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의 진짜 재미는 선거가 끝난 후에 벌어지는 진풍경에 있는 것 같다. 선거 전엔 사뭇 비판적이었던 보수언론이 끝나자마자 새누리당 박근혜 위원장에 아부성 찬사를 늘어놓는 모습하며, 선거 전엔 원내1당은 따 놓은 당상처럼 여기고 막가파식으로 기세등등하더니 선거 후 풀이 죽어 있는 좌파진영 모습들이 그렇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누가 뭐래도 가장 재미있었던 대목은 정치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는 고전을 그대로 재연이라도 하듯 절묘한 줄타기의 진수를 보여준 김무성 의원의 ‘구국의 결단’이었다. 한때 박 위원장과 대립각을 세우며 ‘탈박’을 자처하더니 이젠 박 위원장과 함께 나란히 19대 총선 주·조연의 평가를 받고 있다. 단지 박 위원장을 비판했다고 돌덩이를 던지던 친박 지지자들은 이제 그를 애국자로 떠받든다. 배신자가 몇 달 사이에 영웅으로 거듭났다. 도대체 어딜 가면 이런 재미있고 엽기적인 장면을 또 구경할 수 있을까 싶다.
박근혜를 배신한 자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혀 있던 김무성 의원이 완벽히 박근혜당으로 재탄생한 새누리당에서 차기 당 대표감으로 거론된다고 한다. 공천에서 탈락한 그가 무소속이라도 출마했다면 부산경남에서 새누리당의 성적은 형편없었을 것이고, 그의 공천승복과 백의종군 선언이 낙동강전선을 지켰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사람들은 김 의원이 최소 10석은 건졌다고 평가한다고 한다. 공천파동 당시 탈당이 예상됐던 김 의원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우파 재집권은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 내가 우파 분열의 핵이 돼선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웠었다. 그렇다면 김 의원의 백의종군 선언은 과연 우파를 결집시켰고, 우파재집권에 청신호를 준 사건이었나?
박근혜 ‘여당내 야당’ 정치계산 비판하며 보수우파 박수 받았던 김무성의 애국행보
김 의원이 과거 박 위원장을 겨냥해 했던 비판 발언들을 보자. 그는 박 위원장이 세종시 원안 고수를 고집했을 때 "국가 백년대계를 놓고 생각할 때 잘못됐다고 생각되면 잘못을 국민 앞에 고백하고 사죄하고 잘못된 법은 반드시 바꿔야 한다는 게 소신"이라며 "12년간 국회의원 생활을 해봤는데 반대할 때 당당히 나서 반대하지 못해 참 후회한 일이 많았다. 예를 들면 세종시 같은 경우가 그렇다"고 말했다. 또 "16대 국회 말 한나라당에 충청도 국회의원이 많았고 '제발 선거를 치를 수 있게 해달라'는 동료 충청도 의원들 호소에 어쩔 수 없이 그 법에 찬성했다"며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한다"고도 했다. 지금 김 의원의 입장은 무엇인가? 잘못된 법은 반드시 바꿔야 한다는 정치철학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지 궁금하다.
동남권신공항 문제도 김 의원은 박 위원장과 정반대 의견을 보였었다. 정부의 동남권신공항 백지화 방침을 박 위원장이 비판하자 당시 원내대표였던 김 의원은 "공약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를 바로 잡는 게 진정한 애국이자 용기"라고 했다. 또 "이번 동남권 신공항 문제는 잘못된 공약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를 공약으로 내건대 대해 사과하는 한편 정부에서 모든 수치를 내놓고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밝혔었다. 한나라당이 친이친박 갈등으로 위기에 놓였을 때도 김 의원은 박 위원장을 향해 "대통령의 잘 한 것은 협조를 하고 잘못한 것은 비판을 하고 시정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철저히 외면해 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뿐인가. 이렇듯 정부와 친이가 주도했던 과거 한나라당의 정책과 정치적 입장에 대해 사사건건 반대만했던 박 위원장을 향해 그는 "(박근혜 전 대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과 사고의 유연성이 부족하다. 이것을 고쳐야 한다고 나는 충정으로 말했는데, 박 전 대표를 군주처럼 모시려는 못난 사람들은 ‘주군한테 건방지게···’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민주주의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박 대표와 친박세력을 향해 직설적인 비판까지 아끼지 않았다. 더 나아가 김 의원은 “거기서 안 알아주니까, 이 결정적 문제를 고쳐서 박 전 대표를 훌륭한 대통령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욕을 이제 거의 소진해 버렸다”고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포기선언까지 한 바도 있다.
