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상철'님이 필자의 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이명박이 현재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는 취지의 글을 쓴 것을 보았다. 그가 펼친 논지에 대해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글이 큰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객으로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비록 냉소적 시각을 바닥에 깔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을 진단하고 분석하려는 진지함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상대후보에 대한 비아냥과 조롱으로 논리의 부족을 교묘하게 감추려드는 '시대유감'이나 '베리타스' 류보다는 훨씬 낫다. 앞으로 그의 글이 어떻게 펼쳐질 것이고 어떠한 방향으로 진화해나갈 것인지에 대해 사뭇 기대가 된다.
어차피 이 글이 '정상철'님에 대한 반박 글의 성격을 띄고 있기에 한가지 질문을 그에게 던지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무려 8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압도적인 여론조사 1위를 기록해오면서도 이명박이 여전히 '불안한 후보'로 자리매김 되어있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물론, 대부분의 이명박 지지자들은 '불안한 후보'라는 낙인 자체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필자는 '정상철'님의 경우 그러한 부류와는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받아들일 것으로 믿고 있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명박 지지자들 말대로 이명박이 결정적인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박근혜가 대단한 '포지티브'를 보여준 것도 아닌데 왜 이명박이 '불안한 후보'라는 낙인이 여론에 먹혀들어가는 것일까?
이명박이 현대건설 CEO로서 대단히 뛰어난 전문경영인이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한, 그가 서울시장으로서 대단히 많은 업적을 쌓았다는 것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그와 관련되어 터져나오는 각종 의혹에 대해 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그것을 사실로 믿는 것일까? 현대건설 사장이나 서울시장이나 모두 사회 지도층의 일각을 이루는 명실상부한 공인이다. 따라서 그가 1977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15년간 현대건설 CEO로서 재직했던 기간과 관련된 내용은 거의 대부분이 기록으로 남겨져있으며, 그것은 숨길 수도 속일 수도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울시장으로서의 그의 일거수 일투족도 모두 공개된 팩트로 남아있기에 결코 '두 개의 진실'은 존재할 여지가 없다.
이와는 퍽 대조적으로 박근혜의 인생역정은 그야말로 '미스테리'로 뒤덮여있다. 아버지인 박정희와 관련된 내용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알려져있지만 유신정권 시절 '퍼스트레이디' 대역으로 활동했던 박근혜와 관련된 내용 중 상당수는 베일에 가려져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1980년 전두환-노태우 중심의 신군부 정권이 들어선 이후 1998년 대구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될 때까지의 박근혜의 행적 역시 상당부분 베일에 가려져있다. 1952년생임을 감안할 때 지금까지의 55년 중 절반에 가까운 무려 24년이 베일에 쌓여져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박근혜를 '베일에 가려진 후보' 혹은 '불안한 후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명박과 이명박 지지자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미치고 펄쩍 뛰고 싶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닌 박근혜가 어떻게 '검증'을 입에 담아?"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매우 쉽게 풀린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한번 묻겠다. 당신에게 두 명의 선배가 있다고 가정하자. 한사람은 명문대를 나와서 일류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뒤늦게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현재 법조인으로 활동중인 사람이며, 또 한사람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호강하면서 살았지만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가 3년 전에 당신과 우연히 이웃으로 마주치게 된 말하자면 '베일에 가려진' 사람이다. 그런데 그 '베일에 가려진' 선배와는 3년 동안 모든 것을 터놓고 지내면서 그 사람의 심성, 가치관, 생활습관, 꿈과 목표 등에 대해 당신이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법조인 선배의 경우 동창회 모임에 갔을 때 간간히 다른 선배들이 그에 대해 험담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되고, 고등학교 은사로부터 어느날 느닷없이 "○○야, 너 △△하고 비교적 친하게 지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에게 요즘 무슨 문제 있냐?"하는 연락이 온다.
