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진당 선거 부정 사건의 최대 수혜자로 유시민 공동대표로 꼽히고 있다. 유시민 대표는 당초에 이념과 노선도 다른 종북주사파 정당에 들어가서, 비주류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선거부정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친노종북 매체는 물론 보수우파매체로부터도 원칙적인 개혁인사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시민 대표의 과거 경력을 살펴보면, 현재의 사태와 매우 유사한 정치행태가 눈에 띈다. 구 민주당 시절부터, 비주류로서 타당에 접근하여, 구태를 폭로하여 당권을 가로채는 방식의 권력투쟁이다.
유시민은 2002년 10월 민주당 후보 노무현을 지키기 위해 “고래를 삼키는 새우가 되겠다”며 개혁당 창당에 나섰다. 오마이뉴스 등 친노 인터넷매체의 지원 아래 개혁당은 창당하자마자 무려 4만명의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한나라당 출신의 김원웅 의원을 당대표로 영입하여, 원내 정당이 되었다. 노무현 후보는 당선되자마자 민주당이 아닌 개혁당을 찾아, 유시민과 함께 축배를 맥주잔을 들었다.
그뒤 2003년 4월 유시민은 개혁당의 후보로 고양 덕양갑에 출마한다. 이 당시 유시민은 “절대 구태 정당인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는 없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워 개혁당 당원들의 지지를 받아내었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아 민주당의 송영길, 정동영 등은 민주당 후보를 사퇴시키며, 개혁당과 후보단일화에 합의한다. 개혁당의 당원들은 강력히 반발했지만 유시민은 특별히 해명하지 않고 유유히 당선되었다
유시민은 개혁당을 중심으로 한 친노신당 창당의 깃발을 내세웠고, 유시민이 움직일 때마다 민주당은 크게 흔들렸다. 특히 민주당 내의 신기남, 친노세력 내의 이강철의 활약이 돋보였다.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등 친노언론들은 연일 민주당의 구태를 비판하며 신당창당의 당위성을 역설하여 나팔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 급기야 2003년 8월 민주당은 크게 요동치며, 2003년 9월, 김근태, 이해찬, 문희상, 정동영, 신기남 등 42명은 민주당을 탈당 독립 교섭단체를 구성한다. 이들 외에도 한나라당에서 이부영, 김부겸 등 5명이 탈당, 이들은 2004년 1월 11일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정치적 대도박을 감행했다.
이들이 노린 것은 2004년 총선이었다. 유시민은 이에 이론적 기틀을 제공하며 “민주당의 이름으로는 절대 영남권에서 당선될 수 없다”는 점을 선동하여, 결국 신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노무현은 곧바로 민주당을 탈당, 민주당은 재집권 1년만에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유시민, 자신이 창당한 개혁당 죽이기 위해 온갖 술책 감행
여기까지는 당시의 언론보도만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법한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 언론이 한 가지 주목하지 않았던 것은 개혁당이다. 고래를 삼킬 새우가 되겠다는 개혁국민정당은 어떻게 되었을까?
2003년 10월 27일, 유시민을 비롯한 구 개혁당 집행부는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전자투표를 감행한다. 안건은 “우리 당은 신당에 전원 참여한다. 참여방법 및 전국당원대회 결과에 따른 법률적 절차 등은 전국상임위원회에 위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안건 자체가 위법이었다. 정당 해산에 관한 안건은 무조건 전당대회에서 결정해야한다. 그러나 그런 안건을 올리면 통과가 될 가능성이 없으니 신당참여를 안건으로 올려놓고, 그 방법까지 함께 물었던 것이다. 이미 유시민 등의 집행부에 불만을 갖고 있던 당원들이 집단 탈당한 뒤였지만, 투표에서조차 가까스로 이 안건을 통과시킨다. 그리고 이들은 불법으로 개혁당 해산을 선언한다. 이들의 횡포에 대해서 선관위는 개혁당 해산을 인정하지 않았고, 개혁당은 다수가 열린우리당으로 탈당한 뒤 2기 집행부 체제로 유지되었다. 즉 유시민은 정당법까지 어겨가면서 개혁당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이에 실패했던 것이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살아있되 정치적으로는 죽었다"는 유시민의 말처럼 개혁당의 숨통은 사실 상 끊어져 있었다. 구 집행부가 열린우리당으로 탈당한 이후 그간 그들의 우군이었던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신문은 개혁당에 대한 보도를 일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불법적 해산이 자행되었을 때조차 이에 대한 비판기사는 단 한 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유시민이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하면서 고래를 삼키겠다는 새우들의 정당 개혁당은 잊혀졌다. 이 과정에서 유시민은 일생 일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유시민세력이 떠난 개혁당을 살리기 위한 2기 집행부는 유시민이 개혁당의 자금을 유용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러나 이 사건도 곧 잊혀지고, 유시민은 노무현 정권 실세로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유시민에 배신당한 평범한 서민 개혁당원들에 대해서, 친노언론들은 어디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개혁당에 이어 열린우리당 해산 때도 유시민이 주도
그러나 이러한 유시민의 열린우리당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이해찬이 주도하여 열린우리당과 잔류 민주당은 대통합민주신당으로 합당하기로 합의한다. 문제는 여기서도 개혁당 때와 똑같은 문제가 남게 된다. 열린우리당에서 합당을 결의할 전당대회가 제대로 치러질 수 있냐는 것이었다.
