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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해바라기’된 것 같은 윤창중과 ‘눈 먼’ 보수우파

짝짓기 끝낸 ‘수컷 사마귀’ 운명 자처하는 보수우파 진영의 블랙코미디

대한민국 정치판에는 무수한 철면피들이 살아간다. 뜻을 세우고 함께 뭉쳤던 이들이 인기가 떨어져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리더의 머리를 작두로 쳤다가 인기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다시 그 머리를 세워놓고 정치를 하는 이들이 있고, 어제까지 한 우물의 물을 마셨던 이가 오늘은 적진 한 가운데서 그 물을 마시는 옛 동지들을 향해 독화살을 날린다. 과거 남을 때리는 도구였던 쇠몽둥이가 오늘의 나를 보호하는 ‘원칙’이란 방패가 되는 것도 다반사요, 한 입으로 두말 세말 하는 것은 애교에 가깝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라 치부한다해도 명분은 서야한다. 그래야 국민이 이해하고 최소한의 지지는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객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논해야 할 논객이 정치판 철면피들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면 그런 논객이 휘젓는 세상이란 뻔하다. 자신이 믿는 바, 신념과 가치를 위해 정직한 글을 쓰기보다 배움과 지식을 특정인의 입맛을 고려한 글의 양념으로 치장하는 곡학아세의 논객들이 설칠수록 세상은 더 혼란스럽고, 미래는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 원칙과 가치는 도외시한 채 논객들이 정치공학이란 잡론에만 빠져있거나 권력에 아부하고 줄을 대느라 ‘정신’을 잃을수록 국가는 방향을 잃고 국민은 그 배안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한 때 논객다운 논객으로 명성을 얻었다는 윤창중 전 문화일보 논설실장의 글이 갈수록 길을 잃는 듯한 모습을 보면 안타깝고 동시에 한심하기 짝이 없다. 특히 논객으로서 나중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쓸 것은 써야 한다는 그가 현재 왜 그렇게 비루한 글들을 써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정작 써야할 것은 쓰지 않으면서 굳이 쓸 필요가 없는 소위 ‘뒷담화’까지 꺼내드는 그의 모습에서 어떻게든 권력의 눈에 들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무용지물의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 애처로울 지경이다.

朴을 위해 2년전 ‘이상득,정몽준 사담’까지 까발리는 윤창중의 애처로운 권력에의 구애

‘형(兄)의 도리(2)’란 제목의 칼럼은 논객다움을 잃은 보수논객 윤 전 실장의 현재와 그가 속한 보수우파 진영의 한심한 몰골을 고스란히 반영해주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꼽을 만하다. 윤 전 실장의 이 칼럼은 표면적으로는 저축은행 비리 혐의로 소환된 이상득 전 의원에 대해 이미 자신이 2년전 그의 권력남용을 비판했던 사실을 상기시킨 글이다. 하지만 그 글 속에서 치졸하고 용렬한 계산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아래는 그가 2년여 전에 썼다는 ‘형(兄)의 도리’라는 칼럼에서 소개한 한 대목이다.

동생이 대통령이고, 형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형제공화국’!
정말 형제를 이해할 수 없다. 인사비리·국정농단·이권개입 문제가 터질 때마다 예외 없이 이상득이 ‘몸통’으로 떠오르고, 동생은 넘어가고 있다.
형은 동생에 대한 도리가 있다. 조용히 떠나라!

윤 전 실장은 자신의 이런 글이 이상득과 자신이 몸담았던 언론사 사주인 정몽준 전 대표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면서 “막 써대는군.” “분을 참지 못해 씩씩 거렸다. 두고 보자는 표정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그들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등의 소감도 덧붙였다. 자신이 그런 글을 써서 현 정권으로부터 수모를 당했다는 취지의 강렬한 감정적 성토였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상가에서 이상득 전 의원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일, 자신의 칼럼으로 정몽준 전 대표에게 한 소리 들은 일까지 까발렸다.

2년 전 권력에 직격탄을 날린 그의 칼럼은 칭찬받아 마땅한 글이었지만, 2년 후 권력에 아부하는 이런 칼럼은 윤 전 실장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글이다. 이미 다 죽은 권력의 등에 뒤늦게 남들과 똑같이 칼을 꼽고 침을 뱉는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다가 “그 작자가 옛날에 나에게 이런 모욕을 줬다”는 식의 유치한 고자질과 다름없는 불필요한 사담까지 끼워 넣는 것은 개인적 분풀이에 불과하다. ‘권력’과 ‘자본’의 비판·압력이 그토록 모멸적이었고 윤 전 실장 스스로의 표현대로 분노가 피처럼 꾸역꾸역 토해져 나왔다면 왜 그 당시 그들을 비판하지 못했나? 왜 그들의 무도한 압력을 그 당시에 고발하지 못했나? 왜 그 때는 용케도 참았으며 하필이면 지금에서야 그들의 용렬함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가?