팩트로만 놓고보면 법조인 선배가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베일에 가려진' 선배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법조인 선배는 명문대를 들어갈 때, 대기업에 입사할 때, 사법고시에 합격할 때, 법조인으로서의 공인 생활을 할 때 등 수많은 사회적 스크리닝 절차를 거친 사람이지만 '베일에 가려진' 선배의 경우 그 어떠한 스크리닝 절차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와같은 상황에서 누군가가 당신에게 법조인 선배와 '베일에 가려진' 선배 두 사람에 대해 똑같이 험담을 늘어놓을 경우 당신은 그 두 사람 중 누구 편을 들어줄 것인가?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베일에 가려진' 선배라고 말할 것이다. 왜 그런가? 정답은 "내가 3년 동안 직접 눈으로 보았고,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스크리닝 보다는 개인적 스크리닝이 의사결정을 하는데에 있어서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법조인 선배의 경우 명문대, 대기업, 사법고시, 법조인 등 그를 포장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보호막이 되어주기도 하는 찬란한 '울타리'가 존재했던 반면, '베일에 가려진' 선배의 경우 나와 함께 한 3년 동안 그 어떠한 '울타리'도 없이 몸으로 나와 부딪혔고, 함께 조그마한 신뢰와 성과들을 이루어나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둘 중의 하나가 범죄자라고 한다면 당신은 누구를 '무죄'로 지목할 것인가? 이것이 이명박이 '불안'하고, 박근혜가 감히(?) '검증'의 칼을 뽑아들 수 있는 이유다.
지난 2004년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 나왔을 때에 한나라당은 그야말로 '적과의 동침'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재오는 '유신공주'라며 노골적인 헐뜯기에 나섰고, 탄핵정국으로 지지율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었던 열린우리당은 박근혜가 당대표가 될 경우 4.15 총선이 도리어 '식은 죽 먹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은근히 박근혜 당선을 기대하는 눈치를 보였고, 일부 보수 지식인들은 김정일 면담 전력을 거론하면서 박근혜의 사상을 문제삼기도 하였다. 다시말해 한나라당내 재야 민주화 운동 출신들로부터는 '유신공주'라는 비난을 받고, 보수 지식인들로부터는 '친북'이라는 의심을 받으면서 당 대표 경선에 임할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처지 속에서 힘겹게 대표에 당선된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당 대표가 되자마자 곧바로 4.15 총선을 위해 전국을 누비고 다녀야만 했다. 그 당시에 박근혜가 짋어졌던 '한나라당'이라는 것은 프리미엄이 아니라 부도 일보직전의 거대한 빚이나 다름없었다. 그와같은 상황 속에서 30석 획득도 어려울 것이라는 비아냥을 뒤로 한 채 121석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그 후 청와대와 집권여당이 '대연정' 제안, 국보법-사학법-과거사법-신문법 등 4대입법 날치기, 과거사 정리 등 수많은 강공 드라이브를 걸어왔음에도 도리어 한나라당은 굳건한 가운데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무려 7차례나 갈아치웠을 뿐아니라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44-0이라는 전무후무한 '불패 신화'까지 이룩했다. 특히, 2006년 지방선거의 경우 테러로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열세지역을 모두 우세지역으로 돌려놓는 놀라운 투혼으로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감동시켰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숨어있다. 박근혜의 '기적'은 전 국민이 증인으로서 생생하게 현장을 목격했고, 자원봉사자와 지지자로 함께 참여해서 이룩한 것인 반면, 이명박의 '기적'은 정주영과 이회창이라는 '울타리', 그리고 현대건설과 한나라당이라는 거대조직으로서 누리는 각종 프리미엄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박근혜의 '성공 스토리'는 개인적 스크리닝을 통해 검증된 것이지만 이명박의 '성공 스토리'는 언론, 방송, 자서전, 후일담 등 사회적 스크리닝을 통해 검증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 자신'에게 더 큰 믿음을 부여하는가? 아니면 언론, 방송, 자서전 등에게 더 큰 믿음을 부여하는가? 박근혜의 27%는 '나 자신을 믿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쌓아올려진 것이지만 이명박의 35%는 언론, 방송, 자서전 등을 통해 얻어진 지식과 느낌의 편린에서 출발하여 쌓아올려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신뢰'가 사라진 사회다. 조선-중앙-동아 등 3대 일간지에 실리는 기사가 모두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의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MBC-KBS-SBS 등 공중파 방송이 오로지 진실만을 말한다고 믿는 사람으 수도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고 쏟아져나오는 각종 서적, 동영상, 강연 등이 진실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점점 없어지고 있다. 내가 목격한 것이고, 내가 그것이 진실되다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떠한 '네거티브'나 흑색선전이 쏟아져나오더라도 흔들림없이 나아갈 수 있지만, 그러한 개인적 스크리닝의 경험이 없다면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나오는 의혹 기사에 대해 결코 초연해질 수 없다. 