김 의원이 이렇듯 과거 박 위원장을 비판하며 보여준 정치적 소신은 우파진영의 의견과 대부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명박 정권과 대립각을 세워야 한다는 대권플랜 차원에서 정치적 이해득실 따져 ‘여당내 야당’ 행보를 해온 박 위원장과 달리, ‘탈박’ ‘팽박’을 각오하고 앞장서 박근혜 진영에 쓴소리를 했던 김 의원에게 우파진영은 박수를 보냈던 것이다. 친박진영으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각오하고 펼쳤던 그의 소신행보가 적어도 당시에는 박 위원장보다 훨씬 더 애국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19대 총선 통해 드러난 김무성 애국행보의 실체는 ‘기회주의’와 ‘처세술’
그러나 김 의원이 19대 총선에서 보여준 행보는 어땠었나. 원칙을 잃은 공천, 보복공천이란 비판이 끊임없이 나오는데도 김 의원은 침묵했다. 과거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박근혜 전 대표를 한나라당을 위기에 빠뜨린 인물로 꼽으며 비판했던 그런 소신과 철학은 종적을 감추었다. 과거 친이계가 저지른 잘못을 되풀이하며 친박이 권력을 잡은 당이 공천학살 할 동안, 박 위원장이 민주주의 정신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당을 사당화할 동안 침묵하다가 그는 느닷없이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우파가 분열하면 안 된다고 치고 나왔다. 자신의 공천탈락이 기정사실화 되었을 때 우파 분열을 불러올 공천이 안타깝다고 한 말 외에 도대체 김 의원이 우파 분열을 막기 위해 한 일이 뭐가 있냐는 말이다. 박 위원장의 새누리당이 보수를 삭제하고 경제민주화라는 정체불명의 개념을 들고 나와 우파를 분열시켰을 때, 새누리당이 민주통합당을 흉내내며 좌클릭 포퓰리즘으로 따라갈 때 그렇게 우파분열을 외치던 정치인 김무성은 어디에 있었냐는 소리다.
김 의원이 ‘백의종군’이라는 절묘한 처세술을 들고 나오면서 한 일은 뭔가? 보수성향 후보들의 단일화 요구였다. 새누리당이 버린 보수를 살려보겠다고 나선 신당 국민생각의 싹을 밟는 것이었고, 비록 지역정당의 한계를 벗지 못했지만 따뜻한 보수를 해보겠다는 자유선진당의 남은 가능성과 명줄을 뭉개는 발언이었다. 김 의원의 보수단일화 요구가 박근혜 위원장의 총선 성적을 위한 부역이 아니었다면 김 의원은 왜 세종시에서 자유선진당 후보에 뒤지던 새누리당 신진 후보의 사퇴를 직접 요구하지 못했나?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만일 새누리당 후보가 사퇴했더라면 더 경쟁력이 뛰어나고 지지율이 높았던 자유선진당 심대평 후보가 노무현 정권2인자였던 이해찬 전 총리를 이겼을 가능성이 높다.
보수우파의 가치를 그렇게 역설했던 김 의원이 요구한 보수단일화와 우파분열 경계론은 이렇게 철저히 새누리당과 박근혜 위원장만을 위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낙동강전선 사수란 언어프레임도 보수우파의 가치를 지키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오직 박 위원장이 부산경남을 얼마나 사수할 수 있느냐, 그에 따라 대세론에 탄력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만 중요했던 문제였다. 이런 김 의원의 행보를 ‘백의종군’이라 부른다면 이순신 장군과 같은 위대한 영웅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백의종군이란 표현 자체를 더럽히는 일이다. 애국자와 기회주의자 사이를 절묘하게 줄을 타며 배반자 신세에서 당 대표감으로까지 치고 올라간 김무성 의원의 행보는 ‘백의종군’ 사례가 아니라 성공한 처세술 목록에 기록돼야 마땅하다. 박 위원장과 전혀 다른 정치소신을 밝혔던 그가 앞으로 어떻게 절묘하게 말을 바꿔가며 박 위원장의 정치소신을 충실히 따를 것인지 지켜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총선의 진짜 재미는 지금부터다.
폴리뷰 대표필진 - 박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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