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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이후', 희망코리아 가는 길

어디쯤 와 있고,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응답


김대호 사회디자인 연구소장이 쓴 본 책은 토크빌 이래 정치의 핵심 화두인 “우리 사회가 어디쯤 와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치열한 응답이다. 동시에 “원인과 결과, 주된 원인과 부차적 원인 등이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가운데서 문제 해결의 중심고리와 급소”에 대한 통찰이다. 그 핵심 방법론은 크게 보고 세밀하게 살피는 ‘大觀小察’과 ‘실사구시’이다. 그래서 인용하는 통계가 정말 많다. 현실을 보는 새로운 프레임도 여럿 있다. ‘공평’, ‘사회적 유인체계’, ‘가치생태계’, ‘이중 왜곡사회’, ‘화전민’, ‘앙시앵 레짐’, ‘1950년대의 화석과 1980년대의 화석’, ‘공진현상’ 등이 그것이다. 또한 사고의 시공간이 특별히 큰 역사가의 눈으로 1987년 이후 25년을 성찰하면서, 우리가 당연시해 온 많은 것들, 즉 철학, 가치, 제도, 이념 등을 ‘앙시앵 레짐’이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엄청난 격론을 촉발할 소지가 있다.

원래 당대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일정한 역사적 거리와 (그 시대의 어떤 요구에 화답하는) 독특한 관점이 필요하다. 그런데 저자는 여러 경계를 넘나들면서 양쪽을 객관적으로 살필 기회가 많아서인지, 바닥현실과 속살을 많이 살펴 시대의 요구를 예리하게 포착해서인지 몰라도, 시간을 껑충 뛰어 역사적 거리 두기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독특한 관점도 있다. 책의 행간마다 담론 생산자로서는 특이한 경력인 이공계 운동권 출신으로 노동현장, 산업현장, 정치현장(정치 콘텐츠 생산업)을 거친 사람의 경험, 성찰, 사고방식이 진하게 묻어난다.

2013년 이후 대한민국과 코리아의 제도적․이념적 기본 설계도

이 책은 ‘나라의 길’과 ‘진보의 혁신’을 화두로 잡고 10여 년에 걸쳐 6권의 저서를 낸 저자의 7번째 저작으로, 개인적으로는 지적 모색의 총화 내지 최고봉인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저자가 연구실에 혼자 앉아 책과 자료를 뒤져서 쓴 것이 아니라, 코리아포럼, 사회디자인연구소, 공평사회포럼 등에서 이루어진, 강단(이론)과 현장(실물) 전문가들의 수백 차례에 걸친 집단적 토론의 총결산이기에 더욱 무게감이 있다.

저자는 지금 한국의 정치․사회발전을 위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대관소찰과 산업현장 등의 경험, 지혜를 종합한 질 높은 정치 콘텐츠”와 “이를 법안과 운동으로 구현하는 진정한 정치가와 경세가”라고 강조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유효기간이 다한 진보의 철학, 가치, 비전을 해체․재구성하여 국민들로부터 두터운 지지와 신뢰를 받는 정치․사회세력으로 거듭나게 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 들면 좀체 안 바뀌는, 그것도 분단건국, 산업화, 민주화의 신화를 창조한 경험에 뿌리박은 사고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려다 보니, 한 줄 한 줄이 시를 쓰는 것만큼이나 많은 고민을 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크게 3부 총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청년에게 최악의 체제”는 현재의 정치․경제․사회시스템(1953년 체제와 1987년 체제)이 초기의 건강성을 잃고, 이제는 청년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최악의 체제, 즉 앙시앵 레짐이 되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제2부 “거대한 착각”은 진보진영에게 널리 퍼진 관념(신자유주의 프레임)과 경향성에 대한 비판이다. 제3부 “희망 코리아의 비전”은 일자리, 복지, 교육, 조세재정, 정치개혁 문제에 대한 진단과 대안이다. 2013년 이후 대한민국과 코리아의 제도적․이념적 기본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보석 같은 통찰과 논쟁을 발화시킬 폭탄이 지천으로 널린 책

서문과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총 44개의 절에는 만만찮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보석 같기도 하고, 폭탄 같기도 한 통찰과 제안이 즐비하다. 깊이 음미할 탁견과 논쟁해 보고 싶은 대목에 대해 붉은 줄을 긋는다면, 페이지가 온통 붉게 변할지도 모른다.

