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 미디어워치 11호 기사입니다.
그간 방송권력과 PD들의 그늘에 가려져있던 방송작가들이 들고 일어났다. KBS의 PD집필제를 통한 작가 축소에 강력 반발하고 있는 KBS 구성작가들이 21일 PD집필제를 거부하고 전면 제작거부를 불사할 것이라고 밝혀 방송계에 파란이 일고 있다. KBS 구성작가협의회(회장 신지현)는 이날 성명을 통해 비상총회 결과 PD집필제를 전면 거부하기로 결의하고, 11개 프로그램에서 실시되고 있는 PD집필제를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KBS 작가들이 방송제작 거부라는 극단적 투쟁방법까지 밝히게 된 것은 KBS의 PD집필제 시행이다. KBS 측에서는 제작비 절감이라는 이유로 PD들이 직접 구성안을 쓰게 하면서 작가의 고용을 대폭 줄이고 있기 때문. 현재 KBS가 PD집필제를 시행하는 프로그램은 ‘KBS 스페셜’, ‘환경스페셜’, ‘역사 추적’, ‘걸어서 세계 속으로’, ‘추적60분’, ‘시청자칼럼’, ‘6시 내고향’, ‘풍경이 있는 여행’, ‘과학카페’, ‘30분 다큐’, ‘생방송 세상의 아침 토요일편’ 등 11개이다.
PD집필제는 작가들의 생존과 명예를 위협하고 있다
KBS 작가들은 '피디집필제'가 곧 구성다큐 작가의 퇴출이며 이를 통해 한국 방송의 질을 저하시키려는 출발점이라 보고 있다. KBS 구성작가 협의회 측은 “모든 구성 다큐 작가들은 생존권을 지키고, 우리 사회가 인정하고 발전시켜온 방송작가의 명예를 수호하며, 우리 방송의 질을 확보해내기 위해 전면 제작거부까지 불사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KBS 작가들이 PD집필제를 반대하는 이유에는 단지 일자리의 문제 이외에도 역할에 대한 폄하의 문제도 있다. KBS에서 PD집필제 시행의 이유로 “현장 취재에 임하지 않은 작가가 원고를 씀으로 인해 프로그램의 공정성, 객관성이 지켜지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이에 KBS 구성작가협의회는 “어떤 근거로 이러한 부당한 언사를 자행하는가. 이에 구성다큐 작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프로그램 제작에 기여했던 모든 역할을 단번에 무시해버리는 발상”이라 비판했다.
이러한 작가들의 반발은 한국 지상파 방송의 구조적 병폐에 기인한다는 분석이 많다. 그간 지상파 방송의 거의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작가들의 힘으로 제작되어왔음에도, 평균 8천만원 이상의 고액 연봉으로 안정적 지위를 누리는 PD들과 달리 작가들의 대우는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KBS 구성작가협회는 “구성다큐 작가에 대한 KBS의 대우는 차마 지적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3년차 작가가 월평균 100만원을 받는가 하면 150여명 전체 작가 중 연봉 4천만원선 작가가 불과 10여명에 불과하다. 10년 이상의 경력작가 중 태반이 연봉 2천만원선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KBS는 누적 적자를 이유로 2008년 가을개편과 2009년 봄 개편에 각각 10%씩 총 20%의 원고료 삭감을 자행했다”며 그간의 누적된 불만을 토로했다.
작가들의 업무는 비단 구성안 원고 작성에만 그치지 않는다. 프로그램을 총 관리하는 PD가 당연히 해야할 섭외 및 비용결산, 출연료 지급 등 거의 모든 기초적인 업무가 작가들에게 할당된다. 방송사로부터 출연 섭외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왜 PD가 아닌 작가들로부터 연락을 받는지 한번쯤 의아해했을 것이다. 미디어발전국민연합의 강길모 공동대표는 “여러차례 방송사에 출연해봤지만, 섭외부터, 출연료 지급까지 PD의 모습을 본 적이 없고 모두 작가들과 대화하게 된다”는 경험을 밝히기도 했다. 방송제작의 현실이 이렇다보니 최근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는 KBS 등 방송사에서는 이른바 놀고 먹는 PD들에게 추가 업무를 부여하고, 그로 인해 작가들이 퇴출당하는 이른바 생존의 피라미드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정규직 고액 연봉자인 PD의 숫자를 줄일 수 없으니, 방송계에서 가장 힘이 약한 작가들에게 고통과 희생을 전담시키는 것이다.
고액연봉의 정규직 PD와 저임금 비정규직 작가의 이해는 다르다
이러한 작가들의 문제에 대해서 71년생 이하 기업가들의 모임인 실크로드CEO포럼 측은 여러차례 문제제기한 바 있다. 실크로드CEO포럼의 이문원 전문위원은 “단지 높은 학력과 토익점수로 한번 입사한 것 이외에 능력을 평가받지 않고 평생 안정된 직장을 누리는 PD들을 위해 작가들이 더 이상 희생하지 말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최근 MBC 'PD수첩‘ 등이 편향된 방송으로 검찰 수사에 이르자 작가들이 맨 앞에 나서 PD들을 보호하러 나섰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들은 전체적으로 방송시장의 자율화를 반대하는 정규직 PD 편에 서있는 형편이다.
실크로드CEO포럼 측은 “최소한 지상파 방송사가 2-3개 더 생기고, 케이블과 IPTV에 종합편성채널이 열리는 등 방송시장이 자율화되고 성장하게 되면 당연히 집필능력을 보유한 작가들에 유리한 환경이 될 텐데, 작가들이 PD의 편에서 이를 반대하는 건 자가당착”이라 모순점을 꼬집기도 했다.
경제적인 문제로 볼 때, 정규직 PD와 비정규직 작가들의 이해관계가 절대 일치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올 것이 왔다는 시각도 있다. 21세기경제연구소의 방병문 연구위원은 “지상파 방송사의 PD들은 지상파 독점 시장이 그대로 유지되고, 평생 일자리가 보장되기만을 바라는 반면 비정규직 작가들에게는 당연히 시장이 자율화되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방송시장 개혁을 놓고 입장이 갈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 분석했다.
문제는 방송자율화를 추진하는 정부와 여당, 그리고 중도우파시민사회에서 이러한 열악한 처지에 놓은 작가들과 독립PD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야말로 방송 제작의 모든 일을 도맡고 있고 이들이 사실 상 국민과 함께 하는 방송의 주인임에도 너무 오랜 기간 동안 무관심에 방치되어 기득권 방송사들에 종속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방송개혁론자들, 작가와 독립PD들에 관심 가져본 적 있는가
한나라당 추천으로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에 참여하는 공언련 최홍재 사무처장은 “그간 우리가 작가나 독립PD들에 대한 관심이 너무 부족했고, 그러다보니 이들의 현실을 알리도록 토론회 참여를 요청해도 주저하는 상황”이라며 범 중도우파세력에 반성을 촉구했다.
방송사와 PD들이 작가들에 고통과 희생을 전담시키며 작가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터져나온 지금이야말로, 적극적으로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이들의 현실적 처우 개선에 방송개혁의 깃발을 든 세력이 나서야하는 시점이라는 데 점차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 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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