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는 부족..법의 심판 상징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숭례문이 방화로 소실되자 세간에는 광화문 복원을 위해 그 앞 해태상을 다른 곳으로 치워놓는 바람에 화재가 났다는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런 풍문은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마저 화마를 만나자 더욱 힘을 얻어 급기야 해태상을 제자리에 옮겨 놓든지, 그 대용품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게 만들었다.
광화문 발굴조사를 맡고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측은 "요즘 해태상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말했다.
상상의 동물인 해태가 정말로 화기(火氣) 진압과 관계 있을까? 있다면 근거는 무엇일까? 만약 근거가 없거나 부족하다면 그 출처는 어디일까?
국내 기업 이름으로도 익숙한 해태는 원래 이름이 '해치'. 그 태생지는 고대 중국이며 등장한 시기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만을 토대로 한다 해도 2천년을 거슬러올라간다.
후한시대 경학자이자 문자학자인 허신(許愼)이 서기 100년에 완성한 한자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해치를 "길짐승이다. 그 모양은 소와 비슷하며 뿔은 하나다. 옛날에는 소송이 일어났을 때 (소송 당사자 중)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집어내는 명령을 수행했다"(獸也, 似牛, 一角. 古者訴訟, 令觸不直者)고 설명했다.
이와 비슷한 기술은 같은시대 다른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원서는 이미 망실되었으나 다른 문헌에 여러 구절이 산발적으로 인용되어 전하는 후한 화제(和帝)시대 사람인 조양부(朝楊孚) 저술인 '이물지'(異物志)에는 "(해태는) 성질이 구부러진 것과 곧은 것을 잘 분별하니 사람이 다투는 모습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집어낸다. 또, 사람이 다투는 소리를 들으면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씹어먹는다"고 했다.
같은 후한시대 왕충(王充)의 논설집인 논형(論衡) 중 시응(是應) 편이라든가, 각종 신비로운 일을 기록한 소설류인 신이경(神異經)에도 비슷한 기술이 관찰된다.
이보다 시대가 더 앞선 기원전 2세기 중ㆍ후반 무렵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자기집 식객(食客)들을 필진으로 동원해 완성한 회남자(淮南子) 중 주술훈(主術訓)에서는 해치와 관련한 중대한 언급이 보인다.
즉, "초(楚)나라 문왕(文王)이 해치관 쓰기를 좋아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본받았다"고 한 대목이 그것이다.
이에서 발전해 후한시대의 해치관은 마침내 법률을 관장하는 관리들이 머리에 쓰는 독특한 복식으로 발전한다.
중국 25사 중 현존하는 후한서(後漢書) 120권은 흔히 남조 송(宋)나라 시대 범엽(范曄)의 저술로 알려져 있으나, 제도문화사와 관련되는 항목인 지(志) 30권은 서진(西晉) 때 사람인 사마표(司馬彪) 저술이다. 이런 지를 구성하는 편명 중 하나가 관리가 직급별로 탈 수 있거나 입을 수 있는 수레나 복식 규정을 다룬 여복지(輿服志). 여복지는 분량이 많아 상ㆍ하로 돼있다.
이 여복지 하(下)를 보면 "법률을 관장하는 관리는 이것(법관.法冠)을 쓰는데, 이를 일러 해치관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했다.
나아가 그 모양에 대해서는 '철주권'(鐵柱卷) 즉, 쇠기둥을 둘둘 감아서 말아 올린 모양이라고 했다.
이런 모양은 틀림없이 해치는 뿔이 하나라는 설문해자 언급과 같은 맥락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해치는 고고학 발굴조사 결과 후한시대 유적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해 서울역사박물관이 개최한 '중국국보전'에도 중국 간수(甘肅)성 주첸(酒泉)시 샤허칭(河淸) 18호 고분 출토 후한시대 청동 해치상(간수성박물관 소장)이 선보이기도 했다.
이런 특성에서 말미암아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해태상은 법률을 관장하는 정부 부서나 그 관리를 상징하는 장식물로 자주 애용된다. 조선시대 감사원에 해당하는 사헌부 앞에는 해태상이 안치됐고 그 장관인 대사헌은 관복 흉배에 해태를 장식했다.
그렇지만 이런 해태가 화기를 제압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그 흔적을 좀처럼 찾기 어렵다. 같은 맥락에서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운 이유가 이와 관련된다는 기록도 없으며 대신, 1864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이세욱이라는 뛰어난 석공에게 해태상을 만들도록 했다는 기록 정도만 나온다.
그럼에도 해태가 화기를 막아준다는 통설이 광범위하게 유포된 까닭은 풍수학 혹은 민속학에 종사하는 전문연구자들이 그렇게 주장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연구자에 포함되는 한 민속학자는 "어디에 그런 근거가 있냐고 대라면 댈 수가 없지만, 숭례문의 간판을 세운 것과 같은 이유로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안치한 것도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함이라는 풍수학적 견해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광화문 해태상은 식민지시대에 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이 청사 앞으로 옮겨지는 등의 곡절을 거쳐 3공화국 때 광화문 앞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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