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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2월 대선도 박빙 승부가 예측된다

[임두만의 대선분석 1]최근 여론 흐름을 분석


대통령 선거가 국민 직선으로 치러진 지난 1987년부터 4차례의 대통령 선거는 매번 아주 특별한 이슈를 남기며 우리 정치사에 귀중한 역사자료로 남아 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얻어 낸 민주헌법에 따라 그해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양김분열이라는 이슈를 남기며 끝났다. 이 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36%대의 지지를 받아 8,282,738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는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가 얻은 6,337,581표, 그리고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얻은 6,113,375표를 합한 수치와는 비교되지 않은 득표율로서 야권의 분열에 의한 어부지리 때문에 30%대의 국민지지로 대통령직에 오른 전무후무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이 선거는 이처럼 저조한 득표율로 당선자를 냈어도 1위와 2위의 표차는 200만 표 가까운 상당한 차이를 냈다.

그리고 1992년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이 된 민자당의 대선후보로 나섰던 김영삼 후보는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에게 다시 200만 표 가까운 표차를 벌리며 승리했다. 물론 이 선거에서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국민당을 스스로 창당, 후보로 등록하여 대선전에 뛰어든 돌발변수가 있었으나 3당 합당으로 세를 불린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를 김대중 후보가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두 번의 선거에 비해 지난 1997년 치러진 15대 대선과 2002년 치러진 16대 대선은 말 그대로 박빙 승부였다. 또 그 이전 치러진 두 번의 대선이 세간의 예측이나 여론조사 기관들의 예측이 비교적 쉬웠던데 비해 1997년과 2002년 대선은 세간의 예측과 여론조사 기관들의 예측까지도 개표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박빙의 승부였던 것이다.

우선 1997년 대통령 선거는 그해 초까지만 해도 지금의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의 압승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이는 우선 1992년 대선에 패해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가 다시 대선후보로 나올 수 있을 것인지 부터 불투명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는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로서는 최초인 세 번째 대통령직 도전에 나섰으나 역부족으로 김영삼 후보에게 패했다. 그리고 급기야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영국으로 떠났다. 그가 정계를 은퇴하자 통합민주당은 당시 이기택 총재 단일체제가 되었으나 이기택의 민주당은 김영삼의 민자당에 비해 세력도 왜소한데다 당수의 정치력에서도 한 급수 아래였다. 따라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야당을 안중에 두지 않고 마음껏 대통령의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반면 영국에서 2년 동안 와신상담 재기를 노리던 김대중은 1994년 영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이 후 아태평화재단을 만든 다음 이를 바탕으로 1995년 치러진 전국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조순 서울대 교수를 공천하는데 역할을 한 뒤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압승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선거는 김대중이 다시 정계로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김대중은 그리고 이 시험지에서 자신의 확실한 재기 가능성을 보았다.

김대중은 결국 자신의 계보의원들을 민주당에서 탈당시키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본격적으로 대선 4수를 준비한 것이다. 여론은 들끓었고 언론들은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하지만 이렇게 여론의 질타를 받으며 창당된 새정치국민회의는 1996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민회의 창당에 동참하지 않고 당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총선에 나선 이기택의 민주당을 압살시키며 원내 제 1야당이 되었다.

그러함에도 김대중 개인에 대한 여론의 지지도는 매우 비우호적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인 1997년 1월 1일 내놓은 각 언론사들의 신년 여론조사를 보면 당시 신한국당의 박찬종 의원이 20~30%대의 높은 지지율로 10%대 지지를 받은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에게 더블이 넘는 지지율 차이를 보이며 1위를 달렸다. 이 같은 정치권의 기상도 때문에 대선 1년 전까지만 해도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될 거라고 예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즉 박찬종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킹메이커’로 불리던 김윤환이 이회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여당의 기운이 이회창으로 돌았고 판세는 돌연 이회창 대세론으로 기울었다. 이 후 이회창은 3월부터 30%대의 지지율을 기록하다가 줄곧 30% 중반을 넘어 1위를 달리며 2위인 김대중 후보와 현격한 격차를 유지했다. 이회창 대통령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더구나 그해 7월 있었던 신한국당의 후보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를 물리치고 후보로 지명을 받은 이회창의 지지율은 한때 70%선을 넘기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15대 대선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 냈다. 줄곧 낮은 지지율을 보이며 반전의 기회를 잡지 못하면서 당시 민주개혁세력 안에서 호남후보 필패론, 김대중 불가론에 시달리던 김대중은 정대철 김상현과 새정치국민회의 안에서 후보경선전을 치렀고 후보로 지명을 받았다. 그리고 반전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지지율 고공비행과 함께 대세론을 타고 대권 일보 직전까지 갔던 이회창의 두 아들 병역비리가 7월 말 불거졌고 여론은 요동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틈을 탄 이인제가 독자출마를 선언하면서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이인제는 국민신당을 창당하면서 이회창의 지지기반을 잠식했다. 이회창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잠시 김대중과의 지지율이 역전됐다. 그러자 신한국당의 강삼재 사무총장이 김대중 비자금 내역을 폭로, 다시 김대중을 벼랑으로 몰았다. 따라서 잠시 역전되었던 김대중의 지지율은 다시 이회창에게 뒤집혔다.