결국, '홍보'와 '줄 세우기'의 달인이었던 이명박 캠프가 최근 진행되고 있는 검증 국면에서는 도리어 부메랑적 성격의 역풍을 맞고 있는 셈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홍보'와 '줄 세우기'에 무관심하다고 할 정도로 초연한 박근혜 캠프는 경선 일정이 가까와지면 가까와질수록 더욱 강한 결집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와같은 박근혜의 힘은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메가톤급' 폭발력을 갖는다. 어쩌면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청와대에 입성하는 국가지도자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역사상 처음으로 재벌의 신세를 지지않고 청와대에 입성하는 국가지도자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이명박 보다 훨씬 더 '베일에 쌓여있는' 박근혜가 '흠없는 후보'로 포지셔닝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어떠한 배후세력과 유착되어 있다는 정황 증거를 도무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망라해서 박근혜를 돕고있는 언론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 급작스럽게 부상하여 재계의 돌풍의 핵이 될만한 재벌그룹도 존재하지 않는다. 김재정과 이상은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라있는 반면, 박근령과 박지만은 언론 근처를 얼씬도 못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박근혜는 국민과의 소통 및 신뢰의 벽돌을 하나씩 쌓아올라간 것이다.
현대건설 CEO, 국회의원, 서울시장이라는 굵직굵직한 공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오면서 이명박이 '순도 100%' 무결점 인간이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과거에 그가 부동산투기로 의심되는 행동을 했건, 친인척과 연계된 특혜에 연루되었건, 순간적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거나 거짓말을 했건,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가 대통령으로서 결격사유를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부정선거(이승만), 군사쿠데타(박정희-전두환-노태우), 매관매직에 해당하는 공천헌금(김영삼-김대중) 등 수많은 결점을 갖고있던 정치인들이 무난히 당선되었던 것이 바로 우리 헌정사다. 우리의 정치풍토가 그러하고, 국민들의 수준이 아직도 그 수준인데 어찌 이명박에게 모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말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후에 개과천선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추잡했던' 과거가 '깨끗한' 미래로 바뀌기 위해서는 한가지 전제조건이 따라붙는다. 그것은 현재가 과거와 달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부동산투기를 했다면 지금은 절대로 부동산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겠다는 결의를 국민들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언론 및 재벌과 유착하여 서로 특혜를 주고받는 관계였다면 지금은 그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려야만 한다. 과거에 어쩔 수 없이 불법을 저지르거나 거짓말을 했다면 지금은 준법과 진실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 거론되고 있는 대선후보들 중 조중동과 가장 유착된 관계를 갖고 있는 것도 이명박이요, 재벌들과 가장 유착된 관계를 갖고 있는 것도 이명박이요, 부동산투기에 대해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며 가장 솜방망이 대책을 갖고 있는 것도 이명박이다. 그의 현재가 과거와 전혀 차별화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미래에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이명박의 '아킬레스腱'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은 1998년 이후의 박근혜의 행보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투명한 일직선 상에 놓여있다. IMF 외환위기로 도탄에 빠진 국가를 살리는데에 힘을 보태겠다며 출사표를 던진 1998년의 박근혜, '제왕적 총재'를 고집하는 이회창에 맞서 당내 민주화를 외쳤던 2002년의 박근혜, 당과 나라를 구하겠다며 '붕대투혼'으로 전국을 누비고 다닌 2004년의 박근혜, 당을 살려냈듯이 나라도 반드시 살려내겠다며 대선 출사표를 던진 2007년의 박근혜... 이들 속에서 전혀 이질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박근혜는 과거나 현재나 원칙과 소신으로 일관해왔고, 어떠한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불법이나 편법을 동원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런 그녀라면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여전히 원칙과 소신으로 일관할 것이고, 그 어떠한 유착이나 불법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고, 그 누구에게도 약점잡힌 것이 없는 대통령을 뽑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한나라당에게 임한 그러한 복을 기쁘게 맞이할지 아니면 멍청하게 걷어찰 것인지 그 운명의 순간이 이제 20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 한나라당의 선택을 지금 대한민국이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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