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워> 박스오피스 진입만으로도 대성공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가 개봉 3주차에 접어들며 88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3주차 박스오피스 순위는 11위이고, 총합 1200만달러의 매출이 예상된다.
언론에서는 <디워>가 첫 주에 박스오피스 5위를 기록한 것을 기준으로, 연일 추락한다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특히 <디워>보다 한주 늦게 개봉한 <레지던트이블3>에 주목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디워>는 <레지던트이블3>나 조디포스터 주연의 <브레이브원>과 직접 비교할 수 없는 작품이다. 이들 영화는 대형스타가 주연으로 참여했거나, 전작으로 인한 지명도를 이미 확보하고 있다.
미국 지역에서 무명이나 다름없는 대한민국 감독 심형래가 연출하고, 또한 누군지도 모를 법한 배우들이 연기한 <디워>가 이들 영화와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에 가깝다.
<디워>는 2200여개의 스크린을 확보하고,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들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거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2000만달러 흥행을 예상했던 심감독의 기대치에는 못 미치고 있으나, 원래 감독이나 제작자의 꿈은 관객보다 큰 것이 당연한 일이다.
미국 블록버스터 기준으로 보면 한참 못미치는 300억원의 저 예산, 국내에서 사실 상 처음 시도하는 본격적 SF영화, 국제적 지명도 등을 감안해보면, 심감독의 기대와는 별개로 <디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냉정한 평가이다.
미국 평단의 악평에 대해서도 크게 신경쓸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CG로 중무장한 수많은 SF영화들이 개봉한다. 국내시장에서야 CG 하나만으로도 영화의 모든 단점을 덮어둘 수 있었다. 앞으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관객들이 심형래 감독의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영화를 보지 않는다. 현재 영화를 보는 시간에 <디워>가 주는 쾌락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 점에서 국내에서 한달 이상 흥행 1위를 기록한 것과, 미국에서 10위권에 머물러있는 순위 역시 직접 비교 대상이 아니다. 박찬호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최 전성기 때에도 18승대 투수에 불과했던 반면, 한국에서는 야구의 최고 스타로 각광받았던 것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박찬호는 미국 관객들에게 18승대 투수 중 한 명일 뿐이지만, 국내팬들에게는 지금은 18승대 투수지만, 앞으로는 제2의 박찬호가 나와 얼마든지 다승왕에 도전할 수 있다는 기대치가 투영되어있기 때문이다.
진중권류의 신자유주의자들의 몰락
개봉하자마자 <디워> 공격에 올인했던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최근 <문예중앙>에 <군중이냐 다중이냐>라는 글을 기고했다. 단적으로 말해 진중권이 <디워> 죽이기에 인생 전체를 걸다보니, 온갖 사실왜곡과 편파로 얼룩진 최악의 글이었다. 그야말로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글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심형래 감독은 애국주의 코드로 대중을 선동하는 히틀러이고, <디워>에 기대를 거는 관객들은 히틀러를 추종하는 광신도라는 것이다. 과연 진중권은 두 눈을 뜨고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두 눈을 감고 세상을 무한히 상상하는 것일까?
<디워>가 국내에서 개봉한지 벌써 두 달이 흘렀다. 진중권의 눈에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두 달 간 무슨 사회적 해악을 저질른 것으로 보이는? 그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플랭카드를 내걸고 <디워>보기 촛불시위라도 벌였던가? 진중권을 비롯한 <디워>를 비판한 평론가들의 집에 쳐들어가 폭행이라도 저질렀는가? 아니면 <디워>의 미국흥행이 기대치에 밑돌아 분신자살이라도 한 사람이 있던가?
