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유용욱 주필 |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나들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던 2009년 이후 약 16년 만의 장면이다. 외환시장에서 이 숫자는 단순한 환율 레벨이 아니다. 글로벌 시장이 특정 국가의 리스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압축해 보여주는 지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이어지는 고환율은 ‘일시적 변동성’이라는 말로 가볍게 넘기기엔 결코 만만치 않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환율은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2022년 가을,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서자 당시 야당 대표였던 이재명 현 대통령은 “국가 경제의 적신호”, “외환위기 수준의 심각한 상황”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1400원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넘어서는 안 될 선’이었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당시 정부의 경제 운용에 있다는 게 야당 주장의 요지였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곡절 끝에 정권은 바뀌었고, 환율은 더 높아졌다. 이미 1450원은 넘어섰고 이젠 1500원을 넘나들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정부 당국의 설명은 “글로벌 요인”,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 “달러 강세”라는 설명이 반복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과거에는 ‘변명’이라던 말들이 이제는 정부를 대변하는 공식 언어가 됐다.
물론 당시와 지금은 외환보유액 규모, 금리 환경, 글로벌 유동성 조건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환율 급등에는 분명 외부 요인이 크다. 미국과 이란을 둘러싼 중동 정세,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 국제유가 폭등, 안전자산 선호에 따른 달러 쏠림 현상까지. 이 모든 요소는 원화 약세를 자극하는 현실적인 변수임은 틀림이 없다. 한국은행 역시 “글로벌 달러 강세 국면 속에서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분석 역시 내용 자체로는 틀리지 않다.
그러나 정치권의 언어는 그러한 조건 차이를 설명하기보다는, 환율이라는 숫자 자체를 위기의 기준선으로 사용해 왔다. 결국 문제는 ‘사실’이 아니라 ‘태도’다. 같은 외부 요인을 두고서, 야당일 때는 ‘무능의 증거’로 규정하고 여당이 되자 ‘불가피한 환경’으로 설명한다면, 시장은 그 말을 정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장이 눈여겨 보는 것은 ‘말의 정합성(整合性)’이 아니라 ‘기준의 일관성(一貫性)’이다.
환율 1500원이 갖는 의미는 이제 실물로 번지고 있다. 가장 먼저 체감되는 것은 기름값이다. 국제유가가 오르지 않더라도 환율이 상승하면 원화 기준 수입 단가는 즉각적으로 반영된다.
여기에 중동 리스크로 유가 급등 현상까지 겹치자 주유소 휘발유 판매 가격은 리터당 2000원을 향해 가고 있다. 기름값은 단순한 운전자 부담만이 아니다. 각종 물류비, 난방비, 그리고 농축산 시설 운영비로 전이되어 종국에는 거의 모든 물가의 바닥을 밀어 올린다.
밥상 물가 역시 예외가 아니다. 밀·옥수수·대두 같은 곡물 대부분은 달러로 결제한다. 환율이 오르면 원가가 오르고, 원가는 결국 소비자 가격으로 반영된다. 통계청 지표에 아직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을 뿐, 체감 물가는 이미 먼저 반응하고 있다. 환율 발(發) 물가 상승은 항상 ‘지연된 폭탄’처럼 작동한다.
기업이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다.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주는 그나마 환율 상승의 수혜를 입을 수 있지만, 원자재와 부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기업, 특히 중소기업에게 고환율은 곧바로 심각한 비용 압박으로 작동한다.
더욱이 이런 환율 변동을 헤지(hedge)할 여력이 부족한 기업일수록 그 타격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익이 줄어들고, 투자는 늦춰지며, 고용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금융시장은 훨씬 더 민감하다. 환율 급등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자금 흐름을 흔들고, 주식·채권시장의 변동성을 동시에 키운다. 최근 국내 증시의 급등락과 회사채 금리 급등은 단순한 심리적 반응이 아니다. 시장은 ‘이 나라가 외부 충격을 얼마나 흡수할 수 있는가’를 환율이라는 숫자로 평가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의 책임이 다시 등장한다. 물론 정부가 모든 환율 변동을 일일이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기준까지 바꿀 권한은 없다. 따라서 특정 정치세력이 과거 위기라고 규정하고 단언했던 숫자 앞에서, 지금도 같은 질문에는 동일한 답을 해야 한다. 만일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하다면, 그 설명 역시 과거의 발언내용과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중요한 경제 지표의 해석이나 그 의미가 달라진다면, 시장 참가자들 대부분은 정부의 말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 시장에서 신뢰가 사라지면, 외환시장은 훨씬 더 빠르게 반응한다. 그때가 되면 환율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 된다. ‘1500원’이라는 숫자가 무서운 이유는 그 자체보다, 그 숫자를 대하는 정치의 태도가 시장에 중요한 신호(signal)를 보내기 때문이다.
결국 1500원이라는 숫자가 가리키는 곳은 외환 시장의 그래프가 아니라, 정부가 그토록 강조했던 ‘책임의 무게’다. 과거 1400원을 향해 던졌던 그 서슬 퍼런 비판들은 이제 부메랑이 되어 현 정부의 신뢰를 겨누고 있다.
정치는 숫자에 이름을 붙여 정쟁의 도구로 삼을 수도 있지만, 시장은 그 숫자를 냉혹한 실체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위기였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는 해명이 통하지 않는 지점에서 진짜 위기는 시작된다. 정부가 과거의 자신과 싸우는 동안, 신뢰라는 방어벽은 이미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 흔들리는 것은 환율이 아니라, 이재명 정부의 신뢰다.
□ 유용욱 주필
- 1993년 KBS 공채 19기
- KBS 전략기획실 성과평가부장
- KBS 법무실장
- KBS N 경영본부장
- 현) 인싸잇 경기 편집국장 및 공동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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