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남자노인 한 명이 승객들에게 뭔가를 나눠주고 있었다. 돈 좀 보태달라며 구걸하는 내용이 적힌 쪽지인 모양이었다. 노인은 나한테도 그걸 주고 지나갔다. 동전도 없을뿐더러 이런 형식의 동냥은 도와주고픈 마음도 내키지 않는지라 명함 만한 종이쪽지를 조용히 무릎에 올려놨다. 순간 문제의 쪽지가 진짜 명함임을 파악했다. 명함 한가운데엔 너무나 낯익은 얼굴이 인쇄돼 있었다. 얼굴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허경영 총재. 모종의 결의에 찬 듯한 꽉 다문 입술이 인상적인.
정정해야겠다. 허경영은 더는 민주공화당 총재가 아니다. 열린우리당 대통령 예비후보다. 그것도 기호 1번. 열린당 당적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최초로 공식 피력한 인물이 허경영인 셈이다. 창당주역은 다 빠져나가고 노무현 정권의 국물에 길들여진 영남친노세력만 남은 열린우리당의 대통령 예비후보 1번이 허경영 총재라니…. 코미디야 코미디. 내침 김에 명함 뒷면에 쓰인 굵직한 대선공약을 읽어봤다. 경제분야가 대박이다. “산삼뉴딜정책으로 1,000여 개의 산삼단지에 100만 실업자 고용하여 실업문제 완전해결!”
산삼과 뉴딜을 접합시키다니. 끝내준다 허경영, 정말 기막힌 발상이다. 산삼뉴딜정책이라? 실현가능성의 유무를 떠나 임팩트 하나만큼은 최고다. 허경영은 명함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천재정치인 허경영’ 현직대통령은 물론이고 주요정당의 대권주자들마저 걸핏하면 연출하는 짓거리가 눈물 흘리고, 대국민 사과하고, 단식하고, 삼보일배하는 따위의 자학정치다. 노무현이 자기를 세계적인 대통령이라고 일컫는 호기를 부렸다고 하나 이는 추종자들만 모아놓은 집안잔치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성난 민심의 계란세례가 무서워 평범한 일반시민과의 접촉을 일체 마다할 정도로 노무현 또한 심리적으로 몹시 위축된 상태다.
모두들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며 잔뜩 몸을 사리고 있다. 겸손을 가장한 비굴과 신중의 탈을 쓴 비겁함이 대세다. 이와 같은 세태에 허경영이 경종을 울렸다. 세상이 뭐라 하든, 남들 전부가 손가락질을 하건 당당하게 선언한다. 천재정치인 허경영이라고. 열린우리당을 이끌고 정권을 재창출할 명실상부한 집권여당 대권후보라고.
허경영의 명함을 전동차 안에서 무작위로 배포한 노인의 행위는 불법선거운동에 당연히 해당한다. 명함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허경영이란 이름을 생전 처음 들었을 확률이 높다. 과거 딴지일보를 부지런히 들락거렸을 일부 네티즌들을 빼면 허경영의 인지도는 매우 낮은 현실이다. 허경영의 지지도는 인지도의 100분의 1에도 채 미치지 못할 게다. 허경영이나 허경영의 명함을 나눠주는 노인이나 국민에게는 과대망상에 빠진 미친*들에 불과하다.
한데 국민원로는 요 미친*들을 대하자마자 울컥 목이 메이고 말았다. 왜냐? 장마도 아니고 장마가 아닌 것도 아닌 같기도 장마철에 접어든 2007년 여름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취적인 인간이 허경영과 어느 허경영 지지자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없는 사조가 없다. 진보도 있고 수구도 있으며, 개혁도 있고 보수도 있다. 중도를 자처하는 무리 역시 존재한다. 없는 걸 찾자면 바로 진취다. 진취가 사라진 곳을 비집고 들어온 불청객이 신중의 탈을 쓴 비겁이고, 겸손을 가장한 비굴함이다.
나는 예전에 진취적 기상을 한껏 추켜세운 바 있다. 이제는 추켜세우는 데 머물지 않고 진취적 흐름의 생장과 발육에 힘을 보탤 계획이다. 먼저 진취의 의미를 다시금 반추해보자.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일을 이룩하려는 자세 내지 마음가짐을 뜻한다. 진보는 망하지 않았다. 진취적이지 못한 진보가 망했을 뿐이다. 마찬가지다. 보수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 진취적이지 않은 보수의 내일이 어두울 따름이다.
우리의 현실은 암담하다. 진취적이지 않은 보수와 진취적이지 못한 진보가 나라의 권력을 두고 다툰다. 똑같이 진취적이지 않으면 보수가 승리한다. 최소한 현장유지에는 성공하므로. 진취적 기상이 실종된 진보는 보수만도 못한 가짜 진보다. 진취적이지 않은 웰빙좌파가 득세한 까닭으로 말미암아 진보진영이 쫄딱 망한 것이다. 솔직히 물어보자. 진중권과 박노자가 진취적인가? 이들로부터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일을 이룩하는 심성과 태도를 발견할 수가 있는가?
진취의 견지에서는 조갑제와 지만원이 박노자와 진중권을 오히려 압도한다. 진취적 수구와 현실안주형 소녀진보가 충돌한 결과가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기존의 진보세력이 진취적으로 변하리라는 헛된 기대는 품지 말라. 공무원시험 가산점 폐지조치가 진정한 평등의 길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게 대한민국 진보좌파의 현주소다. 진취적 진보라면 평생 서민들 혈세 축내며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 발급하는 기생적 일자리는 꿈조차 꾸지 말라고 젊은이들을 앞장서 다그치고 계도해야 마땅하다. 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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