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 철학과 학생, 동문, 동료 교수님 여러분께 철학과 학생, 동문, 교수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최정식입니다. 처음 동문들의 성명서가 붙었을 때 동문들의 오해에 기인한 것이겠지 생각하고 동감하지 않으며 같이 모여서 토론하자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강의한지 근 1년 후에 그런 성명이 붙었을 때부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마는, 이후 토론하자는 저의 제안을 무시하고 성명서들이 점점 정치적 색채를 띠더니, 이번에는 드디어 한 시민단체가 저를 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순수한 마음의 우리 동문들이 아니라 정치적 주장을 하려는 일부 동문들과 외부 단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는 당당하게 그들에 맞서서 대응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번 사태에 대한 저의 해명이 필요할 것 같아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이번 사태에 해당하는 강연이 이루어진 것은 2022년 1학기입니다. 『서양 철학의 기초』라는 강연이었는데, 거기서 서양 철학의 근본 정신이자 출발점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저의 강의를 들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출발점은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소크라테스 당시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고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민주주의를 하고 있었는데,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아테네가 그런 지경에 이른 것은 아무나 아무말이나 해도 다 옳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프로타고라스였는데, 옳으냐 그르냐의 판단기준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아무나 원하는 아무말이나 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가령 고르기아스 같은 사람은 자기가 의사와 의술에 대해서 논쟁을 해도 이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전지전능하다는 주장이지요. 그래서 당시에는 그런 사람들을 소피스트, 즉 전지전능한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민주주의가 산으로 가고,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고, 참인 것은 참이고 거짓인 것은 거짓이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프로타고라스가 주장하기를 포도주의 맛은 건강한 사람한테는 달지만, 아픈 사람한테는 쓰지 않냐, 그러니 각자의 의견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달고, 아픈 사람에게는 쓴, 그것이 바로 포도주 맛이다. 그러니 일정한 포도주의 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정리하자면 참된 앎, 즉 에피스테메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생각, 즉 독사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학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과연 현실에서 그런 구별을 잘 하고 있을까요? 참과 거짓이 마구 섞여서 돌아다니는 것은 물론 정치 판이겠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면 강의가 너무 정치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그에 못지 않게 우리가 가장 진위 판별을 잘못하는 곳이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입니다. 가령 나라를 일본에 판 매국노는 이완용이라 알고 있지만, 이완용은 신하일 뿐, 나라를 팔 자격이 없었습니다. 나라를 팔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은 이후 자신에 대한 처우를 협상하라고 해서 그 협상을 이완용이 한 것입니다. 고종과 그 가족은 이후 일본제국이 패망하던 1945년까지 년간 150만 엔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보통 귀족은 연간 10만 엔을 받았다고 하니 엄청난 대우를 해준 것이지요. 물론 이완용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후의 책임은 고종에게 있는 것입니다(박종인, 『메국노 고종』, 와이즈맵, 2020). 이 죄를 고종에게 묻지 않고 이른바 을사오적에게로 돌린 것은 “是日也 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쓴 당시의 언론인이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친일 행적으로 비난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잘못된 판단으로부터 출발하여 나중에 우리 독립운동사도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그러한 태도가 이번에 문제된 위안부 문제에도 그대로 일관되고 있습니다. 우리 편은 다 옳고 일본놈은 다 틀렸다는 식이지요. 이것이 소위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종래 한국 역사학자들의 역사관이었고, 그것을 여러분들도 교육 받은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원래 없었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일본인 공산주의자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라는 자가 1991년에 일본의 아사히 신문에 글을 발표합니다. 자기가 일본인 순사와 함께 제주도의 한 마을에서 빨래하던 처녀들을 납치하여 정신대로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작점이 되어 소위 위안부(처음에는 정신대였다가 나중에 정신대는 근로대로 징용된 사람들임이 밝혀져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문제가 나온 것입니다. 마침 한 할머니가 그런 경험이 있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녀도 최초에는 자신이 위안부로 팔려갔다고 증언했다가, 그후에는 일본 순사에 잡혀갔다고 말을 바꾸었지요. 그분 이후 여러 명이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해당 마을에 수소문해 본 결과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아사히신문의 사장과 편집국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이영훈 교수의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물론 그 책에 실렸다고 다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또 일본인의 연구도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니시오카 쓰토무, 『위안부 문제의 진실』, 미디어 워치, 2021.) 여기서 어느 쪽 말을 믿어야 할까요? 이것이 학생들이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저는 그 문제를 서양철학의 기초 시간에 반성해야 할 문제로 던진 것이지 어느 주장의 편을 든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제 이야기의 톤이나 분위기로 봐서 제가 어느 쪽인지는 학생들이 짐작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교수의 권위라 하더라도 믿어야 할 것은 사실이지 권위가 아니라는 것이 바로 그 수업이 가르쳐 주는 주된 내용이지요. 대중이 따른다고 거기에 끌려갈 것이 아니라 그때 당시의 상황과 역사적 맥락을 따져서 판단해야겠지요. 그때 당시의 상황은 공창을 인정하던 시기였고, 위안부 모집책이 이런저런 꾐에 의해 어린 소녀들을 데려갔겠지요. 그러나 위안부들이 모두 공창이었는지, 사창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동문들의 성명서에 나오듯이 위안부들이 모두 공창으로 매춘을 했다는 주장을 저는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꾐에 빠져 매춘의 길로 갔다는 것은 강제로 납치되었다는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당시 경제, 사회 사정을 보아 종의 딸, 첩의 딸, 빈자의 딸들이 팔려가는 경우는 흔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일본인들도 자신의 딸과 심지어 아내도 팔아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조선은 어떠했겠습니까? 당사자는 원치 않아도 아버지가 팔아서 팔려간 처녀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들의 처참한 사정을 모른 채 하고 매춘이었으니 나쁘다고 제가 말했겠습니까? 그런 말을 듣고도 학생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교수란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되는 직업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강의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자로서 성명서를 집필하신 분은 이런 사정은 모르시고 저의 주장의 악날함을 부각시키려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악날하다면 무엇보다 학생들이 먼저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 상태로는 교수 일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제가 가르쳐주려고 노력한 부분은 우리 편이라고 다 옳고, 상대방이라고 다 그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판단을 그르치는 가장 쉬운 길이지요. 그래서 철학은 처음부터 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것임을 말하려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한 발언의 의도이자 취지입니다. 그것을 2022학년도 1학기 말고 2023학년도 1학기에 다시 이야기한 것은 그때 마침 대자보가 붙어서 학생들이 다 본 상태이므로 그것을 해명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다시 해명하기 위해 언급한 것입니다. 이걸 제가 여기서 해명하고 있는 것도 저의 입장에서는 좀 거북한 일이지만 하여간 그렇게 해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이 사건을 끌고 가는 사람들과 일부 동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가 밝혀진 지금, 저는 당당히 싸우겠습니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주장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소크라테스의 발 뒤꿈치에도 못 따라가는 저로서는 그의 흉내라도 내겠습니다. 저는 우리 경희대 철학과 학생들과 동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강의해왔습니다. 이번 학기로 이제 학교도 떠나게 되지만 그런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철학과 구성원들의 건투를 빕니다. 2023. 9. 26. 철학과 교수 최 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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