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옛날부터 남해에서 섬진강을 거슬러와 선량한 백성들을 학살하며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들을 막기 위해 호남 내륙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구례군 토지면(土旨面) 송정리(松亭里)에 있는 석주관(石柱關)과 동해마을에서 건너는 잔수진(潺水津)이라는 2개의 요해처를 가지고 있는 구례는 1498년(연산군 4년) 연산군으로부터 역모의 땅으로 몰려 사라질 위기에 처한 구례를 지켜냈을 만큼 매우 중요했다.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호남은 나라를 지키는 울타리다. 만약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도 없을 것이다.”라고 확신한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국가의 보루인 호남을 지키기 위해 지목한 저 유명한 석주관 전투에 잘 나타나 있다.
구례 석주관 석성(石城)과 섬진강 1597년 11월 1,000여 명의 의병과 150 여 명의 화엄사 승병(僧兵)들이 여기 석주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하동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오는 적장 요시히로(의홍(義弘))의 대군을 맞아 결사항전 끝에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며 옥쇄(玉碎) 항전의 역사를 피로 새겼고, 훗날 사람들은 이 의로운 충혼의 넋을 기리며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이 강을 일러 “혈류성천(血流成川) 위벽위적(爲碧爲赤) 피가 흘러 강이 되니 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는 혈천(血川)이라 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1597년 11월 1,000여 명의 의병과 153명의 화엄사 승병(僧兵)들이 북에서 남으로 치달아온 지리산과 남에서 북으로 달려온 백운산의 험준한 산세가 협곡을 이룬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석주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경남 하동(河東) 방면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오는 적장 요시히로(義弘(의홍))의 대군을 맞아 결사항전 끝에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며 옥쇄(玉碎) 항전(抗戰)의 역사를 피로 새겼다,
훗날 사람들은 시산혈해를 이루며 산화한 이 의로운 충혼들의 넋을 기리며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강의 이름을 “혈류성천(血流成川) 위벽위적(爲碧爲赤) 피가 흘러 강이 되니 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 하여 혈천(血川)이라 하였는데, 의병과 승병들이 죽어 핏물이 강을 이룬 역사를 혈천(血川)으로 새긴 구례군 토지면(土旨面) 송정리(松亭里) 석주관 전투는 섬진강 방어의 중요성을 잘 대변해 주는 것이다.
석주관 칠의사 묘역 “정유전망의병추념비(丁酉戰亡義兵追念碑)” 1805년(순조 4) 나라에서는 7의사에게 각각 관직을 추증하였고, 1946년에는 지방 인사들이 칠의각(七義閣)을 짓고 영모정(永慕亭)도 지어서 기념하기에 이르렀지만, 2009년 3월 7일 자료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구례읍 조휴봉 선생과 함께 찾아본 오후의 석주관은 찾는 이 하나 없는 잊혀져버린 슬픈 땅이었다. 혈류성천(血流成川)으로 대변되는 명문은 추념비 후면에 새겨져 있다.
다음은 정유재란 당시 순국한 석주관 칠의사(七義士) 묘역 우측에 세워진 “정유전망의병추념비(丁酉戰亡義兵追念碑)” 후면에 글을 새기고 붉은 경면주사(鏡面朱沙)를 넣어 의병들의 단심(搗)을 전한 명(銘)이다.
위국응모(爲國應募) 나라를 위한 부름에
승려하택(僧侶何擇) 승려들인들 어찌 가리겠는가.
혈류성천(血流成川) 피가 흘러 강이 되니
위벽위적(爲碧爲赤) 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
위주망신(爲主㤀身) 임금을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은
여대지직(輿儓之職) 신하된 자의 직분이다.
편석추명(片石追銘) 돌 조각에 옛 일을 새기노니
천추불륵(千秋不泐) 천추에 길이 남으리라.