‘박근혜 권력’의 온갖 잘못된 행태에 눈감는 그의 글에선 짙은 욕망의 향기만 난다

윤 전 실장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지는 해를 향해, 정치적 약자를 향해 남들과 똑같이 손가락질이나 할 게 아니라, 뜨려는 해가 회색의 색깔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려는 것을 막는 일이다. 그게 보수우파 대표적 논객으로 대접받았던 논객이 할 일이다. 윤 전 실장은 지금까지 박근혜 권력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을 한 적이 없다. 오로지 박근혜 대권가도를 위해 ‘김문수 들러리론’을 띄우고, 정몽준·이재오를 비난하기만 했다. 그는 왜 반드시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야 하는지, 왜 보수우파 세력이 박근혜를 지지해야만 하는지 그 정당성을 명쾌히 설명한 적이 없다. 그는 왜 박근혜 권력이 반민주인지 새누리당의 사당화가 역사적 반동인지 말한 적이 없다.

그의 글이 풍긴 냄새는 지금껏 오직 권력의 가까이에 가고픈 욕망의 향기뿐이다. 2년 전에는 그토록 권력의 오만에 분개를 느꼈다면서 오늘의 권력자의 오만방자함을 추종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토록 오래 보수우파적 가치를 역설해왔으면서 보수우파의 가치를 무시하고 포퓰리즘으로 무장한 채 보수우파세력을 계륵으로 취급하는 이의 정권획득을 일방 주장하는 점도 설득력이 없다. 그가 원칙 있는 보수우파 논객이었다면 부조화의 극치인 박근혜 캠프의 기괴한 양다리 인적구성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다. 오로지 ‘표’만을 위한 박근혜 진영의 무원칙을 비판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박근혜 진영에 입을 열 때는 왜 자신이 선택되어야만 하는지 ‘간택’을 위한 그때뿐인 것 같다.

짝짓기 끝낸 후 암컷 사마귀 밥이 되는 수컷 사마귀 자처하는 보수우파의 블랙코미디

지금 보수우파 그 많은 유명 논객 중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는 것은 윤창중 전 논설실장 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비판의 날을 세워야 할 때 날을 거두고 입을 열어야 할 때 침묵에 빠져들고 있다. 그러면서 한쪽에선 좌파와 종북세력에게만 모든 화살을 돌린다. 보수우파 진영에 기회주의자와 정치권력의 단맛을 보려 달려드는 한철 부나방들이 들끓게 된 데에는 이런 분위기의 탓이 크다. 보수우파의 가치는, 가치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권력에 기생하는 데 하나의 방편으로 악용되는 잘못된 행태들을 눈으로 보고도 무심히 방치한 때문이다.

보수우파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한 차원 더 높이 혁신할 수 있는 정권을 만들기보다 신기루에 불과한 ‘대세론’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박근혜 정권 탄생 자체에만 목적을 둔다면 보수우파의 신세는 수컷 사마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짝짓기를 끝내자마자 암컷 사마귀에 먹이로 먹히는 비참한 운명 말이다. 그나마 박근혜 정권이 참다운 보수우파 정권이 될 수 있다면 희생과 지지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진영은 ‘보수’의 항구를 떠난지 오래다. 최소한의 가치조차 버린 지 이미 오래됐다는 얘기다.

그런 정치권력에 기생하기 위해, 권력의 쾌락을 맛보기 위해 또 다른 수컷 사마귀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사이비들이 활개를 치는 한, 또한 보듬고 함께 가야할 사람들마저 모욕 주기를 주저않고, 갈라치기를 하는 가짜들의 분열적 행태들을 보수우파가 묵인하는 한, 보수우파의 가치가 뿌리를 내리고 진정한 보수우파 정권을 볼 날은 요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암담한 현실이 분명한데도, 이념과 가치를 내던지고 보수우파를 자신의 배를 채울 수컷 사마귀로 삼으려는 노골적인 자들과 기꺼이 그들의 먹이가 되겠다는 어리석은 보수우파의 블랙코미디를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황당할 따름이다.



폴리뷰 대표필진 - 박한명 - (hanmyoung@empas.com) 트위터 주소 https://twitter.com/phm5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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