저자는 지금의 현실을 이렇게 진단한다.

“지금 시대는 1987~88년의 국가 주요 질서에 대한 거친 수술과 1997년 이후 몇 년간의 시장경제에 대한 거친 수술의 후유증이 악조합되어 합병증이 극도로 심화된 상태이다. 이 합병증은 단지 진보와 보수 정치세력의 수술(개혁), 수습 미숙 탓만은 아니다. 급격한 세계화, 지식정보화, 중국의 세계의 공장화, 분단체제의 재편 실패 등이 가세하면서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국내외 환경변화에 조응하여 시스템을 제대로 바꾸지 못하는 남과 북,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정책적 무능이 자리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는 그 전 10~20년 동안 행해진 거친 대수술의 깊고 다양한 후유증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치유하지도 못하였다. 양극화와 불공정의 원천인 강고한 진보와 보수의 기득권 구조를 거의 바로잡지 못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한술 더 떠 남북관계, 민주주의, 중소기업 활성화 등에서 완전히 역주행하면서 모든 것을 더 악화시켜 버렸다.”(2부 5장 2절)

1987년 체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1953년 체제(분단체제)와 더불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율하는 1987년 체제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987년 체제는 결선투표 없는 5년 단임 대통령제를 핵심으로 한 헌법개정, 소선거구제 상대다수득표제를 채택한 1988년의 선거법, 영호남 지역주의에 뿌리박은 정치적 대립구도, 억눌린 내 권리 찾기와 빼앗긴 내 몫 찾기가 곧 사회정의라는 믿음을 기저에 깔고 있는 노동자 민중의 투쟁, 그리고 외환위기와 김대중 정부의 4대(기업, 금융, 공공, 노동)개혁 및 복지개혁이 얽히고설켜서 만들어진 질서이다.”

저자는 1987년 체제를 정치적 교착・무능 체제이자, 정치집단의 비전과 실력 부재로 인해 결과적으로 보수․진보 기득권의 담합 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1987년 체제는 양김씨 및 재야민주화 세력과 군부권위주의 집권세력 간의 정치적 대타협에 의해 탄생했다. 그 핵심은 대통령이나 다수당이 전횡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의 권능을 약화시키고 국회의 권능을 강화하였다. (중략) 1987년 체제는 정치세력들이 대승적 견지에서 타협․절충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적 교착 체제이자, 정치적 무능을 구조화한 체제라고 할 수도 있다.”