석주관 “정유전망의병추념비(丁酉戰亡義兵追念碑)” 후면에 새겨진 명문피아골은 “피가 흘러 강이 되니 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하여 지어진 “혈천(血川)”을 순 우리말로 풀어낸 것으로 “피내골”이라는 참으로 가슴 아픈 석주관 순국의 역사가 세월에 묻히면서 변형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흔히 말하는 피아골은 정유재란 당시 정토를 침략하는 왜구들에 맞서 순국(殉國)한 의병과 승병들의 항전으로 “피가 흘러 강이 되니 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하여 지어진 “혈천(血川)”을 순 우리말로 풀어낸 것으로 “피내골”이라는 참으로 가슴 아픈 석주관의 역사가 세월에 묻히면서 변형된 것이다.
조선시대 민관(民官)의 기록에 “직전동(稷田洞)”이라 하였을 뿐 속칭 피아골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없고, 구례 봉성지 절의편(節義篇)에 석주관 순국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하면서 끝에 “후인명기전처왈혈천(後人名其戰處曰血川) 후인들이 그 전투가 벌어진 석주관을 일러 혈천(血川)이라 한다.”고 기록하였으니, 피아골은 혈천 즉, 피가 흘러 내를 이룬 순국의 역사가 우리말로 변한 것이 맞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석주진(石柱鎭) :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남쪽과 북쪽이 모두 큰 산이고 가운데에 큰 강이 있다. 고려 말년에 진(鎭)을 두고 왜(倭)를 막던 곳이나 지금은 다만 옛터만 있다.” 하였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석주관 : 동쪽으로 25리에 있으며, 좌우로 산세가 험하고, 강변에 길이 있는데, 사람과 말이 가까스로 지난다. 북쪽에는 커다란 협곡이 있고, 그 안에 수십 리의 긴 강이 있다. 고려말기에 왜구를 막기 위하여 강의 남북 쪽 산에 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성터만 남아 있다. 여기에서 호남과 영남으로 나누어진다.” 하였는데, 이 가운데 “북쪽에는 커다란 협곡이 있고, 그 안에 수십 리의 긴 강이 있고. 여기에서 호남과 영남으로 나누어진다.” 한 것은 지금의 피아골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석주관과 피아골이 하나임을 말하는 것이며, 석주관의 기록이 곧 피아골의 기록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어리석은 이념에 사로잡힌 일부 식자들 특히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문학이라는 미명으로 이 가슴 아픈 “피내골” 순국의 역사를 지주(地主)들의 수탈과 1948년 10월 20일 여ㆍ순반란사건을 일으켜 섬진강 유역을 유린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하고 6ㆍ25 당시 후방을 교란 마을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한 지리산 빨치산들을 미화하는 역사로 왜곡하고 날조(捏造)하여 버렸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하루속히 피아골의 역사를 4백 년 전 강토를 침략하는 수많은 왜적을 맞아 시산혈해를 이루며 순국한 이름 없는 의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미래의 교훈으로 삼는 의로운 정신문화계승으로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끝으로 부연하면 피아골 연곡사는 고충신(高忠臣)이라 부르며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을 이끌던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선생이 의병들의 본영 즉, 본부로 삼아 머지않아서 되돌아온다는 주역(周易) 24 지뢰복괘(地雷復卦) 초구(初九)에 나오는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쓴 태극기를 군기로 세우고 활동하다 1907년 10월 16일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일제의 군과 경찰의 공격을 받고 부장 고제량 이하 25~26명과 함께 전사한 호국의 성지다.
고광순 선생이 연곡사를 본부로 삼은 것은 산중 깊숙이 은거할 수 있는 전략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연곡사 밤나무는 1745년(영조 21)부터 왕실의 신주목(神主木 : 종묘(宗廟)에 역대 왕들을 모시는 위패로 사용하는 밤나무)을 봉납하는 곳으로 지정되어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상징성이 있었다. [데일리안 광주전라=박혜범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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