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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명절, '설'은 다가오는데... |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민족의 대명절인 설이 3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15일 서울 청량리역 다일공동체 무료급식소에서 노숙인들이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jjaeck9@yna.co.kr/2007-02-15 13:38:41/ |
설 연휴가 코 앞으로 다가왔지만 들뜬 명절 분위기 속에서 더욱 외로움을 느끼는 이웃도 많다.
지난해 추석 연휴때 화마(火魔)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서울 송파구 장지동 `화훼마을' 주민이나 혼자서 힘든 겨울을 나고 있는 독거노인 등에게는 설이 오히려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낯선 이국땅에 들어와 어렵게 생활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잠시도 책상을 떠날 수 없는 고시생도 명절이 반갑지 않은 사람들중의 일부이다.
◇ 가난한 이웃들 "설 기분이요? 꿈도 못꿔요" = 장지동 화훼마을은 작년 추석연휴기간이었던 10월7일 새벽 갑작스런 불로 주거용 비닐하우스 41개동 가운데 35개동이 타 버리는 대형 화재가 일어난 곳이다.
현재 이 화훼마을은 새로 지은 조립식 주택들이 들어 서 있어 언뜻 보기엔 끔찍한 화마의 흔적이 지워진 것처럼 보였지만 곳곳에서 `어떻게 이번 겨울을 지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생활환경은 여전히 열악했다.
나무합판으로 만든 조립식 주택에는 차가운 외풍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천을 덮어놓은 광경이 종종 눈에 띄었고 공사가 중단된 집도 있었으며 전기나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집도 많았다.
특히 대부분 주민들의 마음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것으로 보여 취재기자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가족이라곤 손자 2명이 전부인 이옥순(80.여)씨는 16일 "설을 쇠는 것은 꿈도 못 꾼다. 작년 추석 연휴기간에 불이 났을 때 너무 놀라 마음의 병을 얻었다"고 했고 진진순(67.여)씨도 "지금은 경황이 없어서 설은 생각도 못한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황금순(60.여)씨는 "불이 난 뒤 집을 복구하는데 500만원 정도 들었다"며 "친척들이 100만원 정도를 빌려줬는데 우리가 또 돈을 빌려달라고 할까 봐 이번 설엔 오지도 않을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황씨는 설을 맞아 시어머니 제사를 지낼 예정이지만 제사 음식이라고 해봐야 냉동식품 몇 가지와 복지관에서 준 떡으로 끓일 떡국이 전부.
그는 "전체 마을중 복구된 가구는 90% 정도 이지만 내부가 엉망인 곳이 많다. 불난 뒤에는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많아 지금은 당시 주민의 70~80% 정도만 살고 있다. 사람들이 전부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명절에도 찾아올 사람이 없는 불우 독거노인들의 가슴에 쌓인 상처도 화훼마을 주민 못지 않다.
서초구 원지동의 지하 단칸방에서 혼자 사는 한양자(71.여)씨는 "설이 되면 손자와 손녀들로 북적이는 다른 집들의 모습이 너무 부럽다"며 "나는 그럴 일이 없으니 설에도 잠이나 자야지 별다른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오래 전 3살짜리 아이를 사고로 잃었던 한씨는 8년 전 남편과도 사별한 뒤 혼자 살면서 자궁암 등의 후유증으로 매일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생활보호대상자인 한씨는 "매일 복지관에 들러 점심을 해결한다. 하지만 설 연휴가 되면 노인들이 복지관 등 갈 데가 없어지기 때문에 더욱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서초구 도곡동의 4평짜리 지하 단칸방에 홀로 사는 김모(86.여)씨도 "동사무소에서 한 달에 30만원씩 주는 것 갖고는 설 음식을 따로 마련하기 어렵다. 명절에도 혼자 사는 노인들이 식사할 수 있도록 복지관에서 밥을 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 고시생ㆍ외국인노동자 "설은 딴세상 얘기" = 16일 서울 노량진과 신림동 일대 고시촌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틀 앞으로 다가온 설에 대해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고시생들은 식당이나 서점 등에 삼삼오오 모여 시험에 관한 얘기를 나누거나 고시 서적을 뒤적이는가 하면 설 연휴 특강을 들으러 학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4월에 예정돼 있는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문모(27)씨는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번 설은 가족과 함께 보내기 힘들 것 같다"며 "노량진 고시촌에는 추석이나 설 등 명절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작년 12월 군에서 전역한 뒤 곧바로 노량진 학원가로 들어온 박모(23)씨도 "고시원에는 설이 없다. 같은 고시원에 사는 고시생 가운데 80% 정도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을 것 같다"며 "명절에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는 것보다 빨리 고시에 합격하는 게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법ㆍ행정ㆍ외무고시 준비생들이 주로 모이는 신림동의 고시생들 역시 책상머리에서 설을 쇠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작년에 사법고시 2차시험에 떨어진 안모(28)씨는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이번 연휴에도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공부에 매진할 계획이다. 부모님을 뵙지 못하는 게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고시생 신모(27.여)씨도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뵙는 게 도리지만 연휴기간이 짧기 때문에 귀성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회사 일로 설 연휴에도 근무해야 하는 언니와 함께 서울에 남아 있기로 했다"고 말했다.
`코리안드림'을 찾아 온 외국인 노동자들도 명절과는 거리가 멀다.
작년 5월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한 몽골인 바터(26)씨는 설 연휴 계획을 묻자 "아무 계획이 없다. 고향에 부모님과 여동생이 있는데 설에 가족 생각이 많이 날 것 같다"며 이국생활에 대한 외로움을 털어놨다.
(서울=연합뉴스) firstcircl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