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의 정연주 전 사장은 2003년 4월 취임 직후 기자간담회를 열어 “좋은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수신료 인상을 통해 공영성을 확보하겠다”는 공약을 최우선적으로 내세웠다. 실제로 정 전 사장은 대선과 총선을 앞둔 2007년까지도 수신료 인상안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실패했다.
현 KBS노조는 수신료 인상안의 실패 원인을 정 전 사장이 노무현 정권과 구 열린우리당의 힘에만 의존한 것을 꼽는다. 2004년 대통령 탄핵 보도 당시 KBS는 언론학회 보고서 결과 “아무리 느슨한 잣대를 적용해도 편파적”이라는 판정을 받을 정도로, 정권과 여당에 치우쳤다. 그 결과 당시 여당이 국회 과반수를 점했어도, 다수 국민의 동의를 끌어내지 못하여 수신료 인상안 공약이 물거품된 것이다.
좌우 모두 근본적으로 KBS 수신료 인상안에는 찬성한다. 1981년 월 2500원으로 정해진 수신료는 무려 17년 간 제 자리에 묶여있다. 그 결과 KBS의 경영이 2TV의 광고수입에 의존하게 되어, 공영성을 훼손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다수 국민의 동의를 얻어 수신료를 인상할 수 있냐는 것이다.
수신료 인상의 조건은 두 가지이다. 첫째, 특정 정치세력의 나팔수 역할보다는 국민 전체가 공감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여야 한다. 특정 정치세력이란 반드시 정부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대표적인 불공정 프로그램으로 지적되는 <미디어 포커스>는 좌파언론단체의 지령을 받아 제작되는 수준이다. 중도보수 언론단체가 아무리 토론회를 열고 성명서를 내도 이제껏 단 한 번도 <미디어포커스>에 반영된 바 없다. 이들은 KBS의 공영성을 “우리가 우리 패거리들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너희는 간섭하지 마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국민의 세금을 정치도박의 판돈으로 쓰고 있는 격이다. 기어코 자신들만의 편협한 정치관을 고집하고 싶다면 다들 사표를 쓰고 자신들의 돈으로 인터넷신문을 만들어야 한다.
KBS는 정치갈등의 현안에 뛰어들어 선수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 국가보안법, 한미FTA 등 찬반 논란이 벌어지는 사안에 대해서는 양측의 의견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한다. 또한 과학기술 발전, 청년창업, 기업의 해외진출, 아시아대중문화, 빈곤해결 등등 국가적으로 필요한 주제는 차고 넘친다. 전체 국민에 도움이 되지만 민영방송이 관심을 두지 않는 분야를 꾸준히 찾아낸다면 그 어떤 국민이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겠는가.
이렇게 공영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나가며, 다음으로 경영을 정상화해야 한다. KBS의 경영정상화는 민간기업과는 분명히 다르다. 정연주 전 사장은 KBS의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 대신, 전체 프로그램의 40%를 담당하는 영세 외주제작업체의 제작비를 대폭 삭감하여 부족한 돈을 채워넣었다. 영세업자의 등을 쳐서 흑자를 내는 것은 KBS의 경영정상화가 아니다.
지금까지 논의된 안 중 가장 합리적인 방안은 KBS1TV와 EBS, 아리랑TV를 묶어 100% 수신료로 운영하는 것이다. EBS가 국민교육보다는 입시전쟁에 뛰어들어 사설 학원화되고 있고, 세계에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인 아리랑TV가 재원부족으로 유명무실해지는 상황까지 고려한 대안이다. 이 과정에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하여, 내부 운영비용을 줄이고, 외주제작사의 제작비를 대폭 올리는 가이드라인을 설정해야 한다. 이 가이드라인을 민영방송사에까지 적용시킨다면, 침체된 한국방송콘텐츠 시장까지 활성화시킬 수 있다. 그럼 자연스럽게 2TV를 특화된 채널로 민간영역에 되돌려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KBS 경영정상화이고 공영성 회복이다..
지금 KBS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은 과도하게 사장에 집중되어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일은 KBS에 개혁의 칼을 대는 것이다. 현 정부도 자신들과 비슷한 성향의 사람만 앉으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한다면, 결국 정연주 전 사장의 실패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KBS의 주인은 정부도, KBS직원도, 좌파언론단체도 아닌 수신료와 세금을 내는 국민이다. KBS를 본래 주인인 국민의 품으로 돌려달라는 것, KBS 개혁의 시작과 끝이다. / 변희재
* 조선일보 시론을 수정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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