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진보좌파진영이 대중적으로 이슈화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담론은 '88만원 세대론'이었다. 앞으로 20대의 95%가 월 소득 88만원에 불과한 비정규직으로 몰락할 것이란 끔찍한 경고였다. 386 다음 세대의 사회 진출 지체현상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다. 앞선 세대와 달리 20대와 30대 초반에서 정치는 물론 경제, 문화적 리더가 탄생하지 못하는 현상은 개별 능력이 아닌 세대 간 구조적인 문제이다. 88만원 세대론은 이런 현상을 점차 고착화되는 신자유주의식 구조조정 때문이라는 경제적 분석을 통해 접근한 것이다.
이러한 88만원 세대론의 의미와 가치는 더 부연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결함 또한 지니고 있다. 세대의 문제를 경제적 시각으로만 설명하다 보니 차세대의 장점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산업화 세대의 추진력, 386세대의 조직력과 비견될 만한 장점이 없다면 다음 세대가 시장논리에 의해서, 세대 간의 경쟁에서 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그러다 보니 다음 세대를 위한 별 뾰족한 대안이 나올 리 없다. 진보좌파들이 내세우는 해법은 불쌍한 88만원 세대를 위해, 사회가 관심을 갖고, 이들의 주거권, 노동권, 교육권을 보장하자는 원론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기존 좌파의 경제사회정책과 똑같은 것이다.
시각을 돌려 88만원 세대에 대해 문화로 접근해 보면, 전혀 다른 분석을 할 수 있다. 문화적 시각에서 386과 이후 세대의 경계는 92학번부터 잡고 있다. 그 코드는 '서태지', '슬램덩크', 'PC통신'이었다. '서태지'로부터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슬램덩크'로부터 과거에 대한 집착보다는 개인의 성취를 중시하는 정서를 익혔고, 이를 'PC통신'을 통해 지연과 학연을 뛰어넘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공유했다. 지금은 동양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피겨스케이팅 수영 패션모델 분야에서 세계를 이끄는 김연아, 박태환, 강승현 등의 출현, '디워'의 미국 흥행 성공으로, 젊은 세대들은 선진국 콤플렉스를 완전히 극복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자신들만의 장점을 십분 살려가고 있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스스로 몽골, 우즈베크, 카자흐 등 북아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이집트 등의 중동에까지 IT 전도사로 맹활약하고 있다. 그 중에는 현지에서 인터넷과 대중문화 관련 책을 집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학생들도 있다. 누가 도와준 것도 아니고 시킨 일도 아닌데, 스스로 이루어낸 성과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IT 전도사들의 해외진출 루트가 바로 한류의 전파 흐름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보급되고, 이를 공유할 수 있는 인터넷이 보급되며, 이 길을 따라 한국의 젊은이들이 세계 곳곳에 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동서간의 문화교류의 길이었던 실크로드가 한국의 젊은이들로 인해 다시 열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비단'은 두말할 것 없이 IT와 대중문화이다.
대안은 바로 이러한 차세대의 장점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첫째, 젊은 세대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인 인터넷과 대중문화 시장에 공정한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분야에서 창업을 해도 독과점 때문에 초기에 좌절하고 만다. 진보좌파는 이런 시스템을 개혁하기보다는 오히려 포털과 문화권력 등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데 급급했다. 둘째, 미국이든 유럽이든 아시아든 더 많은 학생과 기업을 국내에 유치하여 문화경제 교류의 기반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셋째, IT 전도사 경험이 있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해외 창업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아시아 각국의 대학생들이 한국에서 IT기술을 배워 자국에서 창업한다. 이들과 인적으로 연결만 해주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산업화 세대의 상징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아시아에 진출했을 때는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알려지지도 않았다. 지금의 한국은 경제 10강 중 하나이다. 월 88만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연소득으로 1만달러다. 1인당 GNP 1만달러가 넘었다며 환호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불행한 세대라며 주저앉을 것인가, 꿈의 실크로드를 여는 첫 세대가 될 것인가. 모두가 개인의 마음먹기 나름이며, 정부 정책의 방향에 달려있다. / 변희재
* 조선일보 시론을 수정보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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