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는데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서울 한복판 보신각에서 열리는‘제야의 종’타종 행사이다. 이것은 서울시장이 주관하는 한국의 주요행사 중 하나로서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가 되는 우리에게 익숙한 새해 풍습이다. 2012년을 맞는 서울시의 타종행사는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초청되어 화제를 모았는데, 박원순 서울시장 외에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와 혜문 스님, 프로축구 제주 유나이티드의 신영록 선수 등 시민 대표 10명이 초대받아 새해를 알리는 종을 울렸다. 과거 보신각‘제야의 종’타종행사는 서울시장과 각 기관장 등 이른바‘높은 분’들의 잔치였다. 그러던 것이 1993년 권위적인 분위기를 없애고자 상인, 근로자, 어린이 등 일반 시민 중에 선발된 시민대표가 서울시장과 함께 타종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제야의 종’은 일본의 풍습 하지만 올해의 타종행사만큼 어색하고 위화감이 드는 때는 일찍이 없었다. 먼저‘제야의 종’행사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실‘제야의 종’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어와 시작된 일본의 풍습이다. 매일신문은 2008년 12월 27일자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제
2004년 7월 당시 대통령이던 노무현은 일본에 대해서“재임기간 중 과거사 문제를 언급 않겠다”고 발언하여 큰 파문을 큰 일으킨 바 있다. 이는 일본과 앞으로 미래지향적인 우호관계를 만들어가겠다는 취지로서, 한일외교에서 가장 민감한‘일본과의 역사’를 아예 언급하지 않겠다는 실로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불과 6개월 뒤인 2005년 3월1일 3.1절 기념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을 향해“과거의 진실을 규명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배상할 일이 있으면 배상하고 그리고 화해하자”며 갑자기‘역사문제’를 또 들고 나와 일본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6개월 전 했던 발언과는 상반되는 내용이었지만, 묘하게도 노 대통령의 식언(食言)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그리 많지 않았고 오히려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노 대통령은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일까? 그것은 당시 두 달 후로 예정된 4.30 재보선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갤럽의 조사결과를 보면 노 대통령은 정권출범초기인 2003년에는 59%의 지지율을 보이다 2004년 8월에는 22%까지 급락하는 등 많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때 일본에 대해 강경발언을 들고 나온 것이다. 갑작스런 대일강경발언의
지난 11월26일, 서울시는 서민층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희망온돌프로젝트’와 관련 시민의견 청취를 위해 워크숍을 마련했다. 여기에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 200여명의 시민들과 서화진 푸른시민연대 사무처장, 원기준 사랑의연탄나눔운동본부 사무총장, 박철수 반값고시원 추진운동본부장 등이 참가해 시민단체 입장과 서울시 지원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 자리에서 박 시장은 희망온돌프로젝트가 서울시와 시민단체의 민관 협력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빈민들의 겨울나기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2주 후인 12월13일, 서울시는 희망온돌프로젝트 일환으로 노숙자들이 이번 겨울에 밥을 굶거나 추위에 떠는 일이 없도록 서울역 지하보도 일부를 활용,‘노숙인 응급대피소’를 설치해 24시간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노숙인 응급대피소는 서울역의 골칫거리로 등장한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설로서 온돌, 화장실, 응급구호 공간이 확보된 80명 여명 규모의 대피소라고 한다. 이 뉴스는‘온돌’이라는 시설이 화제를 부르면서 각 언론사 사회면을 장식했고, 그 기사를 본 시민들에 찬반양론을 불러왔다. 인도적 차원의 빈민지원책이라는 긍정적 평가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방안
지난 11월9일 엽기적인 뉴스 하나가 인터넷을 뜨겁게 했다. 울산에 사는 한 남성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일본대사관에 소포로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끔찍한 것이었고, 이 남성은 외국사절 협박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흥미로운 것은 남성의 항변이었다. 그는 경찰에게“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 이후 한국이 일본에 인도적인 지원을 했는데도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택배를 보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즉 그가 화가 난 이유는 한국이 성금을 보내는 등 지원을 했는데도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뉴스가 안타깝게 느껴진 것은 저 남성의 기대와 순서에 대해서였다. 그는‘도와줬으니 우리 편을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한 것은 한국이 일본을 도와주고 나서가 아니라 수 십 년 전부터 해왔던 것이었다.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싫었다면 처음부터 지원 같은 것은 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거기에‘인도적(人道的)’이란 말을 붙이는 것은 과연 적절한 것일까?
