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박근혜)가 던진 ‘보수 삭제’ 주장 파문이 한나라당과 보수우파 세력의 진지한 정체성 논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비록 박근혜 위원장이 논란의 확산을 막기 위해 “현 시점에서 보수 삭제 논쟁은 불필요하다”며 급한 불을 끄긴 했지만, 그동안 한나라당이 우측 깜빡이를 켜고 좌측으로 가고 있다며 한나라당의 좌클릭 행보를 비판해온 보수우파 진영의 본격적인 ‘보수 논쟁’을 촉발한 셈이다.
물론 한국 보수의 위기가 이명박 정부의 실정과 최근 일련의 사건들 탓만은 아니다. 한국 보수의 위기는 이미 1997년 박근 전 한양대교수가 쓴 ‘한국보수주의 위기’에서도 지적됐었다. 박 전 교수는 이 책에서 “대한민국이 냉전구조의 틈바구니에서 반공일변도의 길을 선택하게되는 와중에 한국보수주의는 본연의 가치관과 도덕성을 간과하고 등한시했다”며 “한국보수주의는 우리나라 전통 문화가치에 뿌리를 둔 본래의 지혜와 가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현재의 보수 논쟁과는 차이를 보이지만, ‘보수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국 보수세력이 15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보수정당의 사실상 보수 포기 선언이 나오기 전부터 보수우파 진영의 내노라 하는 논객들은 이미 각종 보수 담론을 쏟아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보수진영, 각종 보수 담론과 활발한 논쟁을 통해 보수 정체성 찾기 주력
이런 가운데 최근 보수의 정체성을 논한 책 ‘보수는 무엇을 보수하는가’를 출간한 복거일 작가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과의 인터뷰에서 보수의 개념에 대해 “보수는 보수주의나 보수주의자가 아니”라며 “보수는 한 사회에서 정설 아래 정착한 이념과 체제”라고 정의했다.
복 작가는 “보수는 대한민국 헌법에 의거한 기본질서인 자유민주주의이념과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고 유지하려는 노력을 가진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라며 “쉽게 말하면 대한민국의 보수라면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지하는 사람이고, 헌법을 폐기하고 고치려 한다면 그것은 보수를 반대하는 대체세력이라고 일목요연하게 정의 내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복 작가는 이와 같은 정의를 바탕으로 ‘보수 삭제’ 파문에 휩싸였던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보수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일어난 일”이라며 “김종인 씨가 보수 용어를 삭제하자고 한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뜻이 깔려 있는 거고 이로 볼 때 생각이 짧았던 것으로 아주 끔찍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즉, 한나라당이 그간 보수정당임을 표방해오면서도 정작 스스로의 ‘보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해 일어난 사건이 ‘보수 삭제’ 파문으로 나타났다는 게 복 작가의 해석이다.
정체성을 잃고 그때그때마다 시류에 영합하면서 표류해온 한나라당의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지적돼 온 문제이기도 하다. 보수시민사회 주최로 열린 크고 작은 토론회와 함께 작년 말 조선뉴스프레스가 주최한 ‘한국의 보수주의가 나아갈 길’ 토론회도 한국 보수가 안고 있는 고민과 총체적 문제점이 본격 제기된 논의의 장이었다.
‘한국진보세력연구’와 함께 ‘한국보수세력연구’를 펴낸 원로 언론인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는 당시 토론회에서 한국 보수의 뿌리를 조선조 말 집권세력인 수구파에 맞서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도모했던 당시의 진보세력이었던 ‘개화파’로 봤다. 이에 따라 개화파3세대로 이들의 대표 격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한국 보수우파세력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남 교수는 이를 근거로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바탕으로 한 ‘한국적 보수주의’ 사상이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설명했다. 남 교수는 한국 보수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뿌리부터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논지를 펴 나갔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현 정부의 실패를 보수의 실패로 몰아가거나 보수세력 스스로 자조해선 안 된다는 데 방점을 찍었다. 박 교수는 최근의 언론기고문과 토론회를 통해 “최근 연달아 일어난 선거 실패는 ‘보수의 실패’라기 보다는 ‘이명박 정부의 실패’이고 또 ‘한나라당의 실패’로 보아야 옳다”면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보수의 열화와 같은 지지와 신뢰 속에 권력과 정권을 잡았으나, 권력을 위한 권력이라는 ‘권력의지’만 있었을 뿐, 보수의 정체성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그 권력의 방향성과 원칙, 그리고 목적성이 뚜렷하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보수세력과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한 한나라당의 실패를 보수세력의 실패로 크게 확대해 규정해선 안된다는 지적이다.
‘보수대연합’ 통해 보수 정체성 지키고 통합의 리더십 발휘하는 자가 새 리더로 떠오를 것
최근 이와 비슷한 지적을 한 정객이 있다. 바로 이회창 자유선진당 전 대표다. 이 전 대표는 16일 기자간담회에서 한나라당 ‘보수 삭제’ 논란에 대해 "보수의 실패가 아니라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실패이며, 현 정권이 보수를 타락시켰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이 전 대표는 "인류의 역사는 보수를 통해 진화해 왔고, 미국·영국·독일 등 선진국에서도 보수정당이 발전을 이끌어 왔다"며 "한나라당이 처절하게 부서져야 오히려 보수가 살 수 있다"고도 했다. 이 같은 인식은 현재 ‘보수 실패의 공범’으로 억울하게 몰린 보수시민사회의 인식과 정확히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 내에서 보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희룡 의원은 18일 국회에서 '새로운 보수의 가치와 한나라당 비대위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보수 삭제’ 논쟁을 촉발한 비대위의 쇄신 문제와 동시에 보수적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그리고 현 시대에서 그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겠다는 시도로 보인다.
이 같이 범보수 진영 안에서 활발히 전개된 보수 정체성과 가치에 대한 각종 담론과 논쟁의 결과물은 향후 보수대연합의 주요 논리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폴리뷰 박한명 편집장은 “한나라당이 촉발한 보수 논쟁의 결과가 향후 보수대연합의 기본 논리의 토대가 되면서 강력히 작동할 수 있다”며 “박근혜 위원장이 이끄는 한나라당이 사실상 보수를 포기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보수진영의 새 리더는 보수적 정체성을 가장 확고히 하면서도 정치적 포용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과 세력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편집장은 또 “보수대연합 과정에서 박근혜 위원장이 그 통합의 리더십을 과연 보여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대권과도 직결될 수 있는 문제”라며 “그러나 현재 비대위를 통해 본 박 위원장의 소위 ‘중원’에 대한 고집과 고립적인 집권 전략으로 볼 땐 현재로선 그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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