“1987년 체제는......군부 독재세력과 3김씨, 민주․노동세력 등의 불가피한 타협으로 인해 공공(정치)이 취약할 수밖에 없는 체제이다. 그런데 그 중심세력들이 국가비전(경제사회 모델)도 취약했고, 국가를 책임질 주인(중심) 형성 문제에도 깊이 천착하지 않다 보니 시간이 가면서 그 그늘이 짙게 드리울 수밖에 없었다.(중략) 노태우의 말대로 민주화가 개인과 집단의 욕구분출을 의미한다면, 아무래도 힘센 개인과 집단이 더 많은 욕구를 분출하고 더 많이 실현하게 되어 있다. 자신의 욕구를 좇아 각개 약진하는 존재들, 즉 재벌, 관료․공무원, 토건회사, 전문직능, 노조 등은 강한 국가나 정치에 의해 제어되든지, 경쟁자나 소비자에 의해 제어되든지, 하다못해 사회적 책임의식에 의해 제어되지 않으면 가치생산생태계를 피폐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안철수가 우려한 한국 IT생태계의 ‘삼성․LG동물원’화가 바로 그런 현상이다. 사실 법원, 검찰을 포함한 관료사회의 전관예우 현상도, 전현직 관료(부처) 커뮤니티가 민간업자들과 결탁하여 일종의 ‘마피아’처럼 되는 것도, 대․공기업 조직노동의 일자리가 대물림하고 싶을 정도로 엄청 좋은 일자리가 되어 버린 것도, 국가의 규제(면허증 발급 수, 독점적 권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부 전문직능이 청년인재의 블랙홀처럼 되어 버린 것도, 국토계획이나 도시계획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것도, 가계자산의 80%가 부동산인 상황에서 부동산 개발이익의 환수 메커니즘이 지극히 허술한 것도 하나같이 취약한 정치와 공공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가치․자원분배의 균형을 깊이 의식하지 않은 1987년 체제의 모순은 이익집단들의 권리․몫 찾기 투쟁이 이미 사회적 강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전개되면서 점점 극심해진다.(중략) (1987년 체제의 짙은 그늘에도 불구하고) 극복 문제가 깊이 고민되지 않는 것은 우리 시대 정치와 지식사회의 혼미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1부 4장)

청년에게 최악의 체제

저자는 현재 대한민국을 보수와 진보의 담합에 의해 청년과 비기득권자에게 최악의 체제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선진국과 비교할 때 한국은 “GDP에서 차지하는 복지지출이 너무 적고, 평균 근로시간이 길다”는 사실만큼이나 명백한 모순부조리가 수두룩하지만, 진보와 보수의 기득권자들은 이를 철저히 외면한다. 단적으로 각국의 생산력(1인당 평균 GDP)을 기준으로 각 부문, 직능이 누리는 근로조건과 그 상대적 격차를 살펴보면 한국은 합리성이 너무 없다. 근로조건과 격차가 노동의 양, 질이 아니라 노동의 힘(파괴력)과 수익에 비례한다. 경제활동인구(2,500만 명)의 10~20%가 붙어 있는 대기업, 공공부문, 전문직 등이 사는 ‘귀족’(城안) 노동시장과 나머지가 사는 ‘평민’(城밖=외부) 노동시장으로 양분되어 있다. 은행, 공공부문, ‘士’자 직업, 대기업 조직노동 등 힘 있는 쪽은 너무 과보호되고, 경쟁도 적고, 기여(노동의 양, 질)에 비해 처우수준도 높고, 고용도 경직되어 있지만, 힘없는 쪽은 그 반대다. 성밖에서 성안으로 들어가는 사다리가 교육시험 사다리 외에는 거의 끊어져 있다. 청년세대는 성안으로 들어갈 기회가 너무 적고, 중장년세대는 성밖으로 한번 밀려나면 재진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해고는 살인처럼 여겨진다. 해고비용이 워낙 크기에 기업은 기존 고용의 유지에 진력하면서 신규채용은 가뭄에 콩 나듯이 한다. 그래서 외부노동시장보다 처우수준이 매우 높은 곳은 평균연령이 40대 중반을 넘어 50세로 접근한다. 잘나가가는 곳의 추가고용 수요를 기득권 노동의 연장근로, 휴일근로로 처리한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노동시장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임금근로자가 되고 싶은데, 못 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는 낮은 고용율과 임금근로자 비율로 나타난다. 요컨대 성밖도 비정상, 성안도 비정상이지만 진보도 보수도 이런 개념이 없다. 공히 구부러진 동전의 볼록한 면(불합리한 기득권과 게임규칙)은 그대로 두고, 오목한 면만 펴려고 한다. 낮은 고용률 및 임금근로자 비율, 과도할 뿐 아니라 불합리한 격차, 낮은 복지지출 등으로 집약되는 오목한 면에 대해서는 진보는 노동계급의 힘과 복지지출의 문제로 보고, 보수는 투자, 수출, 성장의 문제로 본다. 그러면서 상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린다. 이렇게 하여 진보와 보수가 합작하여 만든 청년과 비기득권자에게 최악의 체제가 탄생한 것이다.”(1부 2장)

