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위장 화교 유우성씨를 간첩 혐의로 기소한 국정원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추적60분>에 대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위원장 박만, 이하 방통심의위)가 예상대로 중징계를 내렸다. 방통심의위 다수 위원들은 해당 방송이 공정성을 심각히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일부 위원들은 이 방송이 매우 의도적으로 제작됐으며, 재판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러나 야당 측 위원들은 모두 해당 방송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제재 조치에 반대했다. 방송 이후 시청자들의 비판과 항의가 쏟아지고, 시청자위원이 문제 제기까지 하는 등 편파 논란이 끊이지 않은 방송에 대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판단을 내린 것이다.
21일 열린 전체회의에서 방통심의위는 9명의 위원 가운데 박만 위원장을 포함한 여당 측 위원 6명이 <추적60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무죄판결의 전말’편에 대해 법정제재인 경고(벌점 2점)를 결정했다. 방송심의규정 제9조2항(공정성)과 11조(재판 중인 사건) 조항을 위반이라는 이유에서다.
언론노조 등 야권이 지속적으로 문제 삼은 방송심의규정 제11조에 대해 여당 측 위원들은 규정 위반이라는 의견을 냈다. 방송심의규정 제11조 ‘재판이 진행중인 사건’은 “방송은 재판 중인 사건을 다룰 때에는 재판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방송해서는 안되며, 이와 관련된 심층취재는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추적60분>은 이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박만 위원장 “한쪽 주장만 사실로 인정해 여론 왜곡한 프로그램, 중징계 피할 수 없어”
미디어스 등 언론보도에 따르면 박만 위원장은 <추적60분> 해당 방송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지며 근거를 들었다. 박 위원장은 “사회적으로 이목을 끄는 사건은 국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알권리 차원에서 보도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재판에 관련된 보도에는 헌법상 사법권 독립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국민의 알권리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면서 “무분별한 사건을 자세히 보도하는 것은 여론형성에 영향을 안 끼칠 수 없다”고 언급했다.
박 위원장은 “(재판부가) 여론을 의식할 가능성이 있어 결국 사법권 독립이 훼손될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원고와 피고 역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해당 방송이 여론몰이의 도구로 이용돼 실제 재판에 영향을 줄 가능성을 지적했다.
박 위원장은 방송심의규정 제11조와 관련해서는 “검찰 수사나 재판 사건을 전부 다루지 말라는 게 아니다. 또, 1심과 2심 판결 결과를 보도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라면서도 “다만 재판 결과를 예단하거나 단정하는 내용, 상급심 재판중인 1심 판결이 옳으냐, 그르냐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내용을 담지 말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위원장은 KBS <추적60분>이 이러한 해당 조항을 위반한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또한 “해당 1심 판결은 8월 21일에 나왔고 방송은 원래 8월 31일 하려고 했다. 중국의 연길이나 장춘, 북경 출장을 가서 취재한 것을 보면 법원 선고 전부터 취재하고 촬영한 개연성이 높다”며 “이미 판결결과를 예상한 뒤 판결이 나오자마자 2심전에 방송한 것은 어떤 의도성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박 위원장은 “본 프로그램 말미를 보면, ‘유씨 간첩 혐의는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단정했다”며 “이것은 사법권 독립을 위협한 표현으로 대표적으로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라고 주장했다. 더불어 “이 프로그램이 과연 어떤 공공의 이익이 있어서 꼭 이렇게 방송을 해야 했는지, 2심전에 방송해서 어떤 의도가 있는지도 의심스럽다”고 덧붙였다.
박만 위원장은 <추적60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씨 입장에서 유리하게 만들어져 ‘공정성’ 위반 정도가 심각한 점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는 “국정원은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상세한 자료를 내놓을 수 없었던 것”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KBS <추적60분>은 한쪽의 주장만 사실로 인정해 버려 왜곡된 여론을 형성, 여론재판을 유도하는 프로그램으로 중한 제재를 피할 수 없다”고 ‘경고’ 의견을 제시했다.
권력부 부위원장 “판결 전 사전 취재, 매우 의도적이고 편향적인 프로그램”
권혁부 부위원장 역시 “취재 행위 자체가 매우 의도적이고 편향적이었다”고 강한 비판 의견을 내놨다. 권 부위원장은 “KBS <추적60분>은 30년이 넘은 장수프로그램이지만 국내 숱한 상고심 무죄 사건을 한 번도 다룬 적이 없는데 유독 국가 안위가 걸린 간첩 사건에 대해 주목했다”면서 벌점 4점인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의견을 냈다.
권 부위원장은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많은 제작비를 들어 수사의 문제점을 비판했다”면서 “문제는 북한에 거주하는 중국 화교가 탈북자로 위장, 우리나라에 와서 탈북자에게 주어지는 법적 혜택을 이용해 간첩활동을 한 것을 무죄 판결이 나기 전에 사전 취재한 것은 매우 의도적이고 편향적”이라고 지적했다.
엄광석 위원은 “KBS 제작자 의견진술과정에서 제작 이전부터 무죄를 전제로 사전 취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의도를 가지고 제작한 것이다. 또,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결과물임은 누가 봐도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찬묵 위원과 박상희 위원은 각각 “재판에 영향을 끼칠 소지가 다분하다”, “언론이 진실을 구축하는 방식이 사법적 재판 영역을 넘지 않아야 한다” 등으로 ‘경고’ 의견을 냈다.
야당 위원들 “추적60분과 같은 노력 덕에 인권유린 해소” “방송 전 한겨레가 먼저 지적”
그러나 야당 추천 위원 3명은 모두 ‘문제없다’로 제재 조치에 반대했다. 김택곤 상임위원은 “재판에 계류 중인 사건이라는 이유로 언론이 사건을 들여다보는 권리를 제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며 “과거 안보라는 이유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재판이 이뤄져 인권유린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뒤늦게 언론이 <추적60분>과 같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그 억울함을 풀어주고 사회 문제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유우성씨가 억울한 간첩누명을 썼으며 <추적60분>의 방송은 그 억울함을 풀어준 것이라는 뉘앙스다.
장낙인 위원은 “이 프로그램은 피고가 무죄라는 판단을 하지 않았다. 다만 국정원이 제시하는 증거자료가 잘못됐다는 내용을 전달했을 뿐”이라며 “<추적 60분> 방송 전에도 한겨레 등에서 이를 지적하는 기사를 나왔다”고 말했다.
박경신 심의위원은 특히 방송심의규정 제11조에 대해 “해당 조항을 적용하면 재판중인 사건에 대해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차단하는 권한이 생기는 것”이라며 “<통신심의에 관한 규정>을 보면 오히려 심의가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심의중지하도록 한 규정이 있는 만큼 해당 조항 적용은 신중해야한다”고 제재 반대의견을 제출했다.
박주연 기자 phjmy975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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