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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꾸다 대안론으로 휘청거리는 일본 정치

자민당 원로들 '고육지책'...'후꾸다 독트린' 35년만에 부활할까?

아베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의 돌연 사임으로 '포스트 아베'에 대한 추측이 무성한 가운데 후꾸다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을 새로운 대안으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급격하게 세를 얻고 있어 큰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후꾸다 전 장관의 경우 일본 보수파 주류를 대변해온 아베 총리와 외교안보에 있어서 대척점에 서있었던 인물이었던 만큼 고이즈미-아베 정권 하에서 가속도가 붙어온 일본사회의 우경화 추세가 아베 사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후꾸다 대안론'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는 곳은 바로 자민당내 최대 계파 '마찌무라파'의 수장 마찌무라노부다카(町村信孝) 외상과 고이즈미준이찌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다. '마찌무라파'의 명예회장인 모리요시로오(森喜郞) 전 총리는 13일 도꾜 시내 모처에서 후꾸다 전 장관과 긴급회동을 갖고 자민당 총재선거에의 출마를 권유했으며, 후꾸다 전 장관은 그 자리에서 제의를 수락했다. 후꾸다의 출마 표명이 나오자 '마찌무라파' 회장 마찌무라 전 장관은 파벌 간부들에게 후꾸다 지지를 지시했다. 또한, 이와 비슷한 시각에 고이즈미 전 총리는 나까가와히데나오(中川秀直) 전 자민당 간사장과의 전화통화에서 "(후꾸다 추대에 대해) 좋은 생각이다. 내가 앞장서겠다"며 '후꾸다 대안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후꾸다는 또한 오늘(14일) 오전 '니와-고가파' 회장인 고가마사루(古賀誠) 전 자민당 간사장, '야마자키파' 회장인 야마자키타쿠(山崎拓) 전 자민당 부총재, '다니가끼파' 회장인 다니가끼사다까즈(谷垣禎一) 전 외상 등 자민당내 계파 수장들과 면담을 갖고 자신의 출마의사를 밝히는 동시에 지지를 요청했으며, 이들 3인은 후꾸다 지지 입장을 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누까가후꾸시로오(額賀福志郞) 전 재무상을 지지했던 '츠시마파'도 '후꾸다 지지' 쪽으로 입장을 선회함에 따라 누까가 전 장관은 출마 포기 선언을 했다. 이에 따라 일본 자민당 총재선거는 당내 총 9개의 계파 중 7곳으로부터 지지를 획득한 '후꾸다' 당선이 유력시되는 가운데 아소타로(麻生太郞) 자민당 간사장이 추격하는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후꾸다 대안론'이 급작스럽게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자민당 내 원로들이 현재의 국면을 사실상의 '비상사태'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꾸다 전 장관은 오늘 오전 '마찌무라파' 총회에 참석하여 "현재의 상황을 비상사태로 보고 있다. '네가 나서야 된다'는 당 원로들의 잇따른 요청과 격려를 뿌리칠 수 없었다"며 이같은 관측에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특히, 외교안보나 정치개혁에 있어서 고이즈미 내각에게 가장 많은 쓴소리를 했던 후꾸다 전 장관에 대해 고이즈미 전 총리가 앞장서서 지지 표명을 한데서도 이같은 위기의식의 또다른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위기의식의 핵심에는 바로 '오자와 신드롬'이 자리잡고 있다.

작년 4월 민주당 대표로 선출된 오자와이찌로(小澤一郞)는 '돌아온 장고'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때 자민당내 최대 파벌이었던 '다나까派'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서열 2위'인 간사장에 올랐지만 개혁노선을 둘러싸고 파벌내 원로들과 대립, 자민당을 깨고나와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 그가 제1야당 민주당의 간판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일본 정치권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