“지금 한국은 보수 정치집단, 매체, 논객과 그 수혜집단(재벌, 부동산 부자 등)이 1계급이라면, 이들의 대항마로 행세하는 진보 정치집단과 그 수혜집단이 2계급이나 다름이 없다. 운 나쁘게 3계급이 된 청년세대와 비기득권층은 이들 보수․진보 주류 기득권의 담합으로 인해 극심한 기회 부족과 불공정, 불공평에 신음하고 있다.”(1부 1장)

진보 진영에게 매우 불편한 얘기

저자는 연대, 연합, 통합을 통한 정권 탈환에 여념이 없는 진보진영에게 불편한 얘기를 쏟아 놓는다.

“지금 대한민국이 겪는 갈등과 고통은 보수나 진보가 정권을 오래 못 잡아서가 아니다. 좌클릭이나 우클릭 혹은 친자본(시장)이나 친노동을 확실하게 하지 못해서도, 대통령 한 명을 잘못 뽑아서도 아니다.(중략) 문제의 핵심은 양극화, 민생불안, 절망과 불신 등은 엄청나게 강력한 확대재생산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진보와 보수를 초월하여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집단의 지적 수준과 마음가짐(영적 수준), 국가경영 실력은 형편없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국가시스템과 정치리더십, 이념으로는 중국과 북한(급변사태), 자연환경의 도전을 이겨내고, 지속가능한 성장과 평화, 복지를 이룰 것 같지가 않다.”(서문)

한미FTA에 대해서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공히 비판적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한미FTA 처리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구태정치의 전형이다. 민주당은 실사구시적 태도와 중소기업 및 국리민복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위기 최소화, 기회 최대화’를 선도하는 신뢰할 수 있는 ‘집권세력’의 풍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한나라당 역시 ‘위기 극소화, 기회 극대화’의 관점에서 영향을 치밀하게 분석하지도 못했고, 예상되는 피해대책도 차분히 마련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다수당이자 집권세력으로서 인내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고 강행 처리해 버렸다.”(2부 9장 3절)

안철수 현상은 왜 일어났는가?

저자는 안철수 현상을 2011년 7월 초 일어난, 39층 테크노마트를 흔들리게 만든 공진현상과 흡사하다고 하면서, 안철수가 발산한 공진주파수를 ‘시장 사다리’의 복원 내지 ‘산업생태계의 건강성 회복’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한다.

“사전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안철수 현상은 종종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는 공진(共振)현상과 닮았다. 공진현상은 물체의 고유진동수(固有振動, proper vibration)와 외부에서 가해지는 진동수가 일치할 때 일어난다.(중략) 2011년 7월 초 서울의 39층짜리 테크노마트 건물 전체를 10분 동안 흔들어 댄 것도 지진이나 강풍이 아니라 12층 피트니스 센터의 20여 명의 집단 뜀뛰기 운동(‘태보’운동)이었다. 이처럼 안철수 현상은 국민들이 절실히 열망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가치―고유진동수―와 안철수가 발산한 은은한 매력이 완벽히 일치하면서 일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 매력은 성공한 벤처 창업자, 유능한 경영자, 사회적 책임을 깊이 의식하는 기업인, 반듯한 생각과 행동, 청년층의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과 적극적 소통, 부드러움과 정당한 분노 등일 것이다. 이 매력의 핵심은 아마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시장 사다리’의 복원 가능성을 안철수가 인생을 통해서 보여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새로운 물질적․문화적 생산력의 체현자라는 이미지가 아닐까 생각한다.”(1부 2장 2절)

왜 2013년 체제인가?

