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때만 되면 언론은 네거티브 공세를 비난하지만, 실제 깊이 조명해야할 생산적 의제 등에 대해서는 언론은 외면한다. 즉 언론은 정치권의 네거티브 공세를 위한 공범들이지, 감시자가 아닌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지난 12월 13일 박근혜 후보와 김지하 시인의 만남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김경재, 한광옥 등 정통 민주계 인사들의 박근혜 캠프 합류도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김지하 시인의 경우 정치인이 아니란 점에서 박근혜 후보 개인에겐 더 큰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김지하 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후보!
과거의 일은 애초에 귀하가 죄책감을 느낄 문제가 아니야.
귀하는 귀하의 꿈을 이루고 귀하의 인생을 살어.
나, 천하의 김지하가 귀하의 정치적 성공과 국가의 안정/번영을 바라잖아?
당신 아버지의 권력이 갈아먹으려 들었던 나, 천하의 김지하가 당신을, 새 시대를 열어갈 여성 지도자로 추대하잖아.
이제 그 쓸데없는 죄책감 따위는 집어 치워.
죄책감에선 엉뚱하고 미련한 행동만 나올 뿐이야.
죄책감은 지혜의 적이거든.
나는 귀하를 축복해!
대한민국을 축복해!
생명을 축복해!”.
물론 이러한 김지하 시인의 발언은 지난 10월, 정통민주계 인사들의 입당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가 유신 등에 대해 사과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박근혜 사과로 캠프에 합류한 김경재, 김중태, 막말 시비 걸릴 정도로 흑기사 역할
흥미로운 점은 박근혜 후보의 사과를 기점으로 캠프에 합류한 김경재, 김중태 등 다른 민주화 투사들이, 그 이후 막말 시비에 걸릴 정도로, 선두에 서서 친노종북 세력을 공격하며, 박근혜 후보의 흑기사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광경은 끊임없이 박근혜 후보를 압박하며 친노종북 세력과의 야합을 조장해온 총선 당시의 김종인, 이상돈 등의 비대위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김지하, 김경재, 김중태 등 진짜 민주화 투사들은 박근혜 후보의 단 한번의 사과로 더 이상 그를 정신적 감옥에 옭아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유로운 정치를 주문하고, 거친 싸움은 후보를 대신해서 나서준다.
원주에서의 김지하 시인과의 만남 이후,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는 더 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말들이 돌았다. 여야 할 것없이 아무나 “박정희 독재 정치 사과하라”는 말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 박근혜 후보 앞에서 김지하 시인 이외에 그 누가,
“과거의 일은 애초에 귀하가 죄책감을 느낄 문제가 아니야. 귀하는 귀하의 꿈을 이루고 귀하의 인생을 살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가난한 국민들에 자식들 승용차 등교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육영수 여사
박근혜 후보가 어머니를 잃고 퍼스트레이디역을 떠맡은 건 22살 때이다. 박근혜는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 오듯 눈물만 쏟아졌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렇게 쉬지 않고 울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도 “지금 나의 가장 큰 의무, 그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는 외롭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다”(박근혜 일기, 1974년 11월 10일)라고 다짐한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이 정식으로 취임하면서 박근혜 후보와 동생 박근영은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청와대에서 통학하려면 관용 승용차를 이용해야 하는데, 육영수 여사는 가난한 국민들 앞에서 자신의 자식들이 당시만 해도 희귀품인 승용차로 등하교 하는 것을 보이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박근혜 후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의 가족들은 무려 3년간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박근혜 후보는 이런 육영수 여사의 교육에 따라, 지금도 자신의 집에서 수십년 된 가전제품을 사용한다고 알려졌다. 한 방송사의 취재로 인해 그의 집에 비치된 에어컨에는 ‘LG’가 아닌 ‘금성’이란 상호가 적혀있기도 했다.
느닷없이 22살에 퍼스트레이디역을 맡은 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따라하는 것뿐이었다.
“정신없이 바쁜 하루하루다. 포드 대통령 맞을 준비, 잡지에 낼 원고 정리, 사진 선정, 포토 다이어리에 관한 것. 어머니는 어떻게 10여년을 이렇게 지내셨을까”(박근혜 일기, 1974년 11월 21일)
박근혜 후보가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따라하며 초보 퍼스트 레이디역을 맡고 있을 때, 김지하 시인은 감옥에 있었다. 그러다 5년 뒤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마지 총탄에 잃고 만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다음날, 김지하 시인의 회고이다.
