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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즈의 부활은 호남정치 개혁의 시작

친DJ와 친노의 어둠의 벽을 넘고 새 정치세력 등장해야


* 미디어워치 2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베트남전 반대여론이 들끓던 1967년, 당시 헤비급 세계챔피언인 캐시어스 클레이는 전격적으로 징병 반대를 선언했다. 그러면서 이름마저 이슬람식의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 이에 미국 정부는 무하마드 알리의 선수자격을 박탈, 알리는 그뒤 3년 6개월 간 전성기를 날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흑인사회의 인식의 혁명적 변화를 몰고온 무하마드 알리의 파격

알리의 징집 반대 및 인종차별 반대 선언은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몰고 왔다. 당시 스포츠계에서의 미국의 흑인들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야구선수였던 재키로빈슨식의 ‘착한 흑인’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성실하고 착하게 행동하며 백인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는 것 말고, 다른 발언은 할 수 없었다.

알리의 방식은 스포츠계는 물론 전체 미국의 흑인들의 인식에 혁명적 전환을 불러왔다. 그 다음해인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당시 남자 200m 금메달리스트인 토미 스미스와 동메달 리스트 존 카를로스는 검은 장갑을 끼고 검은 양말에 운동화를 신지 않은 채 시상대에 올랐다. 검은 장갑과 검은 양말은 ‘블랙파워’의 상징이었다. 또 신발을 신지 않은 것은 미국에서 가해지고 있는 흑인들에 대한 린치와

흑인들이 안고 있는 빈곤 문제를 표현한 것이었다. 결국 흑인 스포츠계와 청년층의 적극적인 지지로 알리는 다시 복싱계로 복귀, 챔피언에 오른다.

알리의 방식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에서도 하나의 스포츠가 미묘하게 정치와 얽혀있는 사안이 있다. 바로 프로야구단 타이거즈이다. 물론 타이거즈의 선수들이 알리와 같이 정치적 행보를 보여준다는 뜻이 아니다. 미국과는 달리 워낙 복잡하고 엄중한 한국정치의 현실 상, 오히려 대중과 타이거즈가 정치적 표현의 수단으로 상호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타이거즈는 1983년 프로야구 원년 2회째 우승을 차지한다. 타이거즈는 광주와 호남을 연고로 하는 야구팀이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광주는 침묵의 도시가 되었다. 이런 광주시민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한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가 타이거즈의 홈구장은 무등경기장이었다. 1983년 타이거즈가 우승을 이뤄내면서, 무등경기장에서의 ‘목포의 눈물’은 광주시민의 한풀이 노래가 되었다.

타이거즈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4연패를 달성한다. 이 시기는 민주화항쟁이 결실을 맺던 때였다. 이후 타이거즈의 성적은 이상하게도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가게 된다.

1992년은 타이거즈도 김대중도 함께 패배한 해

1992년 타이거즈는 한수 아래로 평가되던 부산 연고의 롯데자이언츠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하여 탈락한다. 당시 롯데 자이언츠는 염종석이라는 걸출한 신인이 등장하며 부산을 야구의 메카로 만들어놓았다. 이후부터 부산은 지금까지 야구도시가 되었고, 최근 개봉한 영화 ‘해운대’에서도 부산의 롯데 자이언츠가 나올 정도였다. 자이언츠는 1992년 타이거즈를 이기고 한국시리즈에서 역대 최강의 전력이던 한화마저 이기면서 우승을 차지한다. 그뒤 두 달 뒤, 92년 대선에서 부산 연고의 김영삼은 호남 연고의 김대중에 승리하며 당선된다. 타이거즈의 패배가 김대중의 패배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1993년 타이거즈는 이종범이라는 신성이 나타나며 삼성을 물리치고 우승을 재탈환한다. 그리고 이종범으로 인해 타이거즈는 1996년과 1997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다. 특히 이 때에는 타이거즈의 상징이었던 선동열이 일본에 건너가고, 김성한 등이 모두 은퇴한 상황에서 이종범의 힘만으로 우승을 하게 되었다. 바로 두 달 뒤 김대중은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뒤 이종범마저 일본으로 떠나며 타이거즈는 그 뒤 단 한번도 우승은커녕 한국시리즈에조차 오르지 못한다.

