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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민주투사 PD의 감동적인 고군분투기

비판을 관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없나

얼마 전 방송을 끝내고 있을 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미녀들의 수다>를 담당하고 있는 피디라고 했다. 이름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이름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었다. 상대는 내 이름을 알고 있지만, 나는 상대방의 이름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곧바로 “우리 프로그램이 왜 개념이 없는데”라고 반말 모드로 들어갔다. 얼마 전에 인터넷 매체에 쓴 글에 대한 분노에 찬 열정적인 항의가 이어졌다. 거의 욕에 가까운 말들의 결론은 왜 <미녀들의 수다>에 대해 개념 없이 비판했느냐는 것이었다. 좀 알고나 쓰라는 말이다.

정말 이 전화는 고마운 전화였다. 대개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비판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짖어라 나는 간다.’는 식이지 않은가. 그런데 곧 고맙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몇 주 전에 <미녀들의 수다>를 다루었던 같은 방송사의 옴부즈맨 프로그램에도 모욕을 주었고, 그 프로에 출연했던 기자에게도 욕설에 가까운 말들을 쏟았으며, 취재 거부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문의했던 방송인들은 그러한 피디와 상대도 하지 말라고 했다. 더구나 글의 골간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에 대한 비판에 관심이 있었다. 아니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공격하는 것이 민주 투사와 같은 행동으로 여기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고마워해야 하는 말도 있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평론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 때문이었다. 물론 덤으로 “그딴 식으로 글을 쓰려면 쓰지 말라”고 했다. 이러한 말은 수명을 연장시켜줄지 모르기 때문에 감사했다. 욕을 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아쉽게도 그 피디님에게서 평론가로 인정받으려고 한 적은 없다. 평론가로 생각하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감사하게도 평론가가 아니라는 딱지를 붙였던 최초의 공인이었다. 이날의 황송스러운 일을 다른 가수 분에게 이야기 했더니 평론가는 대중들이 인정하는 거라고 했다. 나르시스트들은 자신의 판단 기준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인정 여부는 다른 이들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제작진에게 인정받으려고 글을 쓴다면 달콤하게 발라주는 글만 도배질 할 것이다. 물론 이런 글들에는 고무되어 흡족할테고 전화질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담당 피디가 더 고마웠다. 최소한 담당 CP님 보다는 덜했으니 말이다. CP님과 같이 “그래 평생 그렇게 살아라.”라는 영광스런 저주를 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쓰레기 취급을 받았으니 고마운 일이다. 쓰레기는 세상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거름이 된다. 더구나 가배올로지(garbology)에 따르면 쓰레기를 통해 그 사회와 사람을 알 수 있으니, 전혀 효용이 없지는 않다. 다만, 쓰레기 같은 평론을 쓴다고 해도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욕설에 가까운, 감정적인 단어를 내쏟지는 않는다. 글을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 적은 있어도, 그 사람의 직접 귀에 대고 인격 모독과 명예 훼손을 하지는 않는다.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을 할지언정, 그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에 대해서 욕설을 하지는 않는다. 글에 대한 비판은 글 자체에 하는 것이지 사람에 대해서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악플을 강력하게 퇴치하겠다는 충정에서 투사와 같은 행동을 보이는 것도 좋지만, 적어도 악플은 글이나 콘텐츠에 달지 사람에 달지는 않는다. 나르시스트들은 자신이 만든 것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글을 쓴 사람에게 대한 공격을 하는 경향이 있다.

글로벌 시대에 세계인들이 어떻게 우리를 바라보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반영하는 프로그램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프로그램은 대표성을 가질 수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여성 중심 출연 프로그램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이방인은 여성들만이 있지는 않으며, 20대 중심의 젊은 여성들만도 아니므로, 그들이 표준이 될 수도 없다. 그것도 서구 백인 여성들이 중심은 아니다. 더구나 예쁜 여성, 주로 미혼 여성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 있는 외국 여성들은 대개 백인 여성보다 황인종이 많다. 한국 거주의 외국 여성을 반영한다면 아시아권이 많아야 한다. 아찔해라~ 그녀들은 하나같이 각선미를 자랑한다. 계단식으로 의자를 배치해, 그들의 몸 전체를 드러내는 데 치중하는 것도 그들의 정신의 세계와 일치하지 않는다. 본래 그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겠다는 프로그램인데 말이다. 따라서 성의 상품화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토크는 옵션인가.
더구나 그들이 말하는 내용이 온전히 그들의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연출과 대본 구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본래 그들의 의견은 한국인의 시각으로 선별되고 걸러질 수밖에 없다. 따끔한 비판보다 재밌는 흥미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제작진의 감정적 비판에 대응해 똑같은 잣대로 말해보자. 그 미녀들이 글로벌 시대를 세계를 대표한다면, 제작진은 세계 여러 나라를 다 가보고, 그 나라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 더구나 그녀들이 각 나라나 다른 문화권의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지 모호하다. 표본 추출의 대표성이 불확실하다. 시청자들은 마치 그녀들의 견해가 외국인 혹은 그 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의견인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이것은 또 다른 편견이나 착오를 낳을 수 있다. 정말 글로벌 시대에 이방인의 견해를 반영한다고 하면 ‘객관주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표본 추출과 패널의 구성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개념 없는 프로그램이 된다. 물론 최종 초점은 프로그램에 비판이 아니라 방송의 공영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다. 프로그램 비판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이유다. 비판을 왜 객관주의와 균형주의에 따라 하지 않았는가가 아닌 것이다. 어쨌든 노이즈 마케팅으로 시청률 확보에 성공했으니, 노이즈 전략의 모범 사례가 된 셈이다.

이렇게 말을 하면, 즐거워진다. 감사의 전화를 받아 고마운 말을 신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판하고 전화를 받는 일이 이렇게 고맙고 즐거운지는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민주 투사 피디님을 많은 피디들이 본받았으면 좋겠다. 이러다 보면 방송프로그램이 더 좋아지고, 방송의 공영성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눈물이 나온다. 감각적인 프로그램은 주목을 받아도 비판하는 비평은 주목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욕 먹기 쉽고, 원고료도 떼먹히기 바쁘며 지면을 삭제 당하고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 하지만 방송제작자는 비판을 받아도 프로그램을 계속 만들며, 달마다 공기업에 준하는 연봉을 받을 것이고, 퇴직금도 받을 것이니 말이다.

김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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