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농산물 '빌트인' 가능성 낮아
(서울=연합뉴스) 신호경 기자 =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다음주 통상장관급 '담판'만을 남겨둔 가운데, 미국이 쌀을 거론하면서 더욱 복잡해진 농업 분야에서 과연 어떤 절충이 가능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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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동석 농림차관보와 리처드 크라우더 미 USTR 농업담당 수석협상관의 한미FTA 쇠고기 고위급협상 장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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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가운데서도 양측 입장이 가장 첨예하게 맞서 결국 마지막까지 남게될 쇠고기는, 일단 당장 뼈 있는 쇠고기 수입을 약속하라는 미국측의 요구를 우리가 거부하는 대신 관세를 낮추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힐 것으로 예상된다.
쌀의 경우 미국이 실제로 막판 협상 테이블에 올려 놓으면 우리는 강하게 항의하는 동시에 끝까지 이를 의제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 장관급 담판 농업품목 많아야 5~6개
단순히 아직 양허(개방)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품목 수만을 따지면 농업 협상은 풀지 못한 숙제가 산더미다.
8차례의 실무협상과 지난 1차, 2차 고위급 협의까지 양국이 우리나라가 제시한 쇠고기.오렌지.돼지고기.낙농품 등 235개 민감품목을 포함, 270~280개 미정(undefined) 품목 가운데 상당 수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양측 통상장관급의 담판 테이블에는 쇠고기.오렌지 등 극소수 품목만 올라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농업분과장인 배종하 농림부 국제농업국장은 "장관급 협상과 동시에 농업 실무 협상도 함께 진행될 것"이라며 "실무 협상에서 최대한 의견을 좁힌 다음, 최종 장관급 협상에는 2~3개 품목, 많아야 5~6개 품목만 올리려고 한다. 장관급에서 너무 많은 것을 처리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현재 민감도 등으로 미뤄 쇠고기와 오렌지, 돼지고기, 낙농품 등이 끝까지 남아 막판 통상장관급의 조정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장관급 협상 대상 품목을 최대한 압축하는 작업이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고위급 협상 대표였던 민동석 농림부 차관보가 밝혔 듯, 일부 품목의 경우 2차 고위급 회의에서 이미 상당부분 의견 접근이 이뤄진 상태인데다 200개가 넘는 미정 품목 수가 국제공통품목분류표(HS.세번) 기준에 따른 것이라 실제 품목 수는 쇠고기.오렌지.닭고기.돼지고기.대두.낙농품.사과 등 20여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쇠고기나 오렌지 등 초민감품목 몇 개를 제외한 나머지의 경우 관세 철폐 기간, 폭, 계절관세, 수입쿼타(TRQ), 세번 분리 등의 다양한 양허 방법을 놓고 양측이 서로 조금씩 신축성을 보이면 합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 美 쌀 요구..단순 협상카드 아닌 듯
그렇지 않아도 쇠고기, 오렌지 등 난제가 많은데 미국측이 장관급 협상에서 쌀까지 거론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미국이 막판 우리의 '아킬레스건'인 쌀을 건드린데 대해 다른 양보를 얻으려는 '협상용 카드'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으나, 실제로 미국측은 다른 쟁점과의 연계 뿐 아니라 쌀 개방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우리측 협상단 관계자는 "쌀을 협상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도 물론 있지만, 미국측과 비공식적으로 얘기를 나눠보면 미국 쌀 관련 업계가 실제로 한국 쌀 시장 개방을 강하게 요구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미국 쌀 재배 농가는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과 맞물려 올해말 만료되는 농업법(Farm Bill) 개정 과정에서 보조금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수익성 높은 한국 수출 길을 터달라고 정부측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촌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재배 면적 등을 감안할 때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칼로스' 브랜드로 유명한 자포니카(국산쌀과 같은 둥글고 짧은 단립종) 쌀을 수출할 수 있는 양은 연간 최대 75만t 정도다. 이 가운데 대(對) 한국 수출 가능량은 국내 생산량의 6%, 35만t 안팎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미국은 쌀 문제를 '예외없는 관세 협상'이라는 FTA 원칙과도 연계시켜 주목하고 있다. 협상단 관계자는 "미국이 지금 쌀을 우리의 요구대로 거론조차 하지 않을 경우, 향후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서 이것이 '선례'가 될 것을 우려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 우리측 "쌀은 '딜' 없다"
그러나 미국이 어떤 목적으로 쌀을 거론하던, 우리 정부는 "쌀은 결코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기본 입장을 고수할 방침이다.
