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4일에 있었던 ‘국보법사수 국민대회’는 그야말로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범보수 단체와 일반시민이 함께 시청 앞에 모여 한목소리로 노무현 정부의 국보법 폐지 움직임을 비판하고 대항했던 전무후무한 집회였다. 언론에 따라 집회 참가자 수는 조금씩 달랐지만, 당시 여러 보도를 종합해보면 모인 인원이 적게는 10만 명에서 많게는 30만 명가량 됐다. 건수만 생겼다 하면 촛불을 들고 조직적으로 잘 모이는 진보좌파 진영과 달리 보수우파 진영에서 이런 대규모 집회를 보기란 희귀한 일이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기도 하고, 대개 바쁜 생활인들이다 보니 어지간해서는 아스팔트로 나오는 일이 드물다. 조직화돼 있고, 전문 활동가 소위 ‘꾼’들이 많은 진보좌파 진영의 사정과는 매우 달라서 이런 규모로 열렸다는 것은 그만큼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컸다는 점을 뜻한다.
그러나 보수우파 진영의 이 같은 전무후무한 대규모 집회와 정부에 대한 분노를 바라보는 방송의 시선은 싸늘했다. 보수우파 신문들만이 관심을 가지고 보도했을 뿐 당시 공영방송사들의 태도는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단신 뉴스나 보도됐을까, 이 집회의 성격, 경위,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인터뷰, 국보법 폐지를 반대하는 이유 등등 상세한 보도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 집회에 참석했다가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노인, 경찰의 진압에 항의하던 시민 등의 피해보도는 바랄 수도 없었다. 이 당시 공영방송사들은 철저히 정권의 편이었다. 방송이 없었으면 자신이 대통령이 됐겠느냐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증명했듯, 방송은 대통령의 뜻을 충실히 쫓았고, 대통령 뜻을 반대하는 집회는 수십만이 모여도 차갑게 외면했다.
국정원 규탄 촛불집회를 보도하지 않는 KBS가 전달자 역할을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미디어스의 지적은 그래서 공감하기 어렵다. 아니 상당히 불편하다. KBS뿐 아니라 MBC, SBS 등 방송이 집회와 시위 보도에 야박했던 것은 언급했듯 그들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1인 시위를 포함해 대규모 군중집회까지 보수우파들의 갖가지 집회는 늘 외면받기 일쑤였고, 그런 푸대접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국정원 직원 댓글 73개로 시작한 온갖 의혹 제기와 파헤치기에 앞장서고 정치권 정쟁 보도에 방송이 총대를 메야 하며, 정부를 비난하는 촛불은 빠짐없이 보도해야 한다는 식의 미디어스 주장이야말로 방송이 선수로 뛰길 강요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주장이 어디 있나.
엄밀히 말해 현재 방송사들의 보도는 정권과 야당의 눈치를 보는 수준이라고 평가해야 맞다. 야당의 주장과 문제 제기를 충실히 보도하는 것과 거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보도를 하지도 않는다. 공영방송을 독립시킬 수 있는 지배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정권에 따라 부침을 겪는 방송사 사정을 보면 이해하지 못할 부분도 없다. 이런 한계 속에서 여야가 첨예하게 맞붙는 쟁점에 대해 가급적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공영방송사가 최소한 지킬 수 있는 ‘정의’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방송사 내부 조직 자체가 언론노조에 좌지우지되고 있고, 이런 언론노조의 힘은 경영진을 압도하고 있으니 김재철 전 사장과 같이 찍혀 튕겨 나가는 경우도 생기는 힘의 불균형 현상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KBS가 자신들이 만족할 만큼 국정원과 정권 비판 보도를 하지 않는다고 ‘5공 때 보도지침 언론’이니 ‘정권의 홍보기관’이니 하는 말들을 하는 것은 누가 봐도 떼쟁이 아이들의 억지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방송이 현재 야당의 ‘일등 선수’로 뛰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국민 입장에선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KBS·MBC가 선수로 뛰었던 노무현 정권에 많은 국민은 피곤해했다. 방송사가 선수로 뛰면서 만든 프로그램들은 국민을 두 쪽으로 갈랐고, 사회 분열 등 온갖 폐해를 낳았다. 심판이 돼야할 공영방송이 선수로 뛰는 것 자체가 불공정한 게임이다. 과거 공영방송을 자기편 선수로 뛰게 했던 쪽에서 지금 방송을 비난하는 건 적반하장이다. 현재 방송을 비판하려면 자신들의 ‘과거사(병풍, 탄핵, 광우병 보도 등)’부터 반성해야 한다.
박한명 폴리뷰 편집국장 hanmyoung@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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