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풀 수 있는 문제도 정쟁의 대상이 될 경우 손대기 어려운 난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정치적 논리에 궤변, 아전인수, 억지가 자주 동원되다 보니 손쉬운 문제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고, 해결보다는 문제를 더 크게 만들기가 예사다. KBS 수신료 인상 문제 또한 그런 경우다. KBS 이사회가 여당 측 이사만이 참석해 수신료 조정안을 상정한 것을 놓고 야당 측 이사들이 비난하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상 저지를 막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래도 수신료 인상을 원한다면 세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도・여론 관련 주요 국장 직선제 등 보도의 공정성과 제작 자율성 보장을 위한 KBS 정관 개정’ ‘국민부담 최소화의 원칙’ ‘수신료 사용의 투명성 강화 방안 마련’ 등이 그것이다. 이 중 두 가지 조건은 그저 반대하기 위한 구색을 맞춘 것에 불과하고 야권의 흑심이 담긴 것은 먼저 언급한 공정보도를 위한 국장 직선제다.
KBS 이사를 역임하는 등 내부 사정에 밝은 황근 교수에 따르면 KBS는 이미 노무현 정부 시절에 인사 문제를 사장과 노조가 협의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놓았다. 그런 상황에서 보도와 관련해 주요 국장 인사를 직선제로 바꾼다면 KBS가 어떤 꼴이 될지는 보지 않아도 훤하다. 목소리 큰 정치노조인 언론노조 KBS지부(KBS본부노조)가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을 국장으로 앉히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할 게 뻔하고, 현상윤 PD와 같은 외눈박이들이 그 자리에 앉아 언론노조 주장을 앵무새처럼 읊는 기가 찬 꼬락서니를 볼 가능성이 크다. 그때는 옴부즈맨 프로그램 차원이 아니라 9시 뉴스에서 대놓고 ‘박근혜 하야’ 주장을 볼지도 모른다. 방송사가 언론노조의 정치투쟁의 장이 될 경우 어떻게 수직직하 할 수 있는지는 작년 MBC가 잘 보여주지 않았나. 정리하자면, KBS에 보도 등 주요 부문 국장 직선제가 이뤄질 경우 KBS는 언론노조 기관방송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국장 직선제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박근혜 정권에서 소수에 불과한 야당 측이 그걸 모르고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오직 KBS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기 위해 찾은 명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저 국정원이나 NLL 논란과 같은 이슈의 보도 내용이 미흡해서가 아니라 박근혜 정부에서 수신료 인상이 이루어지는 게 싫을 뿐이다. 3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못한 난제를 박근혜 정부가 해결했다는 것만큼 이들에게 끔찍한 일이 어디 있겠나. 그러니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전제조건을 내세워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황근 교수 말대로 ‘공정보도’란 단어만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어디 있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온갖 논리와 궤변으로 치장할 수 있는 게 바로 공정보도란 말이다. 오늘날 공정보도란 단어는 정치적으로 가장 오염된 탁한 단어 중 하나가 됐다.
노무현 정부 때 ‘인상 찬성’ 거수기 노릇하던 언론과 언론단체들의 파렴치한 이중 잣대
2007년 정연주 사장이 수신료 인상안을 밀어붙일 때 온갖 찬성 논리를 개발해 제공하며 거수기 노릇하던 진보좌파진영이 이제는 불공정 보도를 이유로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고 있다. 야당 측 이사들은 수신료 인상안을 사전 협의도 없이 여당 측 이사들이 일방적으로 상정했다면서 이러한 태도는 KBS 구성원 다수를 무시하고, 수신료 부담 주체인 시청자 모두를 능멸한 ‘불법 상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야당 측 이사들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다. 2007년 언론노조·기자협회·PD연합회·기술인연합회·민언련·언론연대·문화연대·미디어기독연대·경기미디어시민연대 등의 좌파진영 언론단체가 10월 5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KBS 수신료 인상안을 즉각 처리하라는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했던 발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다.
