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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경선과 여론조사가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유시민 발언으로 촉발된 국민경선 타당성 논쟁


한 가정이 파탄의 위기에 처해있는 가운데 이혼을 결심한 부부가 서로 양육권을 놓고 다투고 있다. 그리고 끝내 원만한 합의가 도출되지 않자 결국 가족회의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한 쪽이 주장한다. "이 문제를 보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참여시키자"고 말이다. 아내와 친정 식구들은 남편의 술, 도박, 바람피기, 폭력 등이 이미 동네방네 다 소문이 나 있기 때문에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주장을 수용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가족회의에서는 6 : 4로 엄마 쪽이 아이를 맡아 키우는 것으로 결정이 났는데 다른 사람들이 7 : 3으로 남편이 양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바람에 결과가 뒤집혀버렸다. 그 사람들은 무책임하게 말만 내뱉고 떠나가면 그만이지만 그렇게 남겨진 가족은 그 결정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만 한다.

또 한가지 예를 들겠다. 민주적인 결정을 내리기로 유명한 한 연대장이 전쟁에서 동쪽을 먼저 공격할 것인지 서쪽을 먼저 공격할 것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버리다가 결국 투표로 결정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런데 한 참모가 연대장에게 "이 문제를 보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우리 부대원이 아니더라도 징병 대상이 되는 많은 젊은이들의 의견을 부대원들 의견과 함께 투표에 반영하자"고 제안한다. 이에 대해 연대장은 "옳은 지적이다. 전투가 장기화되면 수많은 신병들이 투입될 것이고...그러니 그들도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하면서 말이다.

대체로 부대원들의 기류는 50 : 50인 상황인데 대단히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징병대상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물어보니 80 : 20로 '동쪽'이라는 답변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부대원들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하여 70 : 30이라는 큰 차이로 벌어지기 시작했고, 여기에 80 : 20이라는 결과를 추가해버리니 결국 압도적 표 차이로 '동쪽'으로 결정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첫번째 사례로 거론된 가족은 물론, 두번째 사례로 거론된 부대원들까지 모두 '어리석은 사람'이라며 손가락질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현재 여야를 막론하고 실제로 우리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이다. 더우기, 민노당을 제외하고 한나라당, 대통합민주신당, 민주당 등이 모두 '오픈 프라이머리(개방형 예비선거)'와 '여론조사'를 함께 경선 룰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 이명박, 정동영, 이인제 등 '비주류'에 해당하는 후보들이 일제히 선두를 달리고 있다. 상황만 놓고보면 모두가 이변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정당에서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면 이는 더 이상 이변이 아니다.

왜 이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 열쇠는 최근 유시민 의원이 라디오21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 속에 다 나와있다. 그는 "전북 지역에서 이명박씨가 박근혜씨한테 압승했는데 전라북도 지역의 한나라당 경선에 참여한 수많은 당원이 민주당 당원 혹은 열린우리당 당원이었다. 정당법상, 선거법상 허용되지 않는 일이다. 박사모가 알면 가처분 소송 낼 일"이라고 주장했다. 참으로 놀라운 발언이다.

우리가 대단히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오픈 프라이머리'라는 괴물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처음 이것을 후보경선 방식으로 도입하자고 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국의 경우를 사례로 들고 있다. 즉, 미국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을 막론하고 각 주별로 오랜 관행에 따라 코커스(caucus, 당원협의회)와 프라이머리(primary, 예비선거) 중 하나를 선택하여 대통령선거인단을 선출하도록 되어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양대정당인 공화당과 민주당 중 그 어느 곳도 100% 프라이머리만을 하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약 6:4 정도의 비율로 프라이머리와 코커스를 안배해놓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당연직 선거인단(중앙당직자 및 지방당조직)을 포함시키면 대체로 당원과 일반국민의 비중이 5:5 정도로 비슷해지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가 한국과 미국 사이에 있다. 통상적으로 미국에서 여론조사로 '지지 정당'을 물어보면 공화당과 민주당이 각각 45% 정도 나오고 '무당파층'이 10% 정도 나온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면 약 40% 정도가 '한나라당'이라고 답하고, 범여권과 민노당 지지층이 약 25%, 그리고 무려 35%가 '지지정당 없음'으로 나온다. 더욱이, 최근 5년간만 보더라도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7%에서 58%까지 출렁였고, 열린우리당 지지율 역시 7%에서 65%까지 변화하는 등 그 폭이 대단히 컸다. 이같은 점을 감안하면 진성 지지자들은 어느 정당을 막론하고 대체로 10~15% 수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35%의 '무당파층'에 35%의 '중도층'을 합치면 무려 70%라는 숫자가 나오게 된다.

최근 여야 정치권은 공히 '역선택' 문제에 예민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박근혜 지지자들은 이명박이 경선에서 승리한 것이 범여권 지지자들의 '역선택'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이해찬-유시민 지지자들은 정동영이 통합신당 경선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가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역선택'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같은 역선택 문제가 제기되는 이유가 결국은 시류에 따라 한나라당과 범여권 사이를 넘나드는 35%, 그리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위해 '정치공학 박사학위'를 줘도 될만큼 교활하고 전략적인 일부 진성 지지자들의 존재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에 한나라당 지지자 상당수가 참여하여 의도적으로 노무현을 선택하였다는 것이 당시 정몽준 진영의 주장이었다.