대선 한 달을 남긴 11월 중순, 이회창은 김대중에게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평균 10%대 이상의 격차를 유지하면서 대통령 당선이 유력시 되었다. 하지만 이 때 다시 반전이 되는 극적상황이 벌어졌다. 김대중이 김종필과 손을 잡는 연합정권 구상을 발표했고 이 같은 ‘DJP(DJ+JP) 연합’으로 결국 김대중이 청와대로 입성했다. 이회창 또한 이기택이 이끄는 민주당 대선후보 조순 전 서울시장과 연합, 민주당과 합당하면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고치는 등 막판 세몰이를 시도했으나 이 파괴력은 ‘DJP 연합'에 미치지 못했다. 최종표차 390,667표, 득표율 차이 1.5%, 말 그대로 박빙승부였다.

그런데 2002년 12월 대선은 '1997드라마'보다 더욱 흥미진진한 드라마였다.

대선을 1년 앞둔 2001년 12월, 이회창 대세론이 정치권을 지배했다. '1997대선 드라마'에서 비운의 패전 주인공이 되었던 이회창은 선거전에서 조순에게 위탁했던 당권을 대선패배 후 잠깐의 시간이 지난 다음 회수했다. 그리고 태생적으로 그 지지기반이 허약할 수밖에 없었던 ‘DJP연합정권' 흔들었다. 이 같은 이회창의 작전은 성공했으며 국회 권력은 한나라당이 장악했다.

국민회의는 집권의 여세를 몰아 반 한나라당 세력을 연합시키며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몸집을 불리지만 2000년 총선에서 원내 1당을 다시 한나라당에 내주며 이회창에게 잃은 국회권력을 찾아오지 못했다. 이 같은 힘을 바탕으로 대선 드라이브를 건 이회창 대세론에 따라 그의 지지율은 2위인 이인제의 곱절이었다. 이때 나온 말이 '집권야당' 그리고 이회창은 ‘야당 대통령’이었다.

선거가 열린 2002년 1월 ‘차기 대통령감으로 적합한 인물’을 묻는 한국일보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은 31.7%로 부동의 1위를 달렸다. 다음으로 이인제(16.8%), 박근혜(8.3%), 노무현(8.2%) 순이었다.

하지만 2002년의 히어로 노무현은 그해 처음 우리 정당선거에 도입된 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이라는 후보지명절차의 바람을 타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해 3월 9일 부터 시작된 민주당의 순회지역경선에서 노무현은 울산 1위에 이어 3월 16일 치러진 광주경선에서 이인제 후보를 물리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이 사건은 이 땅에 ‘노풍’이라는 말을 만들며 단숨에 이회창 대세론을 잠재웠다. 3월 27일 민주당은 노무현을 후보로 지명했다. 그리고 한국갤럽이 그해 4월에 실시한 ‘이회창 vs 노무현 가상 대결’에서, 노무현은 49.4%를 얻어 36.3% 지지율에 그친 이회창을 눌렀다.

