 그에게는 컨텐츠는 없고 쇼맨쉽만 있다는 평가를 넘어서야 하는 것도 있다. 국회의원 2선을 지내고 부총리급 장관을 역임하고 거대여당의 당의장을 2회 역임했음에도 그는 뚜렷하게 내세울 컨텐츠가 없다. 또 대통령 탄핵안 가결 시 보여 준 울부짖음이 쇼맨쉽이었다는 평가도 그에게는 매우 아픈 부분이다.

그가 지난 2002년 주창하고 시행했던 희망돼지 운동이 겉으로는 자발적 지지자들의 소액 정치헌금 기부운동인 것으로 포장되었으나 사실은 노무현 후보 또한 이 같은 소액기부금으로 선거를 치른 것이 아니라 재벌의 거액 선거자금을 지원받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사기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따라서 그가 이 같은 세간의 평가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도 매우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거기다 그는 신당의 후보가 된 뒤, "참여정부는 실패하지 않았다. 노대통령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다. 노대통령과 각을 세우며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뒤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비판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대선기간 내내 그의 발목을 잡을 패착으로 보이기도 한다. 즉 자신이 창당한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것 까지는 변명이 가능할 것이지만 이를 다시 사과한 것은 과연 어떤 것이 본심이었느냐는 질문에 그가 할 변명이 궁색해 보이기 때문이다.

부친의 친일 논란과 두 아들의 조기유학 논란

그의 발목을 잡을 약점은 또 있다. 그의 가족문제가 그것이다. 알려진 대로 그의 아버지 故 정진철 씨는 일제 강점기에 금융조합 서기를 지냈다. 이 사실은 필자가 브레이크 뉴스 대표로 재직할 당시 심층 취재하여 특종으로 보도해서 세간에 알려졌다. 당시 필자는 정진철 씨가 근무하던 당시의 금융조합이 특히 전라북도의 넓은 평야지대에서 생산된 쌀을 수탈,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낸 일에 앞장 선 기관이었다는 것도 전라북도 사지에 기록된 내용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반면 정진철 씨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정진철 씨가 직접 그 같은 수탈에 앞장섰다는 증언은 듣지 못했다.

반대로 정동영 후보의 할아버지 대까지 천석꾼 부자였으며 이 때문에 정진철 씨는 남원고보를 나온 인텔리로서 매우 후덕했던 인품으로 주위에 덕을 쌓았기 때문에 스물여섯 살에 구림면장을 지내고 전라북도 도의원까지 지냈다는 증언들을 청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라도 선거판에서 일제시대 수탈기관에 근무했다는 것은 정 후보에게 매우 큰 약점으로 작용할 것 같다.

또 정 후보의 두 아들이 미국에 조기유학을 했다는 것도 그에게는 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가난을 이기기 위해 어머니를 도와 평화시장에서 장사를 했다는 서민 이미지를 내세우지만 그의 이들 둘이 모두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했다는데서 그의 변명이 먹히지 않을 것은 불문가지이기 때문이다.

후보 단일화...과연 이뤄질 것인가?

마지막으로 정 후보에게 남은 과제는 범여권 후보 단일화를 이루고 그 단일 후보가 되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지지도나 후보의 위치로 보면 그가 단일후보에 가장 근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단일화를 해야 할 상대들인 민주당의 이인제 후보나 가칭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은 그에게 호락호락 후보자격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대선 후 4개월 뒤에 총선이 있다는 현실적 이유도 매우 큰 작용을 하겠지만 민주당의 이인제 후보가 가진 지난 10년의 와신상담과, 대통령직을 노리고 연봉 10억의 성공한 CEO자리를 내던진 문국현 전 사장에게 보상할 보상거리가 마땅치 않다는데 있다. 거기다 특히 민주당 이인제 후보와의 단일화를 생리적으로 거부하는 친노그룹의 반발을 잠재울 마땅한 대안도 없다. 즉 이인제와 단일화가 되는 순간 플러스 알파로 작용할 표와 이인제가 싫어서 떠나므로 생길 마이너스 알파 표의 함수를 어떻게 풀어낼지가 그의 과제라는 것이다.

단일화 이후 또 다른 딜레마, 지역분열에 따른 묻지마 투표

더구나 이 같은 단일화에 성공한다면 이번 대통령 선거도 필연적으로 영호남의 대결이 될 것이고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영남의 호남후보 비토성향을 필사적으로 넘어야 하는 가장 큰 산이 남아있다. 이는 그리고 위에서 적시한 정 후보의 여러 약점 모두 보다도 더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정 후보가 대통령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 마지막 약점을 넘어설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그에게 던져진 가장 어려운 숙제다.

이상에서 살펴볼 때 정동영 후보는 여섯 번의 승부수를 던져 결국 오늘날 원내 141석의 거대 정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넘기 어려울 것 같은 여섯 가지의 약점이 있다. 그의 세븐은 그래서 매우 흥미진진하다. 과연 그가 자신의 세븐을 럭키세븐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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