심형래 감독은 영화 사업가답게 미국에서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관객 한 명이라도 더 모으고 있다. <디워>의 팬들은 그냥 장래성이 촉망되는 SF영화를 보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을 뿐이다. 개중 가장 극성팬들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인터넷에 까페 하나 만들어놓고, <디워>관련 기사들을 놓고 때론 응원을 하고, 때론 분노를 표현하며, 자기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진중권이 온갖 과장된 표현으로, 나찌와 파시즘의 부활이라고 명명한 <디워> 현상에서 벌어진 실제적 일은, 단지 수천명 정도의 <디워>의 열성팬들이 인터넷에 댓글을 쓴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이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디워>를 죽이고 싶어해도 없는 일이 있는 것처럼 과장하는 일은 평론가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번 글에서 진중권은 또 다른 악성 반칙을 저질렀다. 필자는 여러 차례 걸쳐, 아무런 힘도 없는 네티즌을 권력으로 몰아, 자신을 희생양으로 둔갑시키는 진중권의 수법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마케팅 전략이라 비판했다. 이에 대해서 진중권은 “답할 가치가 없다”며 반론을 회피했다. 그랬으면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번 글에서 필자의 실명을 배제한 체, 강준만 추종자라는 딱지를 뿥이며 필자를 비판했다. 필자는 실명으로 글을 쓰는 논객이다. 필자를 비판하려면 정정당당히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하던지, 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냥 가만히 있어야 했다. 앞에서는 답할 가치가 없다고 그러도 뒤에서는 숨어서 비판하는 행태, 이것 역시 진중권류의 낡은 수법이다.
필자 역시 진중권의 뒤에서 칼을 꽂는 방식의 비판에 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지만 한 가지만은 언급해야겠다. 필자는 진중권이 대중문화를 공부한 적도 없고, 평소 대중문화 영역에서의 자신만의 대안담론을 생산한 적도 없는 비전문가라 비판했다. 진중권은 <디워>를 전문적으로 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굳이 이런 물음에 대답하려면, 제3자의 평가를 들이대야 하는데, 굳이 방송에서 자칭 대중문화 전문가가 쓴 책의 판매지수가 22이고,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자의 것은 지수가 11788이라고 너절하게 늘어놔야겠는가?“
하하하, 그냥 웃자. 필자가 쓴 책은 <스타비평>이라는 대중문화 전문서적이다. 진중권이 쓴 책은 아마도 대충 짜깁기해서 쓴 미학 관련 책일 것이다. 대중문화 전문 서적이 아닌 다른 책을 써놓고, 그 책의 판매지수로 우열을 가리자는 게 대체 어디서 나온 발상일까?
자신의 책이 더 많이 팔렸으니, 자신이 전문가라고 주장하겠다는 진중권의 발상, 여기서부터 진중권의 <디워>비판 논리는 죄다 무너진다. 진중권의 책은 10만부라도 나갔는가? 그럼 <디워>는 무려 800만명이 봤는데, 10만부도 팔지 못하는 3류 문화평론가가 왜 왈가불가하는가? 또한 <디워>는 미국에서 최소 천만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아시아 전 지역과 유럽에도 보급할 예정이다. 진중권의 담론이 보편적이라면, 미국이나 일본, 자신이 유학한 독일에 전파할 자신이 있는가? 몽땅 다,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는 철지난 구시대 신좌파 담론으로 치부되는 걸, 그대로 베껴서 한국의 무지한 대학생과 언론에 팔아먹는데 급급했던 것은 아닌가?
진중권의 몰락은 너무나 드라마틱하다. 진중권은 <디워> 죽이기에 골몰하면서, 어느 순간 신자유주의자로 변신했다. 그는 영화도 국적 불문하고 재미없다면 국내영화를 보지 말고, 상품도 애국심으로 사지 말고 품질로만 평가하자고 주장한다.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쌍수들고 환영할 만한 말만 골라서 내뱉고 있다. 아무리 <디워>가 미워도 자신의 근본 사상이라 떠벌리고 다녔던 신좌파담론은 버리지 말기 바란다. 대체 <디워> 하나 잡으려다 온통 무장을 다 해제하니, 앞으로 뭐 먹고 살려고 저러는지 걱정될 정도이다.
