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배우고 위인전을 읽는 것은 역사의 교훈과 위인의 발자취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고자 함이다. 역사가 주는 교훈과 위인의 족적을 따라 행하면 사회와 국가에 유익한 훌륭한 사람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사회와 국가를 패망의 길로 인도하는 끔찍한 사람이 된다.
링컨은 미국 제 16대 대통령으로서 남북으로 찢겨진 아메리카 연방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노예제도를 폐지함으로써 미국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위대한 대통령’의 순위에서 ‘부동의 1위’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링컨은 빌 클린턴까지 41명의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 지도력과 정치력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뒤진 2위를 했으나 업적과 위기관리 능력 및 성격과 도덕성에서 첫손가락에 꼽혔다. 그가 신화적인 인물로 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장 큰 요인은 정직성과 적들도 내 사람으로 만드는 열린 마음이다. “남부가 지금까지 겪었던 가장 암울했던 사건은 남부연합의 패배 다음으로, 링컨의 죽음이다”라는 남부연합의 대통령으로서 링컨의 최대 정적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의 말은 링컨에 대한 경외심의 단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링컨 대통령과 盧 대통령은 자라 온 환경에서 보면 공통점이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이다. 두 사람 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었고, 신통찮은 의정생활을 경험했다.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마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후보들에 뒤처져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대통령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국민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142년의 시간과 공간차를 둔 16대 대통령이었다.
링컨은 1809년 2월 12일 켄터키 주 호젠빌(Hodgenville) 근처의 통나무 오두막에서 일자무식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농장 일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학교 문턱을 밟은 것이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지적 갈증을 못 이겨 수 십리 길을 걸어가 빌려 온 책을 반딧불에 의지해 읽어야 했던 링컨의 어린 시절은 ‘가난한 집 신주(神主) 굶듯’ 하는 삶이었다. 링컨 자신의 표현대로 그의 어린시절의 삶은 ‘짧고도 단순한 가난한 사람의 연대기’였다.
링컨은 그렇게 순전히 독학으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고, 정계에 진출해서는 일리노이 주 의원에 연속 4번 당선되고, 연방 하원의원에 한 번 당선되었으나 신통찮은 의정생활을 했다. 그 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연속 두 번이나 낙선함으로써 별 볼일 없는 정치인으로 치부되었다. 따라서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꿈에서라도 생각해본 미국민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링컨은 1860년 5월 18일 ‘은 숟가락을 물고 태어나 레드 카펫 위만 걸어왔던’ 세 명의 정적을 누르고 기적적으로 갓 태어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11월 대통령 선거에서도 민주당의 강자 스티븐 더글러스와의 힘겨운 승부 끝에 일반투표에서는 40%의 지지 밖에 얻지 못 했으나 선거인단 투표에서 압승을 거두어 대통령에 당선 되었던 것이다.
보잘 것 없는 경력의 링컨이 수많은 쟁쟁한 경쟁자들을 누르고 대통령이 된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가 그의 뛰어난 연설 실력이었다. 그를 일약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군의 선두그룹에 올려놓은 계기는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를 불과 80여 일 앞두고 한 연설이었다. 1860년 2월 27일 뉴욕시의 쿠퍼 유니언 대강당의 연단에 서는 절호의 기회를 최대한 이용했다. 그가 연단에 서자 한 청중은 “그의 한쪽 바지자락은 신발에서 10센티미터 가량 위로 올라가 있었고, 그의 머리카락은 수탉의 깃털처럼 흐트러지고 삐죽 나와 있었다. 외투는 그의 몸집보다 너무 컸지만, 팔은 소맷자락보다 훨씬 길었다”고 술회했다.
이런 몰골의 링컨을 보고는 청중들은 처음에는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그 유명한 스티븐 더글러스(당시 일리노이 주 연방 상원의원)와의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가를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링컨이 연설을 시작하자 청중은 그의 열정적이고 힘찬 연설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링컨은 어릴 적부터 나무그루터기에 앉아 동네 친구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최대의 기쁨으로 여겼다. 1837년에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로 이주한 링컨은 낮에는 변호사일에 몰두했고 밤이면 친구 스피드의 가게 난롯가에 모인 친구들과 정치 철학 등 논제에 관한 토론을 벌이곤 했다. 그 친구들 중에는 링컨의 최대의 정치적 라이벌이 되는 스티븐 더글러스도 있었다. 그의 말솜씨는 여기에서 다듬어지고 발전된 것이었다.