미국에 쌀을 내주면 경제적 손실 뿐 아니라 국민과 국회의 정서적, 정치적 반발로 협정이 타결되더라도 비준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박홍수 농림부장관, 김종훈 한미FTA 수석대표 등이 줄곧 "미국이 쌀을 강하게 요구하면 협상을 깰 수도 있다"고 단언해 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민 차관보는 "장관급 회담에서 미국이 쌀을 의제로 들고 나오면 우리측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 매우 강하게 대응할 것"이라며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역시 쌀에 대해 강경한 입장인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정부측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쌀-쇠고기, 쌀-섬유, 쌀-자동차 등의 '주고 받기' 가능성에 대해서도 일축하고 있다. 한 마디로 협상 대상도 아닌 쌀을 지키기 위해 다른 카드를 내준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얘기다.
민 차관보는 "쌀과 쇠고기가 무슨 관계인가. 더구나 쇠고기 검역 문제는 FTA 공식 의제도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그는 다른 산업과의 빅딜 가능성 역시 "쌀과 섬유, 쌀과 자동차를 맞바꾸면 그것을 국민들이 용납하겠는가"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배 국장 역시 쌀-쇠고기 딜과 관련, "(정부 안에서) 그런 방법이 논의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 쇠고기 검역 지키고 관세 낮출 듯
우리측 바람대로 쌀이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면, 결국 농업 분야에서 끝까지 줄다리기가 이어질 최대 격전지는 검역과 관세 문제가 얽혀있는 쇠고기가 될 전망이다.
일단 쇠고기 검역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5월말 국제수역사무국(OIE) 총회가 미국에 대한 광우병 위험 등급을 확정하기 전까지는 현행 미국산 쇠고기 위생조건의 개정 내용이나 일정 등을 앞서 약속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측은 OIE 총회의 '광우병 통제국 등급' 판정을 기정 사실화하고, 뼈를 포함한 쇠고기 전면 수입이 가능토록 위생조건을 바꾸는 절차의 일정 등 기본 사항을 이달말까지 못박자고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자체 위험조사 등 수입국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검역 주권을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므로 우리 정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더구나 쇠고기 검역 문제는 이번 FTA 협상의 공식 의제가 아닌만큼, 명분 측면에서도 미국측 협상 시한에 쫓겨 막판에 이를 양보한다는 것은 더욱 생각하기 어렵다.
반면 쇠고기 관세 문제의 경우 우리측이 다소 유연하게 대응할 개연성이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협상단의 한 관계자는 "쇠고기 관세 문제의 경우 검역에 비해 경제적 파장이 그렇게 크지 않은 문제일 수 있다"며 "현재 40%의 관세를 물고도 수입 쇠고기는 예컨대 100원인데 비해 한우는 250원인 상황에서, 만약 이 관세가 낮아져 수입산이 80~90원으로 된다해도 현재 250원 가격대에서 차별화로 자리를 잡고 있는 한우 시장이 무너진다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쇠고기 검역 문제는 양보의 여지가 없지만, 관세의 경우 상황에 따라 지금까지 주장해온 '현행 관세 유지' 입장에서 한 발 물러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 '농업 덮고 타결' 가능성 낮아
최근 일부에서는 농업 분야에서 시각차가 워낙 현격한만큼, 농업 쟁점을 아예 덮고 나머지 타결이 시도될 것이라는 추측까지 나오고 있다. 이른바 '빌트 인(built-in)' 방식으로 협정문 안에 추후 논의할 과제로 명시해두고 일단 협정을 마무리 짓는다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농업을 미해결 과제로 남겨두고 최종 타결에 이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정부 관계자들의 관측이다.
민 차관보는 "빌트 인 방식 처리는 현 시점에서는 논의가 전혀 이뤄질 수 없는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이라며 "농업의 경우 현재 충분히 협상이 가능한 사안이므로 빌트인과는 거리가 멀다"고 설명했다.
배 국장 역시 "그런 식(빌트 인)으로 다 할 수 있으면 협상 시한을 왜 두겠나"고 반문하며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더구나 농업에서 절대적 공세를 취할 수 있는 미국 입장에서 농업을 빼고 FTA를 체결한다는 것은 더욱 상상하기 어렵다.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만, 농업도 결국 막판 타협이 가능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도 적지 않다.
농촌경제연구원 최세균 박사는 "미국이 마지막에 요구 수준을 다소 낮출 가능성이 있다"며 "사실 쇠고기 뼈 수입 문제의 경우 5월 OIE 결정이 나온 뒤 다시 논의해도 되는 문제고, 미국이 지금은 관세 철폐 원칙만 내세우고 있지만 수입 쿼터 확보 등을 통해 보다 실익을 챙기는 쪽을 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민 차관보도 "타결 여부는 결국 통상장관들의 의지에 달려있다"며 "실무진이나 고위급 등에 비해 통상장관급의 타결 의지가 가장 강할수 밖에 없는만큼, 막판에 양측이 서로 신축성을 발휘해 이익의 균형점을 찾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리 정부가 협상 막판에 쌀과 쇠고기 검역 문제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주요 농산물의 양허 방안을 놓고 미국과 머리를 맞대고 어떤 묘안을 찾아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shk99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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