진중권 현상은 향후 한국 지성계와 문화담론 영역에서의 세대교체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의 담론을 무작정 추종해온 진중권 세대의 눈에는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현상을 해석할 수 없다. 기껏해야 “독일과 프랑스도 하지 않는 일을 왜 한국이 하느냐”는 사실상의 사대주의적 발언 이외에 그들 머리에서 다른 대안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
진중권 관련해서 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면, 한국 대중문화와 언론의 수준이다. 진중권의 낡은 담론은 최소한, 유력 일간지나 주간지에 더 이상 실려선 곤란하다. 다른 건 몰라도 전혀 생산적이지가 않다. 진중권류의 구시대 지식인들을 퇴출시키려면, 언론 자체가 더욱 발전해야 한다. 최소한 진중권의 글을 받아주고 있는 매체들은, 밀턴프리드만을 능가하는 신자유주의 담론을 역설하면서도 좌파라는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크린쿼터 유지에는 찬성하는 진중권류의 모순점에 대해서는 심판을 내려야 한다. 지식인의 개혁은 언론의 개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챔피언>만도 못했던 <록키발보아>
심형래 감독 덕택에 자주 거론되는 사람은 황우석 박사이다. 황우석 박사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라는 발언으로 대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물론 과장된 측면이 있다. 과학은 매우 엄밀하게 참과 거짓을 구분해낼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과학자라 해도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연구결과를 지지해줄 수 없다.
중요한 점은 이런 과학의 분야에서도 조국과 민족이란 개념이 정서적으로 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하물며, 해당 지역의 역사적 맥락 및 언어 등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중문화 분야는 어떻겠는가? 예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관객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게 가장 정확한 진단이다.
미국영화 시장의 90%는 미국영화가 점유하고 있다. 그리고 전 세계영화의 50% 가까이를 점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국영화가 아시아의 몇몇 나라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한국시장에서 한국영화 점유율은 70%이며, 미국영화는 20%에 불과하다. 일본시장에서 자국영화 점유율은 최근 50%를 넘겼다. 홍콩과 인도시장 역시 자국영화 비율이 50%를 넘어가고 있다. 상대적으로 미국영화 점유율은 30% 안팎이다.
한국, 일본, 홍콩, 인도의 경우 미국 할리우도 영화의 영향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들 네 나라의 영화는 자국 뿐 아니라, 해외시장에도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자국 팬들이 자국 영화에 대한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나라들이다.
진중권이 추종하고 있는 완전자유경쟁시장이라는 미국 역시 이 법칙이 통한다. 만들었다 하면 무조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실베스터 스텔론의 록키 시리즈는 국내에서 통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식 팽창주의를 표방한 <록키4>는 국내에서 늦게 개봉한 탓도 있지만 완전히 망했다. 미국식 회고주의를 표방한 록키6격인 <록키발보아>도 국내 시장에서 조 기종영했다.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던 곽경택 감독의 <챔피언>만도 못했다. 반대로 <챔피언>이 미국시장에서 <록키발보아>를 이길 수 있겠는가?
영화에 강점을 지는 그 어떤 나라의 관객이든 자국영화에 대해 일정 정도의 기대치를 부여하면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공산품처럼 국적에 관계없이 품질로만 평가해서 사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영역이다. 삼성경제연구소도 아니라 미학을 전공했다는 문화평론가가 "무조건 질로 평가해서 보자"라는 말을 하니 "미학을 제대로 공부했는지 의심스럽다"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진중권은 대체 <록키발보아>와 <챔피언>의 작품의 질을 무슨 기준으로 평가하겠다는 말인가? 미국인들은 <록키발보아>에, 한국인들은 <챔피언>에 더욱 친숙할 수밖에 없고, 이는 해당 지역의 영화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더구나 한국의 경우는 또 하나의 특수성을 갖고 있다.
일본의 좌파 역사학자인 와다 하루끼는 1995년 한류를 예상하며, 세 가지의 근거를 제시했다. 첫째, 민주화운동으로 축적된 문화창작력, 둘째, 한번도 남의 나라를 침입하지 않은 평화로서의 역사성, 셋째, 전 세계에 퍼져있는 한민족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일본에서 한류열풍이 불었을 때, 일본 내 교포들은 자신의 상점을 배용준, 최지우, 이병헌 등의 사진으로 도배했다. 상업적 마케팅의 목적도 있겠지만, 이국 땅에서 천대받은 감정을 한류현상으로 만족을 했던 것이다.
