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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악’이 돼가는 희망버스의 일탈

폭력·무질서·탐욕으로 일그러진 희망버스 원정대와 민주노총


지난 주말 울산 현대차 공장 일대는 아비규환이었다. 공장을 점거하기 위한 날카로운 죽봉과 돌멩이, 이를 저지하려는 물대포가 만나고 그 속에서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들의 비명과 고함, 알 수 없는 외침 등이 뒤범벅돼 마치 지옥의 한 장면과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그 속에서 취재를 하던 언론이 두들겨 맞았고, 시위대와 회사 양측에서 모두 110여 명이 다쳤다. ‘희망’이란 한 마디에 모여든 이들 중 “희망버스에서 본 것은 무질서, 아수라장, 추악한 탐욕이 섞인 쓰레기장”이라고 자조하는 이가 나올 만큼 그날 그곳은 절망과 우울, 비극의 집합체였다. 이어진 문화제에서 술판이 벌어졌다는 보도까지 나오는 걸 보면 일찌감치 노선을 이탈한 채 달리는 희망버스의 질주가 어느 수준에까지 왔는지 짐작이 간다. 이번 사건은 희망버스의 종착역이 어디가 될지 알려주는 묵시록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이미 이 희망버스 원정대가 그렇게 순수하지도 희망적이지도 않다는 걸 안다. 희망버스가 지나간 자리마다 암울한 잿빛이 더 진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한진중공업, 쌍용차, 제주 강정마을 등에는 희망이 아닌 반목과 불신이 싹트고 불투명한 미래와 한숨만이 더 깊어졌다. 프로도의 반지원정대가 제각각의 권력과 욕망, 이기심을 상징하는 절대반지를 기꺼이 버리고 불살라버림으로써 절대 악 사우론을 물리쳤다면 희망버스 원정대는 회를 거듭하면서 순수함을 잃고 탐욕과 이기심만이 강해지고 있다. 상대의 굴복을 강요하는 비타협, 약자의 외피를 쓴 무도함, 내 욕망을 위해 타인의 선의를 기꺼이 악용하는 교활함이 넘친다. 이런 희망버스는 더 이상 희망을 주지 못한다는 내부비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본과 권력, 언론이 희망버스를 왜곡하고 외면한다는 주장은 더 이상 많은 이를 설득하지 못한다.

언론이 현대차의 ‘불법파견’보다 희망버스의 ‘폭력 파티’에 주목하는 것은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대차가 ‘희망버스 폭력’ 프레임 뒤에 숨었다고 비난하는 한겨레나 언론이 불법 파견에는 눈감고 희망버스의 폭력만 부각시킨다고 불만인 경향신문은 희망버스가 왜 절망버스로 불리는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덩치 큰 현대차가 시위대의 폭력 프레임 뒤로 숨어 모든 탓을 돌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재벌과 대기업은 정부와 시민단체, 내부고발자 등에 의해 불법과 비리가 언제든 감시당하고 폭로당할 수 있는 현실에 놓여 있고, 갑과 을의 프레임이란 굴레를 숙명처럼 안고 가야 하는 처지다. 그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 노동자 개인뿐 아니라 살벌한 생존 게임에 내몰린 기업도 좋든 싫든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강요받고 있는 현실이다.

불법과 폭력 정당화하는 희망버스, 이를 옹호하는 좌파언론

이번 폭력 사태를 낳은 근본 원인이 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만 해도 그렇다. 현대차와 사내 하청 노조는 특별협의를 진행 중에 있다. 올해 1,750명, 2016년까지 3,500명을 정규직화하자는 단계적 해결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내하청 노조는 이를 거부하고 한 번에 6,800명을 정규직으로 돌리고, 앞으로 비정규직을 일체 사용하지 말 것 등을 요구하고 있어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다. 한 번에 모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수천 명을 끌어 모아 회사 공장을 찾아가 죽봉을 휘두르는 게 합리적인 태도라고 볼 수는 없다. 공장의 펜스를 뜯어내고 강제 점거하려는 폭력 시위로 위력을 행사하는 태도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나.

