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당선인의 승리 원인에는 여러 이유들이 꼽히지만 그 중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대목이 바로 중도층의 마음을 잡았다는 데에 있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박 당선인은 이미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되기 전부터 당 안팎으로부터 표의 확장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줄곧 받아왔다.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불리는 40% 안팎의 고정표 외에는 태생적, 이념적 한계 때문에 중도층과 젊은층의 지지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논리였다. 실제로 민주통합당 이해찬 전 대표는 “박근혜 표 확장성이 크지 않아 이길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고, 정세균 상임고문 역시 “박근혜 중도층 표 확장성은 최악”이라며 미리부터 샴페인을 터트리는 듯한 오만한 태도까지 보여줬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민주적이라기보다는 권위적인 리더십이 시대에 맞지 않아 보였고, 늘 큰 격차로 앞서 달려 나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지율은 못이라도 박아 놓은 듯 특정 수치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박근혜 대세론이 압도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이렇듯 ‘박근혜 한계론’이 수그러들지 않았던 것은 박 당선인이 가진 확장성의 한계가 너무나 명확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박근혜라는 브랜드를 너무도 만만히 본 패착이었다. 막상 개표함을 열어보니 예상은 빗나갔고, 박 후보에 눈길도 주지 않을 것 같았던 2030세대의 3분의 1 가량이 박 후보를 지지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민주화 세대의 상징이라고 자부하던 386세대 맏형이 속한 50대는 압도적 지지로 박 후보 당선을 이끈 견인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10년 전 노무현 당선의 주역이 오늘의 박근혜 당선의 주역이 된 셈이다.
이런 ‘기적’이 일어난 첫 번째 이유는 안철수 현상을 제대로 녹여내지 못했던 민통당의 오판과 자만, 전략적 실패 때문이다. 게다가 당초 예상했던 것과 달리 안철수 효과는 단일화 특수로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민통당측 일각에선 역전까지 시간이 촉박했다며 좀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통당이 지금껏 보여준 모습을 본다면 한가한 변명에 불과한 얘기다. 이런 민통당의 자충수, 지리멸렬은 곧장 박 후보의 반사이익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이유로 박 당선인의 전략적 성공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에서 비대위 체제를 거쳐 새누리당으로 변신하고 그 과정에서 국민적 시선을 끌 수 있는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이 과정에 대한 필자의 가치판단은 별개로 정치공학적으로 대단히 효과적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박근혜의 승리는 보수의 승리 아닌 기존 보수시대의 종언을 의미
새누리당은 집토끼들의 반발에도 당의 정강정책에서 사실상 보수를 삭제하며 오랜 세월동안 당의 이미지로 굳어졌던 강한 보수색을 지웠다. 기민하게 김종인씨를 영입해 경제민주화를 선점했다. 국민통합을 외치며 날로 심화되는 정치적·경제적 양극화 현상을 해결할 세력이 자신들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갈 곳 몰라 중원에서 방황하던 이들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냈다. 그런 결과가 이번 대선의 성과로 이어진 것이다. 박근혜란 사람을 너무도 만만히 본 민통당의 그야말로 완패였다. 능력만 믿고 놀고먹다 세월 다 보낸 민통당 배짱이를 여름 내내 땀 흘린 개미 새누리당이 이긴 셈이다. 역시 노력과 희생 없이 달콤한 열매를 먹을 순 없는 법이다. 세상의 진리는 이렇듯 간단하지만 역설적인 교훈으로 늘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이런 과정들을 본다면 엄밀히 말해 박근혜의 당선을 보수의 승리라고 말하긴 어렵다. 새누리당은 선거과정에서 정치개혁 등의 대국민 공약과 약속을 통해 기득권 보수, 부패한 보수, 불통의 보수, 이념대결 지향의 보수를 버리겠다고 약속했다.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새로운 보수로 거듭나겠다는 것이지만, 실은 신보수를 포함한 거대한 자유주의 좌파정당을 약속한 셈이다. 보수의 입장에선 보수주의 포기선언과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국민은 새누리당의 약속을 선택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승리의 의미를 이정희와 NLL 논란,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나꼼수 등 지엽적인 사건에만 둬선 안 되는 것이다. 2030세대의 예상 밖 높은 지지, 50대의 새누리당 선택의 의미를 기존 보수진영이 걷던 폐쇄적 노선과 지향점을 선택한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박근혜 시대는 필연적으로 자기혁신해온 합리적 보수를 필요로 한다
박 당선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번 대선을 통해 보수진영도 야당과 마찬가지로 자기개혁의 숙제를 안게 됐다. 기존의 우물 안 보수로는 독자적으로 집권하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박 당선인이 내건 국민통합의 가치가 단순히 공약이 아닌 시대가 요구하는 필연적 과제라는 점에서 보수도 그동안의 무원칙한 태도와 비타협적이고 맹목적인 대결지향 태도를 버리는 환골탈태가 필요하다. 냉정히 말해 보수가 그간 해온 것이라곤 원칙과 가치를 버리고 한 인물의 성향을 적당히 추종해온 것 외에는 없다. 곧 펼쳐질 박근혜 시대를 맞아 보수가 찾아야 할 것은 원칙과 가치요 버려야 할 것은 맹목적 권력 추종이란 구태다. 자기 혁신을 끊임없이 해왔던 원칙적 보수의 가치는 국민통합의 시대에 오히려 더 강조 되어야 할 덕목이다.
그런 점에서 곧 맞이할 박근혜 정부, 여성 대통령 시대에서는 그간 보수의 자기혁신을 위해 노력해 왔던, 보수의 가치는 지키되 구태의 껍질을 벗기 위해 노력해왔던 인물들의 존재감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특히 다음 정부는 사회 양극화 현상을 빌미로 포퓰리즘으로 질주하게 될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을 현실에 맞게 적절히 제어해줄 합리적 보수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대북정책 변화를 공언한 박근혜 정부에서 적절히 방향을 잡아 주는 원칙적 보수의 필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폐쇄적 진영 논리를 앞세우기보다 일반 대중과 소통하는 겸손하고 현명한 보수가 절실하다. 박근혜 정부가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런 요소들은 좌파가, 권력 지향적 기회주의 보수가 결코 해줄 수 없는 ‘가치’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필자가 전원책 자유경제원장, 양영태 자유언론인협회장과 같이 가치를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혁신하면서 도전해온 보수주의자들을 손꼽는 이유다.
박근혜 정부는 박 당선인 스스로 소중히 하는 원칙과 가치로 국민통합에 나서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배제의 원리보다 통합의 원리가 기준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통합의 과정과 결과도 원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기준과 잣대가 호불호보다는 국민통합에 걸 맞느냐 맞지 않느냐가 돼야 한다. 다음 정부에서 심화될 국가위기를 헤쳐 나가는데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돼야 한다. 즉 국민 다수를 위한 통합이냐 패거리를 위한 통합이냐를 고려해야 한다. 박 당선인이 평소 자신의 소신대로 국정운영을 펼쳐가려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박 당선인이 이번 승리의 의미, 자신에게 주어진 국가적 과제, 시대적 요청을 생각한다면 현명하게 대처해 나가리라 본다. ‘박근혜 호(號)’는 이제 막 장대한 여정에 올랐다. 역사를 향한 순탄한 항해를 기원한다.
폴리뷰 편집국장 - 박한명 - (hanmyoung@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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