저자는 총・대선이 있는 해인 2012년이 아닌, 2013년을 역사의 분수령으로 삼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향후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을 끌어 갈 신질서가 탄생한다면, 2012년 이후 수십 년 동안 유지될 정치사회 체제는 2012년 체제로 불려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중략) 2012년 총․대선이 역사의 분수령이 되기엔 역부족이다. 국민들은 안철수 현상을 통해 현재의 정치적 대립구도, 이념, 리더십 등 정치질서 전체를 일종의 앙시앵 레짐으로 간주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이 염원을 받아 안아 선거로, 정책논쟁으로, 시민운동 등으로 이를 구현하여, 새로운 질서를 건설할 정치적․사회적 역량은 태부족이다. 주인(민심)은 뭔가 혁명적 변화를 원하지만, 이미 실력이 검증된, 낙제점을 받은 대리인들이 두 패로 나뉘어 과거에 대한 성찰도, 미래에 대한 비전도 내팽개쳐 놓고, 단지 국회 의석과 대통령 자리만을 놓고 다투는 비극적인 양상이 펼쳐지고 있는 꼴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수명이 다한 낡은 질서를 바꾸는 큰 힘은 2013년 혹은 2014년에 있을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바꿀 역사적 합의에서 올지도 모른다. 백낙청 선생은 애초부터 이런 가능성을 높게 보고 2013년 체제라는 말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그 못지않게 지금 꿈틀대는 청년과 비기득권층의 앙시앵 레짐에 대한 분노와 혁파의 의지가 2012년에 약한 지진을 일으킨 후, 2013년 이후 점점 더 강한 지진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2013년에 설사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수명이 다한 헌법, 선거법만 개정되어도 2013년 체제는 시대의 이정표나 역사의 분수령으로 삼을 만할 것이다. 그것이 수많은 변화를 연쇄적으로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역시 2013년 체제라는 조어에 전폭적으로 공감한다.”(1부 1장)

2013년 체제의 핵심 가치

저자는 “2013년 체제가 우선시해야 할 가치는 1987년 체제가 경시하거나 간과한 것들이 대부분”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가치 내지 과제를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단체제의 재구성, 고용률과 임금근로자 비율의 제고, 우리의 생산력수준(1인당GDP)에 맞고 노동의 양과 질에도 상응하는 보상체계 구축, 조세․재정․복지를 통한 재분배와 더불어 노동 간 재분배(연대임금제, 중향평준화), 유연안정 시스템 구축, 기업의 국내투자 및 고용에 대한 공포 저감, 청년인재의 흐름 건전화, 수출 및 매출의 국내고용과 부가가치 유발효과의 제고, 금융시스템의 선진화, 부동산 불로소득 최소화, 중국발 구조조정 압력에 대한 대응, 기후변화와 에너지자원 위기 시대에 대한 대비 등.”(3부 14장 2절)

그러면서 향후 한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의 실력, 즉 국정현안을 잘 처리할 수 있는 국가경영 능력”과 “관료 및 이익집단으로부터의 강건성”이라고 한다.

“이는 독재의 위협 앞에 굴하지 않고 신념과 양심을 지켜 낸 민주투사의 덕목과는 다른 것이다. 또한 탈권위, 서민성, 소신과 원칙(지역주의, 기회주의 반대), 도덕적 신뢰로 집약할 수 있는 노무현적 덕목과도 다른 것이다. 또한 저돌적 추진력으로 집약되는 이명박적 덕목과도 전혀 다른 덕목이다.(중략) 2013년 체제는 정치집단으로 하여금 국가경영에서 덕장(德將)이나 용장(勇將)이 아니라 지장(智將)이 될 것을 요구한다.(중략) 국가경영에 관한 한 잘 훈련된 엘리트적인 면모를 보일 것을 요구한다.(중략) 2013년 체제의 핵심 정신은 정의(공평, 복지, 강건)와 실력(정치적․정책적 유능)이다.”(3부 14장 2절)

왜 유독 한국만 고통과 갈등이 극심할까?