김지하 시인,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다음날 “안녕히 가십시오. 저도 곧 뒤따르리라”
“다음날이었죠.
백일 참선을 마친 날이었습니다.
참선의 효과였을까요?
저는 환상을 봤습니다.
허공에 공이 세 개가 차례로 떠오르더군요.
공에는 이름이 있었지요.
글자가 써 있었어요.
첫번째 놈에는 ‘인생무상’…
두 번째 놈에는 ‘안녕히 가십시오’…
세 번째 놈에는 ‘저도 곧 뒤따르리다’…"
반면 박근혜 후보는 27살, 아버지의 죽음 이후 지도자상을 고민한다.
“박수 받는 일만 하는 것이 지도자라면 얼만 쉬운가. 누구든 웬만한 상식만 가지면 한 사회를 이끌 것이다. ‘안 된다’, ‘불가능하다’ 하는 일을 불굴의 의지로 해나가야 하니, 일 자체도 어려운 데다가 이해를 받기 어려워 수갑절 더 힘들게 되는 것이다”(박근혜 일기, 1980년 1월 28일)
27살이면, 지난 총선 때부터 양당이 내세운 청년 정치인들보다 더 어린 나이이다. 민주통합당으로 따지면 김광진 의원이 32살, 장하나 의원이 36살, 김용민이 39살이다. 아직까지 이들의 입에서 저런 정도의 지도자상에 대한 성찰적 발언이 나온 바 없다.
김지하 시인의 죄책감 갖지 말라는 뜻은 “어머니 잃어, 퍼스트레이디 역을 떠맡다, 아버지까지 잃은 20대 여성에게 무슨 유신의 책임을 묻냐”는 맥락일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1998년 보궐선거로 정계에 진출할 때까지, 무려 18년 간, 새마음병원 등의 사회봉사활동을 하면서 사실상 야인으로 지냈다. 그러면서 박정희 대통령 측근들의 배신, 박근혜 후보의 표현대로라면 그토록 유신을 찬양하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유신을 비판하는 광경을 수없이 목격했다. 배신감과 복수욕이 끌어오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국민들이 박근혜 후보에 대해 갖는 불안감이기도 하다.
박근혜 후보의 경우 죄책감과 복수욕은 동전의 양면이다. 역사적으로 유신의 피해자와 유신의 배신자가 얽히고 섥혀있기 때문이다. 김지하 시인의 “죄책감 갖지 말고 당신 정치해”라는 말은 이러한 정치적 맥락도 고려한 것이다.
3차 TV토론에서 웃음과 위트 섞어가며 자신감 보여준 박근혜
박근혜 후보는 1차, 2차 TV 토론에서 본인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을 자신있게 하지 않았다. 문재인 후보의 사냥개 역할을 하던 이정희 후보와 치열한 공방을 벌인 탓인지, 선진정치의 지도자로서의 필수적 덕목인 유머와 위트 섞인 멘트도 선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김지하 시인과의 만남 이후였던 3차 토론회의 때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발언을 세 번이나 반복했고, 웃음과 위트도 보여주었다. 오히려 문재인 후보야말로 시종일관 취조식의 질문만 했지, 지도자로서의 여유로움을 보여주지 못했다.
박근혜 후보는 우파세력 내에서 총선 당시, 이상돈, 김종인 등 비대위 간신배들에 둘러싸여, 애국적 가치의 길을 배신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면서 전교조와의 사투를 벌이던 조전혁 전 의원을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그랬던 박근혜 후보가 TV토론 3차 때는 선제적으로 문재인 후보에 대해 전교조와의 공조를 비판했다. 자신감을 보여주지 못하고, 친노종북 노선에 야합하고자 했던 총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김지하, 김경재, 김중태 등 왼편 기둥, 박근혜의 죄책감과 복수욕 막아주는 역할
김지하 시인의 지지, 김경재, 김중태 등의 흑기사 역할 등은 비단 호남과 중도표 공략의 문제가 아니다. 엄연히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박근혜 후보가 자신감을 갖고 가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는 왼편의 기둥이다.
이들 왼편 기둥의 역할로, 박근혜 후보가 아버지에 대한 복수욕으로 유신독재를 부활시킨다거나 반대로 죄책감 때문에 친노종북 세력과의 야합을 할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이 중요한 사건을 제대로 조명하지 않은 언론, 정치권이 선거 때만 되면 네거티브에 올인을 걸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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