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조작 600억 빼돌리고 940억 백지수표 위조한 혐의
수표 사용도 못한 채 공사판 전전 "너무 힘들어 자수"
6년 전 거액의 공금을 빼돌리려다가 미수에 그쳤던 한 은행원이 힘든 도피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수의 길을 택했다.
5일 서울 서초경찰서에 따르면 2001년 9월 경기도 부천시 소사동의 한 수협 지
점에서 대리로 근무하던 이모(43)씨는 먼 친척뻘 되는 유모씨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50억원을 주겠다'는 내용의 범행 제안을 받았다.
전산망 조작을 통해 은행 돈 600억원을 유씨 등이 개설한 통장으로 몰래 입금해
주면 이 돈을 인출해 함께 나눠갖자는 것이 유씨의 제안이다.
적은 월급과 회사 처우 등에 불만이 많았던 이씨는 흔쾌히 범행에 동참할 것을
수락한 뒤 같은 달 27일 오전 출근하자마자 지점에서 관리하던 고객 돈 500억원과 1
00억원을 유씨 등이 개설한 2개의 타 은행 계좌로 각각 입금했다.
이씨는 직장 동료들 몰래 백지수표 37장을 훔친 뒤 지점장 직인을 찍어 30장은
30억원권으로, 5장은 1억원권으로, 나머지 2장은 25억원권과 10억원권으로 만들었고
업무상 보관 중이던 공금 1억9천만원까지 챙겨 유유히 지점을 나섰다.
그러나 유씨 등 일당 4명은 이날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은행에서 일단
100억원을 인출하려다 한꺼번에 거액을 찾으려 한다는 점을 수상히 여긴 은행 직원
들의 신고로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유씨 일당이 미리 마련해 놓은 광주의 한 도피처로 먼저 내려가 있던 이씨는 경
찰이 신속하게 수표 발행정지 처분을 해놓는 바람에 940억원의 위조 수표를 사용해
보지도 못한 채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광주와 부산, 고향인 충남 홍성 등을 떠돌며 일용직 노동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
는 생활을 해온 이씨는 그 동안 체포될 것을 걱정해 가족을 찾아가지도 못하고 가끔
전화통화만 해왔다고 경찰은 전했다.
그러던 중 이씨는 1월2일 숙소인 홍성의 한 모텔에서 고향 친구와 술을 마시다
"도망다니기 너무 힘들다. 이제는 자수하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놨고 이내 친구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에 순순히 체포돼 5년 넘게 지속된 도피생활에 마침표를 찍
었다.
이씨는 경찰에서 "이런 일을 저지르고 도망다녀서 죄송하다"며 순순히 범행 일
체를 털어놨으나 공금 1억9천만원을 횡령했다는 혐의는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날 이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와 절도 등의 혐의로 구속했
다.
(서울=연합뉴스) 강건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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