2008년 8월30일 한겨레는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의 블로그 글을 소개했다. 오 시장이 블로그에 올린 글은“서울 시청은 일제에 의해‘일’(日)자형이었던 옛 중앙청과 함께‘본’(本)자형으로 지어졌으며, 일제 침략 상징물로 꼽힌다”는 것이었고, 이는 서울시청의 개·증축에 대한 설명이자 명분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겨레는‘사실이 아니다’ ‘근거 없는 속설’이라며 오 시장이 올린 글을‘엉터리 주장’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오 시장이 근거 없는 소문을 바탕으로 밀어붙이는 행정에 대한 염려와 질타였다. 이 기사를 보면 오 시장은 반일감정과 소문에 의존하여 시정(市政)을 밀어붙이는 시장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하지만 과연 오 시장의 글이 그렇게 비판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를 버릴 수 없다. ‘도시전설’을 퍼트린 것은언론과 재야학자들 2006년 7월27일 미디어오늘에 YTN의 부장급 간부가 투고한 글이 있다.“서울시 청사 개축…일제 문신‘본(本)’자부터 없애라”라는 강경한 논조의 기고문이다. 이 기고문을 보면 서울시를 하늘에서 보면‘본(本)’자 모양인데, 이것은 폭력집단이 조직원들의 신체에 문신을 새기듯 우리 국토의 심장부에‘일본’이라는 문자표식을 강제로
재일동포 2세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양영희 감독이 한국에서 공개한 영화 두 편이 있다.‘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이다. 이 두 영화는 일찍이 ‘위대한 조국 건설’의 꿈을 안고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간 오빠들을 만나기 위해 평양을 왕래하며, 홈비디오 카메라로 ‘평양의 오빠가족’과 ‘오사카의 부모님’ 모습을 담은 한 편의 가족 앨범이기도 하다. 제주도 출신으로 오사카에서 조총련의 고위 간부를 지내고 있는 아버지의 의향과 조총련 사회에서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세 명의 오빠는 차례차례 ‘귀국사업’에 따라 북으로 건너간다. 아직 어려서 일본에 남겨 둔 막내 여동생(양영희 감독)에게는 ‘너도 훌륭한 어른이 되어 나중에 북으로 오라’는 말을 남긴 채. 어린 여동생이 오빠들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11년이 지난 후. 냉전의 비극은 그대로 양 감독의 가족에도 영향을 미쳐, 오빠들은 북에서 생활하면서 잠시 동안의 일본 귀국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살고 있었다. 만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일본의 가족이 평양으로 오빠들을 만나러 가는 방법뿐. 몇 년에 한번 오빠들을 만나러 가서 보게 되는 조카들, 그리고 비디오로 찍어 온 오빠 가족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을 달
지난 10월26일 한국의 언론들은 ‘일왕 손녀가 소녀시대 춤, 日우익들 보고 있나?’ , ‘일왕 손녀도 한류팬… 소녀시대 춤춰’라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내용은 일본 천황의 손녀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이 일본의 한 주간지에 공개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뉴스를 접한 한국의 독자들은 일본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소녀시대의 음악에 맞춰 일본의 공주가 춤을 추었다는 것을 보고 묘한 쾌감을 느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류의 위력과 한국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실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쾌감과 실감은 과연 얼마나 사실에 근거해서 얻게 된 것일까? ‘상상’과‘뒷북’으로 쓰여진 기사 그 기사들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스포츠조선은 “일본의 주간지 ‘후미하루’는 지난주 발행한 최신호에 아키히토 일왕의 손녀 가코(17)가 학교에서 소녀시대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사진을 대서특필했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 기사는 사실과 다르다. 기사가 실렸다고 지목한 주간지에는 ‘소녀시대’라는 단어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급된 가수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에이브릴 라빈, 그리고 언급된 노래는 로이 오비슨의 ‘Oh Pretty Woma