미국에서는 이같은 일이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민주당 지지자라는 것을 숨기고 공화당 예비선거에 참여할 만큼 대담하고 교활한 유권자들이 거의 없을 뿐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기에 그와같은 '변절행위'(비록 그것이 전략적이고 의도된 것이라고 할지라도)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특히,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3대째 특정 정당을 지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와같은 일은 가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국 정당들이 '역선택'에 대해 전혀 무방비 상태인 것은 아니다. 미국 내에서 선거인단으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증빙자료 중 하나가 필요하다. 즉, 과거 선거에서 선거인으로 등록했었다는 것을 입증하거나, 이번에 처음 선거인으로 등록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이 데이타를 통해 미국 선거관리위원회는 해당 선거인이 공화당 예비선거에 동시에 등록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철저하게 검증한다. 그 과정에서 '부정투표 혹은 위장투표'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중징계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이같은 리스크를 너무도 잘 알고있는 미국인들은 감히 '역선택'이라는 것에 대해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정당의 대통령후보는 당원들의 의사가 가장 많이 반영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비당원들의 의사를 반영한다고 할지라도 해당 선거인이 다른 정당의 당원이거나 지지자여서는 결코 안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당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것일 뿐아니라 선거판을 극도로 혼탁하게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민주당과 공화당에 이중 등록된 사실이 적발될 경우 당원권 정지 혹은 박탈 등 대단히 강도높은 징계가 내려지게 된다. 만일 실제로 그와같은 '역선택'에 가담했다가 적발되기라도 한다면 해단 인물은 민주당과 공화당 양쪽으로부터 모두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 이같은 '역선택'을 막기 위한 사전 준비는 물론, 이를 근절할 수 있는 대책도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다. 자칫 잘못 운영될 경우 정당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대단히 리스크 높은 제도를 도입하는 데에 있어서 단순히 이것이 어느 후보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만을 놓고 논쟁했을 뿐 제도 자체가 초래할 심각한 부작용과 위험에 대해서는 아예 제대로 된 논의조차 하지 못했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오픈 프라이머리'를 주장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정치인과 지지자들을 '반민주주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낙인찍기에 바빴다. 그렇다면 미국 사회는 온통 반민주주의 세력들로만 가득차 있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정치권에 처음으로 '오픈 프라이머리'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바로 2002년 민주당 국민경선이었다. 당시에 민주당 지도부에 맞서 '정풍운동'을 벌이며 '오픈 프라이머리'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정동영은 현재 그 최대의 수혜자가 되어 통합신당 경선에서 1위 고공행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대단히 역설적으로, 당시 국민경선의 최대 수혜자로 등장하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노무현은 취임한 지 1년도 안되어 민주당을 분당하고 신당을 창당하면서 자신을 후보로 만들어준 민주당을 9석의 '미니 정당'으로 몰락시킨다. 결국, '오픈 프라이머리'를 도입한 댓가로 그 제도 하에서 선출된 후보가 당을 몰락시키는 초유의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한나라당 경선 승리 후 이명박 후보 측이 '점령군'으로 묘사되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당의 후보는 당원들에 의해 선출되는 것이 기본이다. 그래야 당이 앞장서서 후보를 철저하게 검증하고 단련시켜 보다 애당심높고 경쟁력있는 큰 정치인으로 육성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거쳐 후보로 당선된 사람은 당에 대해 더할 나위 없는 애정을 느끼게 된다. '오픈 프라이머리'는 정당과 후보의 관계를 끊으면서 그 자리에 일반국민을 끌어들이는 것이기에 그러한 정당과 후보간의 신뢰관계와 공생관계가 성립될 여지가 없다. 국민경선을 통해 선출된 노무현이 당을 분열시키고, 이를 더욱 확대 발전시킨 경선을 통해 선출된 이명박은 취임 후 신당을 만들 것이라는 루머에 휩싸여있다. 그렇다면 과연 '오픈 프라이머리'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파괴하기 위한 것인가?

여론조사 결과를 후보 선출과정에 반영시키는 것도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앞선 예에서 보았듯이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것만 갖고도 '대세몰이'와 '밴드웨곤 효과'가 크게 발휘되기 마련인데 그러한 과정을 통해 더욱 고착화되고 증폭된 것을 또다시 최종결과에 반영한다는 것은 사실상 '여론의 거품 혹은 조작'이 침투할 가능성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남아있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한나라당 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고 개혁적이라고 쉴새없이 주장하는 범여권 정당들이 여론조사 반영에 대해 하나같이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여론조사라는 것은 민심을 측정하는 바로미터일 뿐 그 자체가 심판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우리 정당들은 관중석에 머물러있어야 할 여론조사를 심판석으로 올려놓아 버렸다. 그리고 이것은 '오픈 프라이머리'와 더불어 또 하나의 정당 민주주의의 적이 되어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다. 현재 여론조사 응답률은 5~10%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에서의 투표율은 아무리 낮아도 70% 수준은 나온다. 그런 상황에서 여론조사가 당내경선과 본선 판도에 큰 영향을 미칠 뿐아니라 당내경선에서는 무려 20%나 반영되는 막강한 위력을 갖고 있다면? 이것은 5~10%의 신뢰성 밖에는 갖지 못하는 민심이 70%의 신뢰성을 갖는 민심에 영향을 미치는 결과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역선택'을 광범위하게 허용하는 국민경선과 '민심왜곡'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여론조사를 통해 선출된 후보는 당원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로부터도 그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갈수록 여론조사 응답률이 떨어지고 범여권 경선 투표율이 추락하는 이면에는 이같은 제도 자체가 갖는 결함이 존재한다. 스스로 신뢰도를 내팽개치면서 어떻게 국민들을 향해 지지를 호소할 수 있겠는가? 정치권은 이제라도 차분하게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에 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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