오자와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작년 4월 재보선과 올해 7월 참의원 선거다. 작년 4월에는 자민당 중진과 구속된 일본 벤처영웅 호리에와의 유착관계를 폭로한 이메일이 거짓으로 들통나면서 존망의 위기에 처한 민주당을 기적적으로 기사회생시켰다. 이 문제로 당이 불안감과 무기력증으로 방향성을 상실해있을 때에 '양극화 해소'와 '아시아 국가들과의 신뢰회복'을 주창하며 정치적 지론인 '일본사회 개조'를 적극 내세웠고, 이것이 여론의 호응을 얻으면서 민주당이 재보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또한, 올해 7월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는 평화헌법 개정 문제, 외교안보에 있어서의 지나친 대미의존, 아베 내각의 잇따른 스캔들과 '모럴 헤저드'를 선봉에서 공격함으로써 자민당으로부터 의석을 무려 28석이나 빼앗아와 참의원 제 1당의 자리에 민주당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것이 아베 사임을 불러왔다.

사실, 오자와는 몇변의 돌출 행보로 인해 '모사꾼' 혹은 '음모가'로서의 이미지가 일본 사회에 각인되어 정치적 재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40대에 불과한 마에하라 대표가 '가짜 이메일 파문'을 수습하지 못하고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자 민주당 일각에서 '오자와' 콜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러한 격변의 분위기를 틈타 대표 당선이 유력시되던 간 나오또를 큰 표 차이로 제치고 대표직을 거머쥐었다. 뿐만 아니라 자민당을 수구보수로 몰아세우면서 '개혁적인 중도'를 표방하며 일본 유권자들의 표심을 절묘하게 파고들어갔다. 특히, 총리 사임 하루 전에 나온 아베의 '여야 영수회담'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아베 총리에게 무력감을 안겨주는 '뚝심'까지 발휘하였다.

자민당 원로들이 오자와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다나까派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카리스마와 정치적 감각을 지니고 있을 뿐아니라 자민당의 장단점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민당 탈당 후에는 총리를 지낸 하타와 오부찌 등을 막후에서 조종할 정도의 영향력을 확보해왔다.

또 하나의 복병은 바로 '개혁 피로 증후군'이다. 아베 총리의 정치개혁 및 사회제도 개혁에 대해 자민당 원로들이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온 것은 사실이지만 잇따른 정치스캔들과 '모럴 헤저드'로 인해 일본 국민들 상당수가 '개혁 피로 증후군'에 시달리면서 급기야 70%를 넘었던 아베 내각 지지율이 28%까지 곤두박질했고, 이로 인해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전무후무한 참패를 기록한 것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이들이 갖고 있다. 왜냐하면 개혁이 자초되는 것은 큰 문제가 안되지만 아베 총리의 사임으로 이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평화헌법 개정'과 '자위대의 정규군 전환' 마저 그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이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의미에서 볼 때에 자민당 원로들의 '후꾸다 지지'는 오자와로의 정권교체를 막기위한 '고육지책' 혹은 '작전상 후퇴'라는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후꾸다 전 장관이야말로 외교안보 노선에 있어서는 자민당내 대표적인 '비둘기파'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비둘기 외교'로 70년대 일본 외교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후꾸다다께오(福田赴夫) 전 총리의 아들인 후꾸다 전 장관은 고이즈미 재임기간 중 여러차례 강도높게 고이즈미 외교를 비판해왔다.