저자는 양극화와 민생불안에 대해서도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 지식정보화, 민주화, 자유화,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이들 나라가 받는 충격은 비슷할 텐데, 왜 유독 한국만 이렇게 고통과 갈등이 극심할까? 미국과 FTA를 하는 나라가 한국 외에도 많은데, 왜 한국만 이렇게 극심한 내홍을 겪는 걸까?(중략) 요컨대 다른 나라(선진국과 중국 인접국)와 무엇이 다른지, 과거 한국과 지금 한국은 어떻게 다른지,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공계적 기질을 발휘하여, 1부 3장에서 산업연관표와 2,500만 경제활동인구를 정밀 분석하여 한국사회의 물질적 재생산구조의 핵심적 특성을 ‘고단한 산업구조’와 ‘양반․상놈으로 나누어진 고용구조’로 집약하였다. 이것이 ‘양극화, 민생불안, 절망과 불신 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핵심구조’라는 것이다.

“산업연관표에서 나타났듯이, 한국은 세계 최상위권이 되지 않으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제조업=수출산업 의존도가 너무 높다. 이는 제조업이 세계화, 자유화, 중국의 부상이 제공한 거대한 기회를 잡아 일취월장하고, 다른 부문은 상대적으로 굼뜨게 발전하기 때문일 텐데, 문제는 제조업 의존도가 높다고 해서 제조업 발전을 내리 누를 수도 없고, 눌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중략) 한국은 선진국에서 개발된 기술과 상품을 싸게 빨리 만들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파는 방식으로 산업화를 이루었기에, 수출은 아무래도 거대한 생산능력과 판매망, 마케팅 능력을 갖춘 재벌대기업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대체로 수요를 독점하기에 하청협력업체나 언론에 대한 지배력이 강하기 마련이다. 이는 주요 언론들의 광고 의존도가 높고 언론시장이 콘텐츠 외적인 것으로 경쟁하는 구도이다 보니 더욱 악화되었다. 재벌대기업의 압도적으로 우월한 지위는 허술한 내부 감시․견제시스템과 외부(공정거래위, 언론, 소비자단체 등) 감시․견제시스템의 방조 하에 문어발식 확장, 내부자거래, 가혹한 부품가 인하, 중소기업의 기술․인재 약탈 사태를 초래하였다. 게다가 한국은 금융의 핵심인 은행이 안정성에 치중한 나머지 벤처중소기업 육성에 매우 인색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대기업, 공공부문, 전문직능과 중소기업의 근로조건 격차가 워낙 크다 보니 벤처중소기업 사활의 관건인 핵심인재를 중소기업이 오래 보유하기가 쉽지 않았다.(중략) 노조운동도, 진보 정치운동도 공히 양극화와 민생불안을 완화하거나 극복할 현대적 사상 내지 국가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보니, 노조는 수익성과 교섭력이 허용하면 신의 직장을 만드는 쪽으로 일로 매진하였다. 당연히 재벌대기업은 매출은 늘리되 직영인력은 늘리지 않는 방식의 생산성향상에 매진하였다. 인력보다는 설비, 장비를 너무 많이 쓰고, 공정분할을 통한 외주하청화에 적극 나서고, 생산기반 역시 너무 빠른 속도로 세계화(글로벌 소싱)하여 국내 산업연관관계를 매우 약화시켰다. 한편 공무원, 공기업 등 공공부문은…… 근로조건을 노동시장의 최상층에 속하는 100인 이상 민간기업의 근로조건을 기준으로 개선하다 보니, 완전히 귀족시장으로 들어가 버렸다.(중략) 한국은 세계화, 지식정보화, 중국의 부상 등으로 인한 충격을 힘 있는 ‘갑’들, 즉 재벌대기업 내지 수요독점의 원청대기업, 공공부문, 전문직(자격증) 등은 너무 적게 부담하고, 대체로 힘없는 ‘을’들이 거의 전담한다.”(2부 6장 3절)

