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매체들은 정다빈 씨가 베르테르 효과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사회적 전염 현상이라는 측면에서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임을 곧 알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베르테르 효과’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영향을 받은 유럽 젊은이들의 연쇄 자살 현상을 이른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에게는 죽음을 안겨주었다. 1974년 미국의 사회학자 필립스(David Phillips)는 20년 동안 유명인의 자살이 언론에 보도된 뒤, 자살률이 급증했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러한 사회적 전염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스타가 연이어 죽는 현상은 베르테르효과가 아니라 우연의 일치이거나 사회적 전염현상이다. 검찰이 이은주씨 자살 이후 일반인들의 자살이 늘어났다고 통계를 밝혔을 때는 베르테르 효과가 맞다. 베르테르 효과는 문화적 아우라가 있는 대상을 따라서 죽는 일이다. 괴테라는 위대한 문호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을 따라 죽는 것은 낭만적이고도 타당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우월한 존재에 대한 동일시가 베르테르 효과에는 필수적이다. 공인이나 스타의 자살이 매우 중요 하게 여겨지는 이유이다.
하지만 많은 매체들은 유니 씨를 따라서 정다빈 씨가 죽었다는 비약적인 논지를 펴고 있다. 유니 씨에게 정다빈 씨가 문화적 아우라, 우월적인 경외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또한 자살 원인에 대해서 스타 시스템, 모호한 한국 사회에 귀인(歸因)을 전가하는 것도 아이러니 한 일이다. 이 때문에 기획사가 펄쩍 뛰었던 것이다. 의혹 가운데 하나는 대개 자살하는 사람이 자신의 집에서 죽는다는 사실인데 정다빈씨는 그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에서 마지막 길을 준비한다. 더구나 사람은 마지막 자신의 몸을 아무에게나 보일만큼 무책임하지 않다. 자신을 자학하는 사람이 아닌 바에 말이다. 지금까지 마지막 길을 간 스타들은 다른 곳에서 마지막 길을 가지 않았다. 대개 집이었다. 그러나 정다빈 씨는 집에 있지 않고 친구의 집에 있었다. 그렇다면 충분히 다른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 원인이라기보다는 개인적 관계의 문제일 수 있다. 이 때문에 타살 의혹이 불거졌던 것이다.
또 다른 쪽에서는 여자 연예인에 가해지는 가학성 상품화가 정다빈씨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물론 당연한 말이다. 이때문에 우리 모두가 다 공범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의 책임이라고 지적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이는 책임 주체의 희석일 뿐이다.
그렇다고 사회적인 요인이 없을 수는 없다. 인간의 사회를 이루는 동시에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한국이 자살률이 높은 것은 단지 사회적 스트레스나 노동의 강도가 높고,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이미 생존 문제 때문에 자살하는 사회적 단계는 벗어나 있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에 인간은 더욱 악착같이 산다. 그래도 존재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자존감, 명예, 사회적 지위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존재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의미가 사라진 것은 외부의 평가가 안좋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적 평가가 어떤 것인가에 따라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경우에 강박관념과 우울증은 심각해진다. 악플러가 기승을 부리고 그것에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악한 평가에 마음이 쉽게 흔들리는 토대가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나 강하다. 은둔형 외톨이가 한국과 일본에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사회적 평가에 개인의 존재감이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도는 연예인이나 스타에게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나 자신의 예술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평가에 의지하는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적 요인을 지적한다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긴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연예계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부나비처럼 단순환 화려한 인기에 달려드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은 이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점들을 보지 않는다면, 악플러가 모든 책임의 근원이라는 시각과 같이 모순을 키울뿐이다. 악플러는 외부 요인 중 하나일뿐 내부 요인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다빈 씨를 둘러싼 내부 요인에 대한 분석이 없이 외부 요인에 대한 전가만이 난무하는 것이 문제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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