개혁당 때는 전당대회를 통한 결의가 불가능할거라 판단한 유시민 세력이 전자투표라는 편법을 동원했으나, 선관위로부터 무효 판결을 받았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전당대회를 열어 재적 대의원의 과반수가 출석하도록 해야했던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2007년 8월 18일, 고양 킨텍스에서 전당대회를 개최, 전격적으로 열린우리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의 합당을 결의한다. 이 과정에서도 유시민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맹활약한다. 유시민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대선출마 출정식을 열며, 자신을 지지하는 열린우리당 대의원들을 대거 모았다. 당시 8월 17일 최고위원 회의에서 확인한 대의원 명부 5374명이, 그 다음날 전당대회 직전, 5200명으로 줄어드는데, 최고위원 회의는 개최되지도 않았다. 단 하루 사이에 대의원 174명이 사라졌는데, 이를 확인해야할 의무가 있는 최고위원회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참여 정족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체 대의원수를 전당대회 당일날 줄여버린 것이다.
이에 열린우리당 지킴이 등의 평당원들은 전당대회 현장에서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 건은 결국 법원에까지 넘어갔지만, 이미 결의된 사항이 뒤집어질 수는 없었다. 전당대회에서, 개혁당 출신의 김원웅, 그리고 김혁규 등등은 합당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반대 연설까지 했었다. 물론 이것이 정치적 쇼일 수는 있으나 100년 갈 정당이라 선전하여 기간당원을 모집한 당지도부로서 당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던 것이다.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한 유시민만큼은 단 한번도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대선출정식을 같은 장소에서 개최하여, 전당대회 표결 결의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로 출마, 결국 이해찬 캠프까지 들어간다.
유시민은 평민당 시절 이해찬 의원의 보과관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민주당의 구 민주계의 구태성을 누구보다 더 잘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2003년도 4월 재보선에서 자신이 창당한 개혁당원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민주당의 도움으로 국회에 입성한다. 그리고는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민주당을 맹공격하며 민주당을 분당, 열린우리당 창당의 주역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개혁당을 공중분해시켰고, 훗날 열린우리당도 없애버렸다.
구 민주계와 통진당 당권파, 유시민 거두었다가 똑같은 방식으로 당권 빼앗겨
이번 통합진보당 역시 유시민은 자신을 스카웃한 종북 당권파들의 폐단을 누구보다 더 잘알고 있었다. 이정희 공동대표가 북한 3대세습 질문에 침묵으로 버티며 비난을 받자 “3대세습 관련 질문은 던져선 안 된다”는 궤변으로 이 대표를 옹호하기도 했다. 선거 부정이 벌어지자 자파의 후보들의 순번을 뒤로 배치하면서까지 이 논란을 덮은 채 선거를 치르는데 앞장섰다. 그렇게 선거에서 13석을 얻은 후에는 무자비할 정도로 이정희 대표 등 당권파를 몰아붙이며 강기갑 비대위원장의 인천연합과 당권을 빼앗았다.
구 민주계와 통진당 당권파에 접근하여 권력을 빼앗는 방식은 9년의 시차를 두고 흡사 데자뷰처럼 유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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