타이거즈의 몰락이 시작된 1998년 이후, 호남 정치는 서서히 암흑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김대중이라는 야권의 상징적인 인물이 정권을 잡았으나, 집권 기간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렸고, 그뒤 등장한 노무현 정권은 시종일관 호남을 협박하며 동진정책을 펴왔다. 호남이 호남이 선택한 인물들에 이용당하고 배신을 당하면서도 호남인들은 여전히 그들의 재배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7년 대선에서도, 2008년 총선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호남만이 현재의 김대중과 노무현세력의 민주당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 마치 김대중 세력의 야당 시절 영남만이 이른바 한나라당 세력을 지지하며 왕따로 몰리듯이, 지금은 호남이 전국적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1997년 이후 10여년 동안 타이거즈는 프로야구계에서 하위팀으로 밀려나 있었다.

2009년 타이거즈는 무려 7년 만에 리그 1위에 올랐다. 현재로서는 한국시리즈 진출도 유력해보인다. 이종범은 물론, 윤석민, 양현종, 최희섭, 이용규 등 새로운 선수들이 주축이 되고 있다. 광주의 무등경기장은 현재 부산의 사직구장과 함께 매진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무등경기장에 관중에 들어차고, 타이거즈가 연승을 이어간다는 뜻은, 결국 호남과 광주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순간적이나마 공동체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사회적 공론장이 턱없이 부족한 대한민국의 경우 야구장만큼 좋은 공론장이 없다. 한데 모여 응원가를 부르고, 경기가 끝나면, 근처 술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승리를 자축한다.

필자는 광주에 세미나 차 내려갔을 때, 야구장 근처의 술집에서 승리의 축배를 드는 광주시민들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야구 이야기와 정치 이야기를 섞어서 하고 있었다. 호남의 역사와 타이거즈의 역사가 정치와 뗄 수 없듯이, 야구와 정치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곳이 호남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호남인의 씨를 말린다”고 협박하는 민주당 정세균 대표

현재 호남 정치는 최악의 상황으로 가고 있다. 노무현 정권 당시 친노세력은 “호남의 10석보다 영남의 1석이 더 중요하다”며, 민주당을 호남당으로 전락시킨 뒤, 열린우리당을 창당, 호남유권자들에게 “우리를 지지하지 않으면 군부세력의 후예 한나라당이 호남인들을 다 죽일 것이다”라 협박하여 표를 얻어내었다. 이때부터 호남은 성찰과 반성이 없이 맹목적으로 낡은 김대중 및 노무현세력의 표밭으로 전락했다.

친노세력을 대표하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최근 광주 언론과의 기자간담회에서 “이명박 정권이 공기관의 호남인들의 씨를 말리고 있다”며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정치적 위기만 몰렸다 하면 너도 나도 김대중의 집을 찾아가고 5.18묘지를 찾아가서 호남인들의 표에 기대고 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호남은 다시 왕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타이거즈의 부활로 인해 무등경기장에는 젊은 팬과 여성팬이 대폭 늘었다. 주로 과거의 타이거즈 팬들이 40대 이상의 장년층이었던 점과 비교하면 색다른 모습이다. 타이거즈의 선수들도 새롭게 바뀌었고 팬들도 바뀌었다. 그러나 호남의 정치는 1997년 이래 변한 게 없다. 여전히 구태의연한 김대중 세력과, 호남 협박만을 일삼는 노무현세력의 포로로 잡혀있다.

타이거즈의 성적은 호남정치의 흐름과 상호작용해왔다. 2009년의 타이거즈의 부활, 호남정치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 타이거즈의 승리 이후 자축을 하는 술자리에서 “더 이상 호남을 이용하려는 낡은 세력이 아닌 젊고 새로운 세력을 키워보자”, “지긋지긋한 호남차별을 젊은 세대들만큼은 겪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면 호남 정치도 변할 것이다. 지금까지 타이거즈의 승리가 정치를 변화시켰듯이 말이다. / 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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