1858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유세 중 현직 상원의원 더글러스와의 논쟁은 “수세대 후의 미국인들이 스포츠에 쏟는 것과 맞먹을 만큼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은 ‘링컨 대 더글러스 논쟁’으로 알려졌다.
盧 대통령도 째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그 흔한 대학문턱도 넘어보지 못 하고 “대학 캠퍼스를 밟아보지 않은 사람은 무언가 다르다”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비아냥까지 들으며 살아야 했다. 대통령이 되어 폭발한 ‘가진 자, 배운 사람’에 대한 증오심은 그의 가난한 어린 시절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심리학자들은 진단한다.
盧 대통령도 겨우 시원찮은 상업고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고학을 하면서 사법시험에 합격, 1년 남짓 판사생활을 거쳐 변호사로 활동했다. 변호사 시절 주위의 권유로 ‘부림사건’의 변론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란 타이틀을 붙이게 되었고 이를 발판 삼아 국회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정치생활을 시작(1988년 제13대)했다.
그해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5공 청문회)’ 의원으로서 달변을 맘껏 과시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집어 던지는 ‘상식과 예의에 벗어난’ 돌출 행동으로 오히려 전두환 정권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의 마음을 붙잡아 ‘청문회 스타’로 등장했다.
그러나 14대 국회의원 선거와 부산시장 선거에서, 그리고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1998년 15대 국회의원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고, 2000년 16대 총선 때는 당선이 손쉬운 종로구를 버리고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뿌리 뽑겠다”는 구국일념(?)으로 도저히 당선을 기대할 수 없는 부산 북강서을 지역을 선택, 낙선함으로써 정치생명이 끊기는 듯했다.
국회의원에 낙선하고 환경부 장관이라는 별 볼일 없는 자리를 꿰차고 앉았던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 들어 강력한 라이벌 이인제, 한화갑, 정동영 등을 꺾고 16대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은 수저를 물고 태어나 붉은 카펫만을 밟고’ 성장한 강적 이회창을 누르는 기적을 일궈냄으로써 신화적인 인물이 되었다. 여기까지가 링컨과 노무현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에 당선 후의 두 사람의 리더십, 하늘과 땅 차이
盧 무현 대통령은 링컨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고 있다. 존경하는 사람을 본 받아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다. 盧 대통령은『내가 만난 링컨』이라는 저서까지 펴냄으로써 링컨에 관한한 가히 전문가라고 뽐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의 盧무현은 링컨과는 정반대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정상적인 사람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링컨의 가장 큰 덕목은 정직이었다. 그는 중상과 모략이 판치는 정계에서도 ‘정직이 가장 큰 무기’라는 신념으로 일관함으로써 ‘정직한 에이브’로 불리고 있다. 盧무현은 상황에 따라 유.불리를 따져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꾸어 왔다. 그리하여 거짓말에 관한한 이아고(Iago)를 뺨친다는 것이 정가의 평가다.
링컨의 빛나는 리더십의 백미는 관용정신이었다. 대통령 경선에서 최대의 라이벌들을 각료로 초빙하여 화해와 협력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슈어드(William H. Seward)를 국무장관에, 체이스(Salmon P. Chase)를 재무장관에, 그리고 베이츠(Edward Bates)를 법무장관에 기용했다. 뿐만 아니라 변호사 시절 ‘촌뜨기’라고 무시당했던 스탠턴(Edwin M. Stanton)을 전쟁장관으로 기용하기도 했다.
