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 EU FTA 처리 과정에서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4.27 재보선을 앞두고 작성한 민주당과의 정책연합 합의문을 내세웠다. 정책연합 합의문에는 “한미FTA 비준안 폐기 및 한 EU FTA 비준안 저지”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박지원 원내대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정책연합 합의문은 야4당(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과 시민사회(민주통합시민행동, 시민주권, 희망과대안, 한국진보연대)가 모두 참여했고, 작년 지방선거 시기인 2010.3.8.에 발표된 ‘5당 정책연합 1차 합의문’과 2010.4.15. 합의에 이른 ‘4당 정책연합 2차 합의문’의 내용을 구체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책연합 합의문은 총 10개항으로서 대부분 민노당식 과격한 반 시장주의 정책이 중심이 되고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물가고, 전세대란, 등록금 등 민생현안 최우선 해결
o 유류, 통신비 등 독과점 가격 인하 추진
o 공공임대주택 대폭 확대와 전월세 상한제, 계약갱신청구권 제도 및 공정임대료 제도 도입을 통한 전세대란 해결
o 친환경무상급식의 확대실시
o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일자리 창출정책의 긴급추진
o 반값 등록금 실현과 소득별 대학등록금제 추진
2. 실효성 있는 구제역-AI 대책 추진
o 구제역-AI 대재앙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 실시
o 축산농민의 생존권 보장, 환경대재앙 방지, 식수대란 방지 및 전염병 방지를 위한
구제역대책특별법 제정
o 매몰지 공개 등 환경 대재앙 관련 국민의 알 권리 보장
3. 최저임금 현실화와 비정규직 제도 개선
o 최저임금 평균임금 50%로 법제화
o 비정규직 사용은 객관적이고 타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로 제한
o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원청사업주의 고용책임을 명확히 하는 노조법 개정
o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사회보험 적용과 노동기본권 보장
o 중간착취를 확대하는 직업안정법 개정안 저지
4. 날치기입법 폐지와 민생예산 회복
o 민생·복지·교육·의료·일자리 예산을 대폭 증액하는 추경예산 실현
o UAE 파병동의안 폐기
o 서울대법인화법 폐지
5. 4대강의 생태적 복원과 친수구역특별법 폐지
o 4대강과 지천의 생태적 복원
o 친수구역특별법 폐지
o 수질, 수량의 환경부 통합관리 실현
6. 한미-한EU FTA 비준저지와 전면적 재검토
o 한미 FTA 재협상안 폐기, 한미-한EU FTA 비준 저지
o 한미-한EU FTA의 독소조항 등에 대한 전면적 검증 실시
o 국회에서의 전면적 법률 검토를 통해, 한미-한EU FTA에 의한 입법권, 사법권 침해 사례 방지
o 의약품 특허-허가 연계 조항 신설을 위한 약사법 개정안 저지
7. 종편방송 선정에 대한 국정조사 실시 및 방송법 개정
o 종편방송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나타난 위법․반칙․특혜 사례에 대한 국정조사 실시
o 종합편성채널의 특혜를 바로잡는 방송법 개정과 날치기 언론악법의 재개정 추진
o 조중동 종편방송 취소방안을 공동으로 마련
o KBS 수신료 인상 저지
8. 한반도평화 실현
o 6․15, 10․4 선언 이행
o 6자회담 즉각 재개
o 한반도평화체제 구축
o 인도주의 원칙에 입각한 정부차원의 대북 인도적 지원 재개, 민간의 대북 인도적 지원 허용
9. 원전 안전대책과 추가 원전건설 중단
o 가동 중인 21기 원전에 대해 민간환경단체 참여하는 원전 안전진단 및 주변지역 원자력 환경영향평가 실시
o 안전진단 결과 노후한 원전에 대해서는 가동중단
o 삼척, 울진, 영덕의 신규 원전부지 선정절차 중단, 추가 원전건설 계획 전면 재검증 및 대안 에너지정책 수립
10. 정당명부제 확대 등 정치개혁 공동추진
이러한 정책연합 합의문 대로라면, 6월 국회에 상정될 한미FTA는 논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 그대로 폐기시키겠다는 게 민주당과 야당들의 합의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작정 FTA를 반대하자는 게 아니다”고 설명한 손학규 대표의 생각과도 큰 차이가 난다.
더 심각한 것은 이들이 이미 법안이 통과되어 현실에 반영되고 있는 제도들을 다 폐기시키겠다 공언한 점이다. UAE 파병동의안 폐기, 서울대법인화법 폐지, 조중동 방송 취소가 그런 것들이다.