"'야스쿠니 참배로 보수층의 지지만 얻을 수만 있다면 아시아국가들과의 신뢰관계 따위는 상관이 없다'는 오만한 발상이 아시아 국가들의 불만과 분노로 이어지고 있다", "아시아와 갈등을 빚으면서 미국과 잘 해보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대미관계와 대아시아관계는 병존하는 것이다.", "한국 및 중국과의 관계가 정상화된지 30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단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등이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당시 일본 정계에서는 이와같은 후꾸다 전 장관의 행보를 두고 "'후꾸다 독트린'이 30년만에 부활했다"는 평가를 일제히 내린 바 있다. '후꾸다 독트린'은 지난 77년 후꾸다 당시 총리가 필리핀을 방문하여 1) 일본은 군사대국의 꿈을 포기한다, 2) 아시아 국가들과 마음을 열고 소통하겠다, 3) 대등한 입장에서 협력관계를 구축하겠다의 '對아시아 평화외교 3원칙'을 발표한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후꾸다 독트린'이 발표된 배경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른바 '가꾸후꾸전쟁(角福戰爭, 다나까 가꾸에이의 '가꾸'(角), 후꾸다 다께오의 '후꾸'(福), 두 앞글자를 따서 붙임)이 그 발단이다. 1972년 일본 총리 선거를 앞두고 국졸 학력의 다나까 가꾸에이는 도꾜대 출신의 후꾸다 다께오에게 초반부터 뒤지다가 '중일 국교 수립'을 공약으로 내세워 미끼 다께오 및 오오히라 마사요시와의 연대를 전격적으로 성사시켜 결선투표 끝에 후꾸다를 눌렀던 것이다. 당시 외무상이었던 후꾸다는 우방국가인 대만과의 관계를 의식하여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이 대역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나까의 '중일 국교 수립' 약속에도 불구하고 당시 아시아 국가의 일본에 대한 분노와 불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특히, 공약의 당사자인 다나까 가꾸에이 수상이 동남아시아를 방문했을 때에 격렬한 반일시위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 후꾸다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것이 '후꾸다 독트린'을 구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포스트 아베'의 대안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후꾸다 전 장관은 과연 새 지도자로서 '롱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민당 원로들의 '고육지책'은 과연 빛을 발하게 될까? 이에 대한 해답은 전적으로 후꾸다 전 장관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후꾸다 전 장관이 모리-고이즈미-아베로 이어져온 자민당 내 보수노선을 급격하게 수정하러 나설 경우 심각한 당내 반발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으며, 그렇다고 자민당 주류파들의 목소리를 지나치게 의식하여 스스로의 목소리를 죽여가며 보수 일변도로 내각을 이끌어갈 경우 정권교체 여부를 놓고 벌이는 오자와이찌로와의 한판승부에서 참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신중한 정치인'으로 불리우는 후꾸다가 어떻게 '중용(中庸)과 기다림의 미학(美學)을 발휘하여 자민당이 일본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는 셈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에 민주당의 오자와 대표는 이번에야 말로 강적을 만났다고 볼 수 있다. 일단 72세라는 연령이 말해주듯이 정치적 경륜과 역량에 있어서 후꾸다는 아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또한, 집안은 좋았지만 비명문대 출신에 공직경험도 일천했던 아베와 달리 후꾸다는 일본 최고의 명문 중 하나인 와세다(早稻田) 대학교 정치학부를 나와 총리 비서관과 외무차관을 거친 베테랑 정치인이다. 뿐만 아니라 모리 내각과 고이즈미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무려 3년간 지내며 내각 살림을 책임졌다. 66세의 오자와가 53세의 아베는 장난감 주무르듯이 갖고 놀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후꾸다에게는 그렇게 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본 정치권에서는 후꾸다의 등장이야말로 35년만에 '가꾸후꾸전쟁'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오자와는 다나까 전 총리의 적통을 잇는 후계자이며, 후꾸다는 후꾸다 전 총리의 적통을 잇는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35년 전 당시에도 그러했듯이 오자와(다나까)의 '통큰 정치'와 후꾸다(아버지 후꾸다)의 '섬세하고도 유연한 정치'의 맞대결에서 어떻게 승부가 가려지느냐에 대해 일본 국민들이 서서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35년 전에 등장한 '가꾸후꾸전쟁'이 결과적으로 중일수교와 동북아 평화무드 조성에 기여했듯이 후꾸다의 등장으로 재점화된 '리턴매치'로 인해 일본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와 동북아의 역학관계가 어떻게 재편될 것인지 관심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차기 총리 선출은 오는 15일 자민당 총재선거 후보자 등록 및 그 후 1주일의 경선 기간을 거쳐 9월 23일 중의원 및 참의원 자민당 소속 의원들의 투‧개표가 완료될 예정이며, 자민당 신임 총재 당선자를 대상으로 9월 24일 중의원 ‧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총리 지명 투표를 거치게 되며, 빠르면 9월 25일 중 신 내각이 발족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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