盧무현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라이벌들을 형사처벌함으로써 자기와 맞선 앙갚음을 했다. 유종근과 이인제 그리고 한화갑이 盧의 독기어린 발톱에 찢기어 피를 흘렸다. 더욱이 한화갑은 경선 때 받은 자금이 불법정치자금이었다는 혐의로 2006년 12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됨으로써 민주당 대표직도 잃고, 2007년 12월 사면복권 되기까지 1년여 동안 발이 묶이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김근태가 고백했듯이 盧무현을 비롯해 경선 때 불법정치자금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盧무현 자신은 물론 김근태 정동영 등은 빼놓고 유독 한화갑에게만 가혹한 처벌을 받게 한 처사는 ‘표적수사’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링컨은 정적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남북전쟁을 마무리하고 갈라진 연방을 재건했다. 이렇게 링컨은 갈등조정(conflict management)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盧무현은 적과 동지를 확연히 구분하여 ‘코드 인사’로 일관하고, ‘잘 사는 사람, 강남 사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을 끝장내려는 오기를 부림으로써 ‘갈등조장(conflict encouragement)'의 명수임을 증명했다.
링컨-정직한 말, 盧무현-거짓말
뛰어난 말솜씨는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적 조건이다. 링컨은 청중을 매료시키는 빼어난 웅변술로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盧무현도 말솜씨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5공 청문회에서 뿐만 아니라 대통령 선거유세 중에서 보여준 그의 언변은 특히 여성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링컨은 “나의 발언은 낱낱이 인쇄됩니다. 내가 무심코 실언이라도 하면 그것은 나 자신과 여러분 그리고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때문에 나는 나의 실수가 최소한에 머무르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침묵하라, 아니면 침묵보다 더 나은 말을 하라”는 피타고라스(Pythagoras)의 충고를 뼈 속 깊이 새기며 살아왔다.
당태종도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말이란 군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나는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할 때마다 이 말이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고려하기 때문에 감히 많은 말을 못한다”.
盧무현은 자기의 말이 자신과 국민 나아가 국가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심사숙고하지도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기분이 내키는 대로 내 뱉는 사람이다. 대통령 선거유세 중에 “남북관계만 잘하면 정치는 깽판 쳐도 된다”는 저속한 말을 시작으로 “계급장 떼고 붙자는 말이냐”, “못 해 먹겠다”, “그 놈의 헌법, 그 놈의 선거법”, “떠나는 사람 등 뒤에 소금 뿌리면 내 맘대로 하겠다” 등등의 품위와 권위를 잃은 막말 때문에 국민들의 ‘놀림감’이 되었고, 국민들은 그의 시끄러운 막말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한 마디로 盧무현은 공자(孔子)가 사귀면 해롭다는 “말재주나 부리는 사람(우편녕:友便佞)”에 지나지 않고, 그의 말은 정직과는 거리가 멀기에 신뢰받지 못하는 장광설(長廣舌)이었다.
민심을 거스른 청개구리형 盧무현 대통령
링컨은 “민심과 함께하면 실패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는 리더가 되려고 노력했다. 반면 盧무현은 ‘청개구리의 근성’을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국민을 짜증나게 하는 데 열중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심성이 뒤틀려 엇나가기를 잘하고 시키는 일에 거스르기를 잘하는 사람을 빗대 청개구리라고 한다.
청개구리 형 盧무현은 “나는 거꾸로 생각해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라면서 “나는 21세기를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데 국민들은 15세기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자기는 대붕인데 국민은 참새라며 국민을 무시하고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는 짓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독오(獨傲)선생’으로 불린 盧무현 대통령은 선천적인 품성에 가난에 찢기도 짓밟혔던 어린 시절의 원한이 뒤섞여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고, 청개구리형 인격체가 되었다.
그가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생뚱맞은 언행을 일삼았던 것은 그의 이러한 인성에 연유한다는 것이다. 정치생활 내내 언론을 편 가르기 하고, 끈덕진 적대 언론 탄압도 성에 차지 않아 임기 말에 이르러 언론에 ‘대못질’을 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은 것도 그의 비뚤어진 성격 탓이었다.
링컨은 화해와 통합의 리더십으로 남북으로 분열된 국가를 통합했고, 盧무현은 불화와 분열의 리더십으로 국정을 파탄 내어 국민을 ‘거구로 매달린 고통(倒懸)’ 속으로 몰아넣었다. 盧무현 대통령이 존경해 마지않는다는 링컨 대통령을 10분의 1만이라도 본받아 국민이 바라는 대로만 했더라면 결코 ‘끔찍한 대통령’이라는 낙인은 찍히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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