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타결 50여일만에 공개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은 큰 줄기에서 보면 기존에 알려졌던 내용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다.
하지만 무역구제 등 몇몇 분야에서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이 모습을 드러낸데다 협상과정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됐던 투자자-국가소송 제도 등 일부 조항은 해석을 둘러싼 논란의 불씨가 여전한 상황이다.
◇ 투자자-국가제소 대상 여전히 논란
지금까지 투자자-국가제소(ISD)의 대상은 협정상 규정된 의무를 위반한 조치로 입은 투자손실, 특히 간접수용이 주된 논란거리였지만 협정문 공개결과 투자계약이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가 외국인 투자자와 맺은 투자계약상의 의무위반도 ISD의 대상임을 규정한 조항으로, 현재 인천 제2연육교 건설사업이 이런 형식에 해당된다.
간접수용 관련 부속서에서 간접수용으로 보지 않기로 한 공공정책 대상에 보건,안전,환경관련 비차별적 조치가 포함됐지만 이들 조항도 '드문 경우'(In rare circumstances)에는 간접수용이 될 수 있도록 했다. ISD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정부가 간접수용 범위에서 배제를 추진했던 부동산 정책은, '부동산 가격안정화정책'이라는 표현으로 포함됐다.
하지만 부동산 정책이 아닌 부동산가격 안정화 정책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는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다.
정부는 이날 협정문과 함께 낸 자료에서 분양가 상한제, 원가공개, 토지.주택거래 허가제, 개발부담금, 종합부동산세 및 양도세 강화 등이 부동산 가격 안정화 정책에 포함된다고 주장했지만 협상단의 한 관계자는 "특정정책이 부동산가 안정화 정책인지 여부는 중재판정 과정에서 판단될 것"이라고 말했다.
◇ 세이프가드 재발동 금지-반덤핑 조항 분쟁절차 제외
무역구제분야에서 관세 철폐로 상대국의 제품수입이 급증할 경우 발동할 수 있는 양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에서는 '동일상품 재발동 금지'조항이 새롭게 등장했다.
김종훈 한미FTA 협상 수석대표는 "우리가 대미 공산품 수출이 많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지만 반대로 미국산 농산물의 급속한 유입을 막을 안전장치 가운데 하나가 힘을 잃었다는 점은 적지않은 논란이 예상된다.
방대한 미국시장에서 우리 주력 수출품중 관세 철폐시 세이프가드를 유발할 정도로 미국시장에 급속도로 침투할 공산품은 흔치 않은 반면, 관세 철폐시 미국산 농산물이 급격하게 국내 유입할 가능성은 훨씬 크기 때문이다.
농산물 보호를 위한 보다 강력한 조치인 특별 세이프가드가 있지만 이는 30개 품목에만 한정된다는 점이 고려돼야 한다.
별로 얻은 것이 없는 무역구제에서 그나마 성과로 거론되는 '조사개시전 사전통지 합의', '가격.물량 합의'조항을 미국이 위반했다고 판단돼도 아예 분쟁해결 절차의 제소 대상에 올리지 못하게 된 점 역시 큰 구멍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미 의회가 협상 결과를 승인하도록 하는데 걸림돌이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며 대신 실질적 점검장치를 도입했다"고 주장하지만 시시비비를 가릴 기회가 원천적으로 배제된 조항이 어떤 구속력을 가질 지는 의문이다.
◇ 배기량 세제 원천 금지..미국산 유럽차 일부도 뚫려
자동차 분야에서는 자동차세, 특별소비세 등 현행 배기량 기준세제를 완화해주는 합의를 넘어 아예 추후 배기량을 기준으로 하는 세제의 도입을 하지 않기로 약속해준 점은 "자동차 세제에 관한 우리의 권리를 포기한 게 아니다"라는 정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조세주권 침해'의 소지를 안고 있다.
