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명 미디어워치 온라인편집장, 폴리뷰 편집국장] KBS 언론노조와 길환영 사장 양측을 작심하고 비판한 김시곤 보도국장은 개인적으로는 아마 이번 기회에 양측의 잘못된 행태가 바로잡히길 바라는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점심자리에서 아이템을 논의하던 과정에서 나왔던 얘기가 앞뒤 맥락이 잘린 채 의도와 달리 실언이 되도록 ‘공작’ 수준의 사건으로 만들어버린 언론노조와, 윤창중 사건 따위의 보도에만 집착해 대통령 심기만 살피는 길 사장 모두 언론인으로서 부적절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언론노조의 교활한 음모는 가려지고 정권의 KBS 개입 논란만 키웠다. 세월호 참사를 악용해 김문수를 때려잡으려던 그런 언론들이 김시곤의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적다’는 언론노조 측의 소스를 최대한 활용해 결국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의 부적절한 발언까지 끌어낸 격으로, 박대통령까지 곤란에 빠지게 한 셈이다. 애초 언론노조의 의도는 자신들 입맛에 맞지 않는 김시곤을 보도국장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이었겠지만, 뜻하지 않게 청와대까지 곤란하게 만드는 의외의 수확까지 거둔 것이다.
정무 수석으로서 박 수석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알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그가 정무 감각 부족은 물론 얼마나 언론에 대한 이해와 정보가 없는지 새삼 놀랐다. 흥분한 여론에 놀랐다고 대뜸 KBS에 달려가 조치를 부탁한 건 최악의 실수다. 누가 봐도 언론사에 대한 간섭이고 정권의 개입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최민희 의원과 같은 이들이 건수만 잡으면 MBC·KBS·종편사 등 언론사 일에 감놔라 배놔라 식의 노골적 간섭을 하고 있지만, 언론은 야당의 간섭과 개입 문제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무관심한 게 현실이다. 손석희의 JTBC를 비호하기 위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협박성 공문을 보낸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은 최민희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도 MBC를 방문해 보도국 간부들에게 민주당에 유리한 보도를 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공격해 ‘보도지침’ 논란에 휩싸인 인물이다. 그 외에도 민주당 측 인사들의 숱한 언론 개입 논란과 부적절한 행동이 있었지만 언론의 눈은 오직 청와대로 향해 있다. 그걸 알았다면 박 수석이 KBS에 그런 부적절한 요구를 할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쓸데없이 오해만 더욱 키웠을 뿐이다.
언론노조의 부당공격에 맞선 MBC와 그에 굴복한 KBS
잠시 이야기가 딴 데로 샜지만, 필자가 김시곤 보도국장 해프닝에서 느낀 건 KBS의 허약한 체질과 이에 반해 갈수록 단단해지는 MBC의 체질이다. MBC는 알다시피 김재철 전 사장 시절 극렬한 언론노조의 파업을 겪은 후 김종국 사장을 거쳐 지금의 안광한 사장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MBC는 시청률이 곤두박질치고 매출성과도 하락하는 등 큰 곤란을 겪었다. 언론노조 측은 거의 매일같이 지금의 안광한 사장과 이진숙 보도본부장, 백종문 미래전략본부장, 김장겸 보도국장 등 경영진을 공격했지만 이들은 그런 언론노조에 무릎을 꿇거나 뒤에서 적당하게 타협하는 등의 허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언론노조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언론에 의해 ‘사측은 포악한 골리앗 노조는 선한 다윗’이란 선악구도가 만들어지면서 이들은 거의 ‘인간 말종’ 수준의 타락한 인간들로 매도됐지만, 그런 참을 수 없는 인간적 모멸감도 극복해냈다. 언론인으로서 자존심과 원칙을 지키면서 노조의 부당한 간섭과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KBS의 모습에서는 그런 용기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 길환영 사장이 대통령의 심기만 살폈다는 김시곤 보도국장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게 들리는 건, 길 사장 아래에서 故 박태준씨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가 박정희 정권을 미화할 우려가 있다는 노조 반발에 무산된 것이나 신분을 수차례 세탁한 간첩혐의자를 일방적 피해자로 만들어 준 추적60분과 같은 방송,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인 정율성을 미화하는 다큐가 버젓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노조의 반발로 무산되거나 축소 보도된 방송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길 사장이 정말로 대통령의 심기만 살피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가치를 알리는 보도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했다. 길 사장이 정말로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뉴스가 무엇인지 가려내 보도본부를 간섭할 게 아니라 객관적 보도를 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다.
김시곤 날려 위기 자초한 길환영 사장
그런 용기가 있었다면 흥분한 여론에 쩔쩔매는 청와대의 어수룩한 부탁을 넙죽 받아 보도국장의 직을 빼앗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론노조의 모략에 정면 대응을 선언하고 김시곤 발언이 어떻게 왜곡됐는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만나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설득했을 것이다. 김시곤 보도국장이 바보 천치도 아닌데 세월호 참사를 두고 후배들 앞에서 언론노조가 주장하듯 그런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는 건 믿기 어려운 얘기라는 게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이다. 게다가 언론노조 측과 미디어오늘이 보여준 그간의 왜곡 보도 행태 전례만 봐도 누구의 말이 더 신뢰하기 어려운 것인지는 판단할 수 있다. 길 사장이 사실 확인을 하여 왜곡된 여론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보다 그런 언론노조로부터 보도국장을 지켜주지 못하고 청와대와 흥분한 가족의 눈치만 살펴 보도국장의 목부터 친 건 스스로 KBS 사장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걸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수고에도 불구하고 김시곤 보도국장을 날림으로써 스스로 더 곤란한 처지가 돼버린 건 자업자득이다.
김시곤 보도국장의 말대로 KBS 공영방송 사장은 대통령의 눈치만 살피는 사람이 아니라 언론에 대한 가치관과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어야 한다. 정연주 사장 시절 노무현 정권의 이념과 신념을 각종 보도와 미디어프로그램에 녹여 정권의 홍위병으로 만들던 것과 같은 수준의 방송을 만들라는 요구도 더더욱 아니다. 다만 정권과 무관하게 대한민국의 헌법 가치에 따라 주관과 신념을 가지고 언론을 이끌라는 것이다. 그러자면 대통령 심기에나 신경을 쓰다가 중요한 것은 다 놓치는 것이나 사실상 정치집단인 언론노조의 잘못된 행태에 굴복하고 타협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MBC가 수년 동안 이어져온 언론노조의 막장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이제 고질적 병폐를 바로잡기 시작해가는 건 바로 안광한 사장의 그런 신념과 가치대로 MBC가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언론노조의 눈치만 보다가 일격 한 번에 이렇게 흔들리는 건 길환영 사장의 리더십이 안 사장의 그것에 한참이나 못 미친다는 방증이다.
박한명 폴리뷰 편집국장, 미디어워치 온라인편집장 hanmyoung@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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