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방송국에 갔는데 갑자기 어수선 해지고 사람들이 스튜디오로 몰려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같이 있던 이들과 떼를 지어 몰려갔는데, 김명민이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층 아래층 옆 스튜디오에서 작가, 피디가 모두 몰려들었던 것이다. 김명민이 방송 출연을 잘 안하는데도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평소 자신이 즐겨듣던 프로라 출연했다는 것.
김명민은 <하얀 거탑>의 장준혁으로 연기자로써 확실하게 입지를 굳혔다. 사실 김명민은 SBS 공채 탤런트 6기 출신이다. 예전에는 공채 출신이면 스타 연기자로 가는 지름길이었지만 지금은 찬밥 신세다. 유명세만 타면 연기자가 아니어도 가수나 모델이 하루아침에 주연으로 발탁되는 풍토에서는 당연한 것 아닌가.
김명민도 하도 섭외가 안 들어와서 연기자 생활을 집어 치우했겠나. 그 찰나에 기회가 가까스로 왔고 <불멸의 이순신>에서 한이 서린 연기 펼쳤던 것이다. 그의 인기는 그간 김명민과 같은 배우를 치워두고 무엇을 했는가 하는 자괴심을 갖게 했다. 사실 SBS는 뽑아만 놓았지 좋은 일은 KBS(불멸의 이순신)와 MBC(하얀거탑)에게만 시켰다. SBS <불량가족>은 그에게 전혀 맞지 않는 코믹 캐릭터라 죽을 쑤어도 할말이 없었다. 새삼 신기한 일은 예전의 김명민이나 지금의 김명민이 같은 사람인데, 이제는 김명민에 대해서 엄청난 환상, 아우라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김명민의 장준혁이라는 인물은 특히 남성들에게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스튜디오에 출연한 김명민을 보러 달려간 이들 중에는 중간관리자들도 있었다. 실제로 드라마와는 거리가 멀던 40대들이 <하얀 거탑>에 열광했다.
장준혁은 야망을 가진 남성들, 성공 지향적인 사람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최도영보다는 장준혁이라는 인물이 남성 캐릭터의 현실성을 가진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남성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악당 캐릭터를 설정한 것은 적중했다. 장준혁이라는 악당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인물이기 때문에 인간적 연민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기자들이 많이도 지적했듯이, 어쩌면 우리 시대 남성들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직장인 남성의 표상이라고 까지 했는지 모른다. 과잉 해석하는 이들은 장준혁 현상은 노무현 대통령의 내용 없는 리더십에 염증을 낸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한편, 생각해보면, IMF 관리 체제 이후에 한국 사회가 맞고 있는 처세 성공 서적의 붐, 부자 신드롬의 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맥락이야 어찌되었든 긍정적인 현상만으로 묶을 수 없는 점도 있다. 이 때문에 단지 직장인의 비애를 다룬 점만 볼 수는 없다. 어느 피디가 그랬듯이 패거리, 보스 지향적인 한국 조직에서 계파 문화를 합리화 하는데 사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지적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중간 관리자가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기에 알맞고, 위안 삼기에도 최적이다. 실력만 있으면 음모와 계략, 배신, 공격, 파멸시켜도 된다는 식의 합리화도 <하얀 거탑>의 장준혁 때문에 가능해진다. 말단 사원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시선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장준혁 담론은 우리는 촛불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장준혁을 닮으려 하는지 모른다.
“꺼져라, 꺼져라, 곧 꺼질 촛불이여!
인생은 걸어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에는
무대 위에서 굉장한 존재인 듯이 떠들어대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가련한 배우에 불과하다.
그것은 바보가 떠드는
하나의 이야기, 소란으로 가득 찬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맥베드
김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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