비전 2030, 뉴 민주당 플랜, 뉴 비전에 대한 분석 비판 위에 선 대안

이 책은 제3부에서 참여정부의 ‘비전 2030’ ‘뉴 민주당 플랜’과 2011년 7월에 나온 한나라당의 ‘뉴 비전’에 대한 상세한 분석, 평가 위에서 대안을 제시하였다.

한국사회 최고 최대의 난제인 일자리 문제와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한 주장을 한다. 저자는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비전을 타도해야 할 지적 앙시앵레짐이라고 규정하면서 “고용률 70%, 청년고용률 40, 임금근로자 비율 85%, P90/10 3.5배 이내”라는 목표의 전환을 제시한다. 또한 ‘2013년 체제’의 일자리 창출의 방향의 대강을 밝혔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시장과 국가, 사회를 관통하는 사회적 동기부여(유인) 체계(incentive-penalty system)를 바로 세워 자본, 노동, 인재, 금융 등 자원들이 위험(risk)과 보상(return)에 따라 적절하게 배분되도록 하는 것이다. 경제주체별 자산소유 구조, 노동소득분배율 등 GDP 분배구조, 1인당GDP의 배수로 환산한 부문․직업별 평균임금 수준, 각종 양극화 지표(P90/50, P50/10, 지니계수 등) 등을 종합하면, 한국의 힘 있는 존재들이 너무 많은 몫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본 간 재분배와 노동 간 분배 둘 다가 필요하다. 물론 자본과 노동 간 분배구조(노동소득분배율) 개선도 필요하다.(중략) 자본 간 분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공정거래를 정착시키고, 능력 있는 중소기업이 순조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의 규제, 금융시스템, 조달시스템 등을 합리화해야 하고, 창업과 창직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노동 간 분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연대임금제, 직무․직능급제,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나누기와 파트타임 고용 활성화, 사회임금 상향, 최저임금 상향 및 근로장려세제 강화, 비정규직법 개정(사용기간 제한 철폐, 차별시정 기능 강화) 등이 필요하다.”(3부 11장 3절)

보편주의 vs 선별주의는 엉뚱한 전선

복지문제에 대해서는 주목할 만한 주장이 한 둘이 아니다. 예컨대 저자는 보편주의와 선별주의를 대립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복지프로그램 전체를 놓고 보면, 보편주의․선별주의의 전선은 ‘지금’ ‘한국’의 복지국가 논쟁에서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보편주의를) 진보의 대표상품으로 삼기에는 너무 옹색하다. 복지 영역에 국한해서 봐도 그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가 너무 많다.(중략) 지금 한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복지프로그램별 우선순위, 혜택의 대상(보편, 선별), 급여 두께, 재원대책과 로드맵이다. 선별주의와 보편주의는 혜택의 범위(대상), 두께, 여론, 정치적 판단을 종합하여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정책으로 결코 이념화․교조화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진보는 보편주의를 신앙처럼 만들었고, 오세훈 전 시장은 이를 포퓰리즘이라고 폄하하면서 선별주의를 신앙으로 만들었다.”(3부 12장 3절)

또한 현역 사병들의 보수를 대폭 올려 21개월 복무 후 제대 시에 대략 1,200만원(교육 바우처 형태라도)을 지급하는 정책이 반값등록금 정책보다 훨씬 정의롭고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모순부조리의 킹핀

책의 맨 뒷부분에는 격렬한 논란이 예상되는 모순부조리의 킹핀들이 죽 나열되어 있다.