당시 최상재 언론노조위원장, 전규찬 문화연대 문화미디어센터 소장 등은 “국회는 어떠한 이유로도 TV수신료 인상안 처리를 지체해서는 안 된다” “일단 TV수신료를 현실화함으로써 차근차근 난제를 풀어나가고 이를 통해 민주적인 여론다양성을 확충해 가야 한다” “TV수신료가 공영방송 뿐만 아니라 다른 미디어산업을 활성화하고, 계층 간 지역 간 디지털 정보격차 해소에 기여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단 TV 수신료 인상부터 한 다음 차근차근 난제를 풀자는 주장이 인상적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당시 이들이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는 측에 내놓은 재미있는 또 다른 주장도 있었다.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은 2007년 9월 21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선(先)공영방송 개혁, 후(後) 수신료 인상’을 제안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은 분명 상당한 진실을 담고 있으나 자칫 ‘닭이 먼저냐, 아니면 달걀이 먼저냐’의 소모적 논쟁에 그칠 수도 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태로 응급실에 이송되어 온 환자에게 왜 다쳤는가를 꼬치꼬치 캐어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에 국민을 대신하여 공영방송의 위중한 현 상태를 치유해야 할 책임을 떠맡은 국회의 현명한 판단과 조속한 결정을 기대한다. 특히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칫 방송의 공공성을 정쟁의 도구로 삼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과거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과 사장 아래에서 수신료를 추진할 때는 온갖 궤변을 동원해 찬성하다가 반대하는 정권이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니 자신들의 과거 논리를 다 뒤집어엎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다. 스스로의 얼굴에 똥물을 끼얹는 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이렇게 입장에 따라 수치심도 모른 채 얼굴색 한번 바꾸지 않고 찬반을 오가는 뻔뻔한 이들이 정말로 공정한 보도를 원하고 있다고 시청자 국민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 경향신문, 한겨레 등 언론들도 마찬가지다. KBS의 불공정 보도를 이유로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는 자신들이 과거 수신료 인상을 어떻게 교묘하고 노골적으로 찬성했었는지부터 찾아보기 바란다.
좌파진영은 KBS 수신료 정쟁에 악용하는 짓 중단하고 합리적 태도로 진지하게 접근해야
시청자 국민 입장에서 KBS 수신료 인상은 달가운 일이 아니다. KBS 보도뿐 아니라 각종 프로그램에 대한 불만도 있고, 살기 어렵고 팍팍한 현실에서 수신료까지 오른다면 당연히 화가 나는 일이다. 그러나 정치적 입장을 떠나 30년간 오직 수신료만 동결돼 있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그 결정적 이유가 여야가 번갈아가면서 자신들 입장에 따라 수신료 문제를 정쟁의 도구로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면 더더욱 바로잡아야 한다. KBS 야당 측 이사들은 수신료 안을 여당 단독으로 상정했다고 구차하게 ‘불법’ ‘시청자 무시’ 운운부터 할 게 아니라, 과거 자신들의 주장과 현재가 왜 그렇게 180도로 달라졌는지부터 해명하고 수신료 논의에 진지하게 접근하기 바란다.
KBS가 주체가 돼 수신료를 인상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황근 교수의 조언대로 제3의 기구를 만들어 KBS 재정 상황, 물가 등 현실을 반영해 합리적인 논의를 시작하면 된다. 국민은 비상식적인 수신료 동결 문제점을 이미 인식하고 있다. 최근 민주당 최민희 의원 주도로 실시한 리서치뷰 여론조사에서 국민 다수가 수신료 인상을 반대한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작년 KBS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68% 찬성 의견이 나왔다. 당시 미디어오늘은 KBS 설문이 수신료 찬성을 유도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의혹을 제기했지만, 그런 논리라면 이번 최민희 의원 측의 설문조사도 마찬가지다. 여론조사의 주체가 어느 쪽이냐에 따라 이렇게 결과는 자신들의 입맛대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신료 논의를 현재처럼 정략적으로 접근한다면 수신료 문제는 영원히 풀 수 없다는 것이고, KBS 수신료를 정쟁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여야 모두가 원하는 KBS 독립과 공영성 확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박한명 폴리뷰 편집국장 hanmyoung@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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