시위 과정에서 회사 측 사람들이 불법을 자행했다며 경비업법 운운하며 깨알같이 지적하는 한겨레신문이나, 현대 측의 불법파견이 대법원으로부터 심판받은 지 오래됐는데 정몽구 회장은 왜 처벌받지 않고 있느냐며 “불법파견 문제 해결을 위해 철탑 고공농성을 벌인 지 280일이 되도록 법을 지키지 않아 희망버스를 기획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민주노총과 민변 등의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정몽구 회장을 처벌하면 현대차가 갑자기 비정규직의 천국이 되기라도 하나? 건수마다 기업 총수를 처벌하는 게 증오자들의 변태적 가학성을 만족시키는 것 외에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근로조건 향상에 도대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기업의 불법 파견을 응징한다고 불법 폭력 시위를 옹호한다는 것도 모순의 극치다. 이런 시위를 옹호하기 위해 민주노총과 한겨레 등이 인권, 민주주의, 정의, 법치라는 단어를 동원해 항변하는 것도 파렴치한 일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한다는 소망으로 희망버스에 올라탔다가 지옥을 맛본 일반 시민 참여자들의 순수성을 마지막까지 짓밟는 태도다.

경향신문은 희망버스 기획단이 사전에 밧줄을 준비해 울타리를 걷어낼 계획을 세운 적이 없으며 참가자들 중 일부가 준비해 행동에 옮긴 것이라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이창근 희망버스 대변인은 “현장에서 참가자들의 분노를 지도부가 모두 제어하고 통제할 수는 없었다”면서 “희망버스 활동 중 뜻하지 않게 부상자들이 발생한 것에 대해서는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변명은 희망버스 원정대가 등장한 사건마다 왜 참가자들의 쇠파이프와 죽봉은 빠짐없이 등장하는 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 참가자들의 분노를 제어하지 못해 늘 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부상자가 속출한다면 희망버스를 기획한 민주노총 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무능 아니면 의도적인 기획이라는 얘기다.

국민 뜻과 반대로 달리는 반성 없는 민주노총과 희망버스의 폭주

법과 원칙의 대명사로 불리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희망버스의 불법과 폭력을 정부가 방치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수치다. 그날 울산의 현장에서도 경찰은 죽봉과 돌멩이 낫과 같은 날카로운 무기가 날아다니는 현장에서 시위대와 사측 중간에 끼어 잔뜩 몸을 움츠리기 바빴고 유혈 폭력 현장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는 등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엉거주춤한 태도로는 법과 원칙이 지켜질 리 만무하다. 과격 시위대로부터 공권력이 똥개만도 못하게 취급받는 것은 법과 원칙에 대한 확고한 의식보다 나부터 살고보자는 보신이 앞선 탓이 아닌가. 소극 대응이 진리인 것처럼 구는 듯한 정부와 경찰 수뇌부가 현장에서 법치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우리의 젊은 경찰들의 기운을 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민주노총 노조원이 주도하는 시위와 파업은 많은 경우 막장으로 치달았고, 여론의 외면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이번 울산 현대차 희망버스 시위대뿐 아니라 과거 여러 시위가 그랬다. 민주노총 산하 언론노조 역시 작년 MBC에서 170일간 막장 파업을 일으켰다가 국민의 냉대에 철저히 무너지고 실패한 일이 있다. 민주노총은 왜 많은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지부터 깨달아야 한다. 대한민국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거대한 조직의 힘만 믿고 극단 투쟁, 밥그릇 투쟁, 정치투쟁, 반정부 투쟁에 골몰하다 민심과 얼마만큼 괴리됐는지부터 깨닫기 바란다. 이제 아무리 ‘희망버스’란 말로 덧칠을 해봐야 국민은 민낯을 진작에 확인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폭력마저 옹호하는 좌파단체와 언론들도 이젠 더 이상 방패막이가 돼주지 못한다.

박한명 폴리뷰 편집국장 hanmyoung@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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