90년 정략적인 3당 합당을 반대하고, 총선에서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불리한 지역구에 출마한 노무현의 비정치적 행보가 기존 정치에 혐오감을 느껴온 유권자들을 열광시킨 결과였다. 그러나 이 같은 노풍은 또 내내 순항하지 못했다. 노 후보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방문해 팔목시계를 내보이며 김영삼의 적자인양 행동했고 그 여세를 몰아 영남공략 작전에 나서면서 역풍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노 후보를 떠난 민심은 그해 6월 전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며 불어댄 월드컵 바람에 힘입은 정몽준으로 옮겨가 다시 ‘정풍’을 불러일으켰다.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국가대표 축구팀이 월드컵 4강에 등극한 여세를 정몽준에게 몰아준 것이다. 정몽준은 단숨에 국민 지지율 30%대를 넘나들며 이회창과 양강체제를 구축했다. 정몽준이 순식간에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노무현의 대체제가 되었다. 이에 노무현을 후보로 지명한 민주당은 노무현 후보를 사퇴 시키고 정몽준을 영입, 후보를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면서 친노와 반노로 분열되어 지리멸렬해갔다.

이 힘을 바탕으로 정몽준은 국민승리21이라는 독자정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이 당의 공식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와신상담 지지율 회복을 위해 노력하던 노무현의 지지율이 노사모의 열광적 지지에 힘입어 20%대로 회복되면서 정몽준의 지지율도 20%대로 떨어졌다. 따라서 그해 11월 대선을 한달 여 남긴 시점의 지지율은 이회창 후보가 35% 안팎으로 1강을 형성하고, 뒤이어 노무현과 정몽준이 각각 20% 안팎의 지지율로 힘겹게 추격하는 양상이 되었다.

반 이회창 진영은 다시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로 분열돼서는 도저히 이회창을 누를 수 없다는 여론으로 두후보의 단일화를 압박했다. 따라서 이 같은 현실에 공감한 두 후보는 선거일을 불과 20여일 앞둔 11월25일, 역사를 바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그리고 단일후보가 된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의 지지층을 끌어들여 12월19일 아침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적 같은 드라마를 연출했다. 당락의 표차는 570,920표, 득표율은 2.3%, 이회창은 이 박빙의 드라마에 두 번 운 것이다.

2007년 10월 21일, 17대 대통령 선거는 꼭 59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현재 지명된 여타 당의 후보들을 무려 세 배 가까운 차이의 압도적 지지율인 50%대의 안정된 지지율을 두 달 가까이 유지하면서 대세론을 형성하고 있다.

이대로만 간다면 이명박을 후보로 내세운 한나라당은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1~2%차이라는 믿을 수 없는 차이로 정권을 잃은 아픔에서 헤어나며 정권을 탈환할 것 같다. 또 이명박 후보는 지난 1992년 정계입문 당시부터 꿈꿨던 대통령직에 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작금의 여론흐름을 보면 지난 두 번의 대선결과를 이번에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우선 지지율의 변동이 예사롭지가 않다.

지난 2003년 민주당을 와해시키고 창당, 2004년 총선에서 무려 152석의 의석을 획득하며 원내 과반 여당이 되었던 열린우리당은 그 후 4년 동안 지리멸렬, 한나라당에게 정국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또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여러 차례의 재보궐 선거에서 44:0이라는 부끄러운 성적을 남겼다. 그리고 급기야 지난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여당 참패라는 기록을 남긴 뒤 소멸되었다.

이로써 여권은 여권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분열되어 ‘범여권’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며 이합집산을 거듭, 가까스로 현재의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재탄생했다.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며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 대항할 후보로 정동영을 지명하는데 성공했다.