한겨레, “정책합의문 대로 조중동 방송 취소하라” 압박
최저임금을 평균임금의 50%로 법제화하여 사실 상 큰 폭의 인상을 하자는 것이나 ‘비정규직 사용은 객관적이고 타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로 제한’ 하자는 내용은 문자 그대로 집행하면 고용시장과 중소기업을 파탄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위험한 정책이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이러한 정책을 당론으로 대부분 확정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손학규 대표의 민주당이다. 민주당 내에서 이러한 정책은 위험하고도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다수의 온건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이 이를 몰라서 이러한 정책연합문에 합의했을 리는 없다.
뒤늦게 이슈가 되고 있는 정책합의문에 대해서는 한겨레신문과 조선일보가 적극 보도하기 시작했다. 한겨레신문은 5월 6일자 박창식 논설위원의 ‘아침햇발’ 칼럼에서 “‘야4당은 4·27 재보궐선거 정책연합 합의문을 통해 “조중동 종편 방송 취소 방안을 공동으로 마련’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리고 선거에 이겼다. 이로써 야당은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정권을 놓고 여당과 겨뤄볼 나름의 출발점을 만들었다. 이 공약을 현실감 있게 주목해도 좋은 이유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조선·중앙·동아·매경 종편이 2011년에 허가를 받았으니 2016년에 첫 재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때 가서 법대로 하면 된다. 물론 2012년에 정권이 바뀌고 방송통신위원회가 지금의 최시중 위원장 체제와는 전혀 다르게, 공정하게 재구성된다는 게 기본 전제다”라며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2016년이면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이제 막 투자와 사업을 시작한 입장에서는 2012년 대선 결과에 따라 방송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면 신경이 거슬리지 않을 수 없다.
박지원도 원내대표, 조배숙 최고위원도 몰라, 손학규 대표가 직접 사인
조선일보는 5월 6일자 ‘4.13 야권합의가 뭐기에’라는 기사에서 “4·13 합의는 민주당이 지난 4·27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민노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 등 야 4당과 재·보선에 출마할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루기 위해 만들었던 '정책연합 선언문'이다. 민주당 이인영 최고위원이 실무협상을 했고, 막판에 손학규 대표가 다른 야(野) 3당 대표와 만나 최종 타결을 지었다”고 문제의 정책합의문이 발표된 경위를 설명했다. 기사에 따르면 박지원 원내대표는 3일 "정책연합 합의문을 어제서야 봤다. 의원총회에서 이런 논의가 구체적으로 없었고 최고위원회의에서도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조배숙 최고위원도 4일 "야 4당과의 정책연합을 의원총회 같은 절차를 거쳐 하지 않고 당 대표 혼자 덜컥 해 와서 조금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일부 의원들은 "제1 야당이 사실상 '민노당 2중대'를 자처한 셈"이라고 했다.
한겨레신문 역시 박창식 칼럼에서 “진보정당들이 ‘조중동 종편 취소’를 못 박자고 했는데 민주당 손학규 대표 쪽에서 화들짝 놀라면서 부담을 토로했다는 것이다. 이에 민주노동당이 정책연합 이탈을 위협했고 시민사회 쪽이 중재에 나서 지금의 문안으로 절충했다고 한다”라고 소개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의 보도를 보면, 정책합의문은 야4당 간에 치밀하게 논의한 것 아니라, 후보단일화를 앞두고 민노당의 정책이 대폭 반영되어 급조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지원 원내대표와 조배숙 최고위원조차 이를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인영 최고위원이 실무를 맡았고 손학규 대표가 최종 사인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즉 손학규 대표는 정책합의문에 대한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의 선거를 이기기 위해 그릇된 정책에 합의를 한 것이고, 선거가 끝났으나,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의 선거연대를 위해 민노당과 진보신당에 계속 발목을 잡힐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정책합의문 알려졌어도, 손학규 대표가 분당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만약 민주당이 이러한 내용의 정책합의문을 그대로 존속시킨다면, 더 이상 민주당과 민노당과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즉 야권연대의 집권은 민노당의 집권이 되는 것이고,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는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민노당식의 정책연대 합의문에 서명을 해야할 판이다.
이번 재보선 분당을에서 중도층 유권자들에게 이러한 정책연합 합의문이 널리 알려졌어도 손학규 대표가 승리할 수 있었을까?
한 EU FTA의 강행처리로 민주당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최고조에 오른 민노당과 진보신당 등은 민주당에 10개 항의 정책연합 합의문에 대한 이행 약속을 촉구할 가능성이 높다. 야권연대의 균열은 한 EU FTA의 통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시작도 안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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