배기량 기준 세제가 한국에만 존재하는 차별적 세제가 아니며 환경보호 측면에서 긍정적인 세제인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자동차 원산지 판정을 위한 제품의 부가가치 계산시 각각 한국산과 미국산임을 입증하기 위한 비율은 순원가법의 경우 35%, 공제법은 55%선에서 합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산업자원부 관계자는 "두 방식은 계산방법이 달라 비율의 차이가 있을 뿐, 두 방식에 따른 비율은 실질적으로 동일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원산지 판정비율이 낮게 설정됨으로써 미국산 일본 브랜드 차량들의 무관세 수입을 막기 어렵게 됐고 특히 미국산 부품비율이 낮아 한미 FTA와 무관할 것으로 여겨졌던 일부 미국산 유럽 브랜드 차량도 특혜 대상에 포함될 전망이다.
산자부 관계자는 "정확한 비율 산정을 해봐야하지만 추정해봤을 때 미국산 BMW X5(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이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지재권 정책부담 만만찮아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 등 미국이 강력하게 제기했던 지적 재산권 강화와 관련해서는 우리측이 단순한 제도 개편외에도 정책 집행과정에서의 부담이 적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우선 양국은 저작권 침해에 대해서도 범죄수익 몰수제를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지금까지 이 제도는 상표권 침해행위에 대해서만 인정되던 것이다.
영화관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해 영화를 촬영하는 것은 물론, 촬영을 하려고 시도하는 '미수범'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여기에 우리측은 대학가 등의 서적 복제와 관련, 단속을 강화하고 공공부문의 인식제고를 위한 공공교육 캠페인을 시행하기로 했으며 불법 복제는 물론, 불법 인쇄에 대해서도 단속 집행을 강화하기로 했다.
지적재산권 침해에 대한 단속은 미국 제품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우리 정부가 해야할 사안이지만, 단속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명문화함으로써 지재권에 대한 미국의 간섭은 집요해질 전망이다.
◇ 우편 민영화 확대 검토하기로
우리측은 국제 서류 특송의 개방에 합의한 데 이어 우편 전 분야의 민간기업 참여영역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미국측에 약속했다.
우리측이 보낸 부속서한에서 "우편법 또는 관련 법률을 개정해 민간 배달 서비스의 범위를 증대하기 위해 우정당국의 독점에 대한 예외를 점진적으로 확대"하겠다는 내용이 규정돼있다.
앞으로 우편물의 분류기준을 현재와 같이 소포, 편지 등 품목별 방식에서 무게나 가격기준으로 바꾸고 여기서 일정 기준 이상의 무게나 가격범위에 민간기업의 참여를 늘리는 방식이 되면 자연스럽게 민영 우편의 범위가 넓어지리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다만 이는 전형적인 비구속적 문서이자 선언적 문서"라고 설명했다.
◇ 개성공단, '노동기준' 충족 어려워
부속서를 통해 '역외가공지역'(OPZ)을 지정할 수 있도록 우회하는 방식으로 규정된 개성공단 문제의 경우 협정 타결 직후 관측됐던대로 적지 않은 난관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협정문은 OPZ 지정조건으로 ▲한반도 비핵화 진전 ▲OPZ 지정이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 ▲OPZ내 일반적 환경기준, 근로기준과 관행, 임금, 경영.관리관행 등을 설정했다.
이 가운데 최대 논란거리는 역시 '근로기준과 관행, 임금, 경영.관리관행'등이다. 사회주의 북한의 특성상 국제규범에서 봤을 때 이런 기준의 충족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의회에서는 여전히 "개성공단 제품은 노예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는 비판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정부는 개성공단 문제에서 미국으로부터 큰 양보를 얻었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이들 기준대로라면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받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정부는 "노동 및 임금 조건은 임금직불 문제를 포함해 점차 개선되고 있는 과정이며 현재 역외지역에서 가동중인 공단은 개성 공단이 유일한 상황에 비추어 향후 개성 공단이 제일 먼저 역외가공지역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jski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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