여권이 이렇게 되기까지 이명박 후보 이외의 여타 범여권 예비후보들은 누구도 10%대의 지지율을 기록하지 못했다. 이뿐아니라 무려 9명이나 나선 후보 예비경선 출마자 지지율을 다 합해도 20%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또 여기에 잠재적 여권후보로 지목된 민주당의 경선후보 들, 단기필마로 나선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 민주노동당의 후보로 지명된 권영길 후보 외에 경선에 나섰던 심상정, 노회찬 후보까지 모든 잠재적 대선주자를 다 합해도 30%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이 같은 대선후보 지지율에서 최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권신당의 후보로 정동영이 지명되고 또 민주당의 후보로 이인제가 지명된 뒤 정동영, 이인제, 문국현, 3인의 지지율 오름세가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결국 그동안 지지후보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호남개혁세력 지지층을 필두로 수도권 개혁세력 지지층이 서서히 결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이 결집속도가 빨라진다면 현재 이명박 후보 쪽으로 쏠렸던 호남과 수도권의 지지층이 범 개혁세력 후보 쪽으로 급격하게 이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오는 12월 대선의 최대화두가 경제대통령이므로 이 같은 어젠다를 능가할 변화를 몰고 오지 못한다면 누구도 이명박의 아성을 깰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의 화두가 경제대통령이라고 해도 지역정서를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즉 영남지역에서 한나라당이라는 ‘도그마’가 깨질 것 같은 조짐이 없으면 이는 필연적으로 호남지역의 반 한나라당 정서 또한 깨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곧 수도권 호남표를 자극할 것이며 여기에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가 수구보수 이념을 고수한다면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는 평화개혁세력 지지층 또한 반 한나라당으로 돌아설 것이 분명하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으로 불거진 NLL문제를 놓고 보더라도 명확한 전선이 그어지고 있음으로 알 수 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신당·민주당 경선 후 범여권 후보들의 동반 상승세는 뚜렷하다.

한겨레·리서치플러스가 지난 17일 실시한 조사 결과 신당 정동영 후보 19.0%, 창조한국당(가칭) 문국현 후보 7.6%, 민주당 이인제 후보가 4.2%를 각각 기록했다. 한 달 전인 지난달 17일 조사와 비교하면 정후보가 9.3%P, 문후보가 4.5%P, 이후보가 3.0%P 올랐다. 범여 후보 전체 지지율(권영길 제외)도 지난 조사 26.2%에서 30.8%로 4.6%P 오르며 30%대를 돌파했다.

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의 조사결과도 비슷한 양상이다. 16일 조사에서 정 후보는 지난 8일에 비해 7.2%, 문 후보는 3%, 이 후보는 1.7%가 올랐으며, 조선일보·한국갤럽의 지난달 26일과 지난 16일 조사를 비교해도 정 후보가 9.2%, 문 후보와 이 후보가 각각 1.6%P, 1.5%P씩 상승했다. 특히 리얼미터와 CBS가 조사한 지난 15일 조사결과는 정동영 후보가 이전 지지율보다 6.3% 급등, 범여권 후보로는 고건 이후 최초로 20%대를 돌파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간 이명박 후보는 평균 1%대의 지지율 등락을 보이며 정체되고 있다.

이 같은 결과는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반 한나라당 여론 흐름의 방향타인 호남지역이 여론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지표로 나타내주고 있다. 한겨레 조사에서 정동영 후보는 호남에서 압도적 1위(43.2%)를 기록했고, 문국현 후보가 16.2%로 뒤를 이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호남에서도 지지율 1위를 다투던 이명박 후보(14.5%)는 3위로 밀렸다.

2002년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광주 경선 1위를 차지하며 ‘노풍’을 일으켰다가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하면서 영남 챙기기에 나서자 급격하게 지지율이 빠졌던 것도 호남 지지층의 이탈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탈한 지지층은 정몽준에게 갔으며 일부는 무응답층으로 돌아버렸다. 이런 호남 표심은 그러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이후 다시 결집, 수도권과 여타 평화개혁세력까지 흡인하면서 이들의 투표율까지 상승시켜 결국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냈다.

그런데 2007년은 지금까지의 이런 호남표심이 일부 무응답층을 빼고 손학규 이해찬 정동영 문국현 이인제 등을 지지하는 사람들 외에는 거의가 이명박에게 가버렸다. 따라서 다시 이들을 돌려세울 동력이 필요한 것이다. 1997년 김대중, 2002년 노무현 후보를 찍었지만 지금 이명박 후보에게 가 있는 지지층을 견인해 낼 동력, 이 동력만 회복되면 지지율 차이는 단시일 내에 15%P 차까지 접근할 수 있다.

‘이번에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패배주의만 압도하면 관망파로 돌아선 친노세력까지 귀환, 자연스런 후보단일화가 이뤄지면서 대선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치열한 접전판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단일후보가 정동영일지 이인제일지 또 홀연히 나타난 문국현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과연 이번 대선도 지난 두 번의 대선과 마찬가지로 박빙승부가 펼쳐질 것인지...지금부터 과연 어느 쪽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싸움으로 빠져들 것인지...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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