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에 이어 전례가 없을 정도로 긴 12일장으로 치러진 28일의 김정일 장례식엔 맏상주가 없었다. 효행을 무엇보다 가장 큰 덕목으로 치는 북한에서 아버지 장례는 맏아들이 주장이 되어 장례를 치르는 것이 ‘도리’이나 장남 김정남의 얼굴은 장례식이 치러진 금수산기념궁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카오에 살고 있던 그가 김정일 사망 후 행방을 감춘 뒤 베이징에 있다는 등 온갖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후계자 김정은과 같은 배에서 태어난 2남 김정철도 코앞이면 닿을 수 있는 같은 평양에 살고 있는 데도 장례식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집안의 어른인 김평일은 어떤가? 법도 있는 집안이라면 현장에서 형님의 장례가 차질 없이 치러 질수 있도록 대소사를 직접 챙겨야 할 텐데도 그는 자신이 맡고 있는 폴란드 대사직 집무실을 한 발 짝도 떠나지 못했다. 이들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232명의 장의위원 명단에 끼이지 못했다.이러면서도 북한은 후계자인 3남 김정은의 효행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다. 다른 집안이면 한번이면 족할 아버지 시신 앞에 무려 5번이나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조문을 하는 모습, 슬픔을 이기지 못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시위현장에 설치되는 폴리스라인이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그 원인을 두고 각자의 주장이 다르다. 시위주최측은 경찰의 과잉진압 탓으로 돌리고 있고, 경찰 측은 시위대의 불법집회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경찰서장폭 행사건으로 양측간 논란이 일고 있는 이번 광화문FTA반대집회도 지금까지의 다른 시위와 마찬가지로 폴리스라인이 무너졌다. 시위주최측이 정당연설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 집회가 거기에 맞게 정당들이 자신들의 주장만하고 끝났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이 집회도 불법시위로 이어져 시위대들이 경찰이 광장과 도로 사이에 설치한 폴리스라인을 넘어 도로를 점거하는 통에 한때 차량통행에 심한 혼잡을 빚었다.필자에겐 폴리스라인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1970년대 말 한-미간엔 박동선사건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졌다. 이 사건을 마무리하기위해 당시 시빌레티 법무차관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대검찰청에서 검찰과 조율을 끝낸 시빌레티 차관이 검찰청사 앞에서 통역을 앞세워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에 앞서 그의 요구로 기자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위해 땅바닥에 분필로 둥그렇게 줄을 그었다. 그것이 그 당시로는 처음 듣는 폴리스라인이라고 했다.
정부 여당의 한-미 FTA 강행처리 후 거리에는 시위가 넘쳐나고 있다. 쌀쌀한 날씨 속에 밤늦도록 세종문화회관 계단과 여의도에서 FTA 반대구호를 외치고 경찰과 몸싸움 벌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야당은 국회의사당을 버리고 거리의 데모꾼으로 변한지 오래이며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은 사태를 주도적으로 수습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두 쪽으로 나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우리체제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 법관들도 두 쪽으로 나뉘어 거친 말들이 오가고 있다. 우리 공동체가 함몰 직전인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로 그들의 말대로 한-미 FTA가 체결되면 우리가 미국의 경제적 식민지가 되는 걸까? 한-칠래, 한-EU FTA는 괜찮은 데 한-미 FTA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농업은 도산되고 농민들은 살아날 사람이 없을까?백보를 양보해 그들의 주장에 나름의 정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 공동체를 깨트릴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50여년 전만 해도 세계 최빈국이었던 이 나라를 이 정도로 키우는데는 그들보다는 도전적인 기업가와 성실한 근로자, 소명의식에 불탔던 관료들, 밤세워 불 밝히고 연구실을 지킨 연구자등의 공이 그들보다는 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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