이승엽 선수가 8년 동안의 일본 프로야구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2004년 진출 첫해에는 다소 부진했지만, 이듬해부터 점차 일본생활에 적응하며 3년차인 2006년에는 일본 내 최고 인기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부동의 4번 타자로 활약, 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군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성적은 하향곡선을 그리다가 결국 올해 이적 팀인 오릭스에서도 부활에 성공하지 못하고 올해를 마지막으로 일본생활을 접게 되었다. 이승엽 선수가 국내복귀를 선언하자 한국의 언론과 야구팬들은 이승엽 선수의 복귀뉴스로 떠들썩했다. 어느 팀으로 복귀할 것인가, 어느 정도의 연봉을 받을 것인가,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낼 것인가 등이 화제가 되며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일부에는 그의 복귀를 불편해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일본에서 은퇴하기를 바라는 목소리마저 있었다. 왜 그런 목소리가 나온 것일까? 이승엽 선수가 한국에 복귀한 후‘뛰어난 성적’을 올리는 것을 불편해 하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마지막 해에 타율 2할에 겨우 턱걸이를 하고 홈런도 15개에 그친 이승엽 선수가 만약 한국에 복귀해서 전성기와 같은 3할 타율에 홈런 40개 이상을 기록하는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에서는‘일본 역사교과서 문제’가 거론되었다. 일본 동북부 지진에 한국에서 거금의 성금이 모이고 있던 3월 말. 한국 언론들은 일제히‘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교과서를 발표한다’고 보도했다. 그리고‘한국이 일본을 위해 이렇게 성의를 모으고 있는데 뒤통수를 친다’는 식의 자극적인 해설이 이어졌다. 이런 신문 보도를 보고 한국사회가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이라는 것은 언론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진 성금 모금을 중단하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그 중에 몇몇 지자체는‘일본을 지원하자’고 호소해서 모은 성금을 갑자기‘독도 성금’으로 이용하겠다는 발표를 하며 애국심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소동에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일본 교과서에는 이전부터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었으며, 매년 비슷한 시기에 검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갑자기 생긴 변화가 아니라 매년 이루어지는‘연례행사’인 것이다. 교과서에 갑자기 독도 영유권 주장이‘추가’되었다면 한국 입장에서는 유감을 표명하거나 항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년에도 하고, 재작년에도 하던 절차에 대해 갑자기 올해만 항의를 하며 성금 전달을 중지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팽팽한 신경전과 치열한 경쟁이 이어지면서 예외 없이 등장한 화두가 있다. 바로‘친일’ 논쟁이다. 크고 작은 선거, 주요 공직자 임명 때마다 지겹도록 반복되며 제기되는‘일본’과의 연결고리가 이번에도 불거져 나왔다. 여기에는 여, 야의 구분도 좌, 우의 구분도 없다. 먼저 비판을 받은 것은 나경원 의원의 2004년 자위대 행사 참석이었다. 2004년 당시에도 네티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것이 7년이 지난 2011년 다시 등장한 것이다. 만약 나경원 의원이 보궐선거에 나오지 않았어도 7년 전의 그 얘기가 다시 거론되었을까? 그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선거에 나왔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일본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일본의 이미지로 덧칠을 하려는 사람들이 나온 것이다. 2004년 이후 잠잠했던 이야기가 서울시장 출마를 앞두고 뜬금없이 터져 나왔다는 것이 그것에 대한 반증이다. 진위 문제가 엉뚱하게 역사문제로 반면 박원순 후보는 집안의 내력과 병역문제의 불투명성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 중 하나는 작은할아버지가 1941년‘사할린에 강제로 끌려가 징용’되었다는 부분이었다. 1941년 징용되었다는 설명에 대해 한나라당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