“(하나를 쓰러뜨리면 나머지 10개가 다 쓰러지는 볼링의 5번 핀 같은 존재인) 킹핀은 문제의 연관구조 전체를 파악하여, 문제를 단순화해야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분절적․일면적 인식이 구조화되어 있고, 과도한 공포와 엉뚱한 증오 등에 의해 눈과 귀가 자주 흐려지는 한국사회에서 이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한국사회가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서 문제의 복잡한 연관구조와 힘을 집중할 ‘킹핀’이 무엇인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할지, 어떻게 대중을 ‘공진’시킬 수 있는지 등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지적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3부 16장)

저자는 다양한 분야(문제)의 킹핀을 제시하였다. 예컨대 알 권리, 말할 자유를 막고, 정치 기득권을 과보호하는 선거법이 안고 있는 모순부조리의 킹핀은 ‘선거운동 기간제한’을 폐지하는 것이란다. 사법개혁의 킹핀은 ‘지검장 직선제를 통한 지검끼리의 견제’이며, 전력 대란 및 녹색산업 부흥의 킹핀은 ‘전기요금 현실화’(환경세 부과)이며, 부동산문제의 킹핀은 정책의 기초인 ‘부동산 관련 통계’를 내실 있게 갖추는 것이란다. 물론 킹핀 중의 킹핀은 정치 부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남한 국민과 북한 인민이 겪고 있는 수많은 고통과 불만의 대부분은 나쁜 정치 혹은 부실한 정치에서 온다. 부실한 정치를 혁파하는 정치혁명이 젊은 코리아, 희망 코리아, 행복 코리아의 킹핀이다.”

정치 콘텐츠 생산 시스템의 부재가 국가적 위기

정치 부실 문제를 해결하는 킹핀으로 헌법(대통령 연임제) 및 선거제도(결선투표제) 개혁과 국회의원 정수 500명으로의 증원을 포함한 선출직, 정무직의 확대․강화를 제시한다. 저자는 “지금 한국은 대통령(후보), 국회의원(후보), 정당의 지도부(후보) 등 핵심 정치인의 눈높이에 맞춰 정치 콘텐츠를 생산하는 시스템 자체가 없다”면서, 이것이 심각한 국가적 위기라고 말한다.

“정치 콘텐츠는 개인적 연구와 고민, 집단적 토론, 현장 확인 등을 통한 오랜 숙성의 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고 나서, 나중에 전문가나 경세가에게서 빌려 쓸 수 없는 것이다. 정치 콘텐츠는 정치가의 영혼이다. 건강과 영혼은 원래 빌릴 수 없는 것이다. 영혼을 빌리려는 사람은 정치를 하지 않는 것이 사회를 위하는 것이다.”

총 16장, 44개 절, 수백 개의 소항목마다, 아니, 544쪽에 이르는 페이지마다 깊이 음미할 만한 통찰과 논쟁할 만한 정책 아이디어가 정말 많다. 2012년은 물론이고, 2013년, 2014년, 2015년에도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문제작이다. 한국정치와 지식사회의 키를 한 뼘은 키울 역작이다.


지은이 : 김대호 사회디자인 연구소장

1963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진주고를 거쳐 서울대 공대를 졸업했다. 뒤틀린 역사와 정의를 바로 세워 보겠다던 청년 시절의 초심을 잃지 않고, 노동현장, 산업현장, 정치현장 경험을 녹여 내 ‘나라의 길’을 주제로 저술 활동을 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대우자동차 하나 못 살리는 나라'(사회평론, 2001), '한 386의 사상혁명'(시대정신, 2004), '진보와 보수를 넘어'(백산서당, 2007), '노무현 이후-새 시대 플랫폼은 무엇인가'(한걸음더, 2009) 등이 있다. 현재 사)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이거리를 바꾸자(fixmystreet.kr) 공동대표, 사)인천광역시도서관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박영진열사추모사업회 간사, 단결의길 편집장, 대우자동차 기술연구소 차장, 인천광역시장(송영길) 경제사회특보를 역임했다. E-mail: itspolitic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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