진중권의 눈으로 보자면, 한국 대중문화 포스터로 상점을 도배한, 일본 교포들은 그야말로 애국주의로 중무장된 나찌들이 아닐까? 심형래 감독 측은 <디워> 관객의 20% 정도가 교포들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미국 내 교포가 200만명으로 추산된다면, 그리 큰 비율은 아니다. 그러나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미국 내 교포들의 <디워>에 대한 자부심은 일본의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다.
만약, <디워> 이후, 보다 더 많은 영화들이 미국에 개봉된다면, 재미교포들은 더욱 더 결집할 것이다. 이런 것을 애국주의라 욕할 수 있냐는 말이다. 맨날, 킹콩, 스파이더맨, 배트맨 등 이상한 주인공들만 나오다, 어쨌든 친근한 이무기가 나오는 영화를 한국 사람이 더 많은 기대를 갖고 보는 게 뭐가 이상한 일이라고 호들갑이냐는 것이다.
필자는 과연 진중권류의 신자유주의자들이 한일전 축구 경기 때 누구를 응원할지 궁금하다. 국가와 관계없이 더 멋있게 축구하는 팀을 응원하는 게 마땅하단 말인가? 스포츠도 하나의 대중문화의 영역이라면 말이다.
태국의 <옹박>과 <디워>가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
심형래 감독은 처음부터 미국 시장을 겨냥했다. 그래서 <디워>의 주인공들의 환생도 LA에서 이루어졌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한강을 배경으로 해서 한국 관객을 즐겁게 했다면, 어찌보면 <디워>의 관객들은 찬밥이었다. LA가 아니라, 광화문이나 종로에서 용들의 전쟁이 벌어졌다면, 국내 흥행 스코어가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 관객들이 이 정도의 차이를 용인해준 이유는 향후 한국 영화가 자유롭게 미국 등 해외시장에 보급되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애국주의라 비판하고자 한다면, 진중권류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진짜 좌파인 일본의 와다 하루끼를 비판하라. 처음부터 한류현상에는 민족의식이 개입되어 있고, 바로 와다 하루끼는 이러한 특성을 보고, 한국이 아시아 문화네트워크의 중심국가가 되리라 예견한 것이다.
심형래 감독은 아시아 최고 수준의 SF 그래픽 기술을 증명해주었다. <디워>는 시작일 뿐이다. 향후 심감독의 의지에 따라서, 수많은 한국의 전설이 스크린에 옮겨질 수 있다. 아니 한국 뿐이 아니다. 태국이나 인도의 전설도 수도 없이 많다. 만약 심감독의 태국의 코끼리 전설로 영화를 만들면, 그때는 신자유주의자들은 뭐라 비판할 건가? 이젠 태국의 애국주의를 부추긴다 비판할 것인가?
영화에는 국경이 없다. 심감독의 작품소재나 심감독이 진출할 시장의 국경은 없다. 그러나 심감독의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는 조국이 있다. 국내팬이든, 재미교포든, 재일교포든, 영화 관객들은 심감독의 영화가 대한민국의 영화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본다.
이러한 민족의식이나 애국심은 평론가 등 오피니언 리더 등의 역할에 따라서 얼마든지 건강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태국의 세계진출 영화였던 <옹박>은 태국 전체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주인공 토니륭은 국가 최고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옹박>은 미국과 한국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디워>팬들이 <옹박>의 성공을 시기하며, 때려죽이자라는 말을 하지 않는 이상, 이를 나찌나 파시즘으로 연결시킬 수 없다.
오히려 세계 영화시장의 독과점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영화에 맞서, <옹박>과 <디워>등이 세계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활력이 될 수 있다. <디워> 등의 성공으로 미국영화 시장이 별 것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면, 한국에도 태국, 인도 등의 영화에 눈을 돌리는 팬들도 늘어날 것이다. 이는 조만간 <디워>가 진출할 유럽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영화 독점시장에 균열을 내는 것 자체가, 세계 문화교류의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와다 하루끼가 예견한 문화네트워크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잠재력이고, 이러한 것은 일반 관객이 아니라 평론가 등 책임있는 지식인들이 해야하는 일이다. 이러한 폭넓은 관점을 갖고 실천적 대안을 제시할 자신도 없이, 철지난 서구의 담론만으로 장사해먹는 낡은 지식인들이 이제 펜을 꺾을 시대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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