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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카 쓰토무 “대북제재 유지해 납북자 문제 조속히 해결해야”

13개 강제 납북 피해국 중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강제 납북자가 있는 나라

일본인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가 한국 정부와 국제사회에 대북제재 유지를 통해 한국과 일본을 포함, 13개국에 걸쳐있는 강제 납북 피해자들의 송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호소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일본 레이타쿠(麗沢)대학 객원교수는 지난 2월 7일 유튜브 방송 자유북한TV에 출연해 납북자 문제의 역사와 현황을 설명했다. 그는 “한국이야말로 가장 많은 납북 피해를 본 국가”라면서, “DJ 정부 이후 묻혀버린 납북자 송환 문제를 다시금 이슈화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니시오카 교수는 일본인 강제 납북 문제를 40여 년간 연구하고 송환 운동을 펼친, ‘일본인 납북 전문가’이다. 그는 납북 문제, 특히 ‘요코타 메구미 사건’과 같은 일본인 납북 문제에 매진해 온 선구자적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아베 신조 현 일본 내각총리대신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주요 브레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니시오카 교수는 방송에서 우리에겐 생소한 일본인 납북 문제에 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일본 언론과 국민도 처음엔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일본 언론도 실은 좌경화가 심각하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그는 한국을 포함한 13여 개 국가의 납북자 문제는 북한의 핵 개발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이 세 번 만나면서 핵 문제에 이어 납북자 문제도 핵심 이슈로서 빠지지 않고 다뤘던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니시오카 교수는 현재의 강력한 대북제재를 유지해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력한 대북제재 유지를 위해선 북한의 핵무기 위협에 직면해 있고 가장 많은 강제 납북자가 있는 한국의 적극적인 대북제재 움직임이 중요하다며 행동을 촉구했다. 

이하는 니시오카 교수 인터뷰 전문. 


 

‘자유북한TV’ 日 한반도 전문가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 “일본인 납치문제의 본질과 현황” 



[자유북한TV]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제가 지금 일본 동경에 와서 호텔 방에 모시고 말씀 좀 듣고 싶어서 뵙게 되는데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 하면 생각하는 게 그렇게 많지를 않을 것 같아요. 근데 아마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일본인 납치자 문제,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한일관계도 이슈로 떠오르고 있으니까, 한일 관계 문제에서 특히 일본 정부의 태도, 뭐 이런 것들도 매우 궁금할 텐데, 오늘 그래서 제가 한두 가지 정도를 1부 2부로 나뉘어서 진행할까 합니다. 첫째는 아무래도 납치문제니까, 대한민국에 유튜브를 보는 사람들이 많고, 우리 또 북에서 온 친구들도 여러 가지 이야기하고 있는데, 납치문제가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이슈에서 빠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님께서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해서 한번 대한민국 국민에게 알려주신다는 입장에서 말씀을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니시오카 쓰토무] 그러니까 그 납치문제, 한국에서는 납북이라는 말도 쓰지마는 북한을 위해서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입니다. 그게 일본사람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있는 나라는 한국입니다. 


[자유북한TV] 그렇죠, 대한민국.


[니시오카 쓰토무] 대한민국이 첫 번째고, 두 번째로 피해자가 많은 나라가 일본입니다. 그런데 그 나머지, 세계, 일본 한국을 포함해서, 열두 개 내지 열세 개 나라에서 피해자가 나와 있습니다. 근데 일본인 납치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면은, 1971년에, 김정일이가 74년도에 후계자로 올라갔잖아요, 


[자유북한TV] 등극했죠.


[니시오카 쓰토무] 그러고 나서 다음 인민위원, 정부 다 장악하고 나서, 마지막에 3호 조사를 장악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여태까지의 3호 조사, 대남공작에 손 가는 대로 다, 이라는 결론을 내려서, 새로운 방침을 하달했어요. 그게 지도 핵심 공작원 입소해야 한다, 여태까지는 남한 출신 5부 같은 사람들을 공작원을 줬다, 그래서 실패했다, 이제는, 북한 내 핵심계층에서 뽑아서 오랫동안 교육을 해서 엘리트 계층의 공작원 입수해야 한다. 그게 지도 핵심 공작원’이라는 개념입니다. 그 지도 핵심공작원은 현지화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일본에 가면은 일본인 행세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남북 간에 많이 이슈가 됐잖아요? 그래서 한국에 가면은, 한국 사투리 쓸 줄 알아야 하고, 서울 지리도 알아야 하고, 그러고 중국에 가면 중국 사람 위장을 해야 한다. 그거를 현지화라고 하죠.


[자유북한TV] 네. 


[니시오카 쓰토무] 그러니까 이러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관을 데려오라. 이러한 납치 지령을 71년도에 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77년 78년 2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전 세계에서 납치가 있었어요, 그 한국 국민도 어, 아시는 요코타 메구미 씨, 그 열세 살 때 납치되었다, 이라고 유명하지마는 그 요코타 메구미 씨 사고는 77년 11월입니다. 아 그리고 요코타 메구미씨의 전 남편, 김용남 씨, 는 78년에 역시 서해안의 해수욕하러 갔다가 거기서 납치됐죠. 


[자유북한TV] 예, 그러니까 여기서 잠깐 좀 정리하면, 그 칠십년대 중반에 김정일이가 현지화를 위해서 9천 회까지의 대남공작, 대일공작 이런 것들을 제로 다, 없는 것과 같다, 앞으로는 현지화를 시켜서, 일본이면 일본, 한국이면 한국을 보내야 하겠다, 그래서 하는데 그전에는 한국에서 주로 어부들을 납치했다고 지금 말씀하시는 거죠


[니시오카 쓰토무] 예, 예.


[자유북한TV] 그럼 일본에 대해서, 일본 조총련도 많은데, 간첩으로 쓸만한 사람도 꽤 있었는데 이걸 또 없애고 일본 국민을 납치하는 건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니시오카 쓰토무] 그러니까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납치가 있다, 중국 사람도 납치했어요. 그게 김현희, 현지화의 전형적 케이스가 김현희


[자유북한TV] 김현희 씨죠, KAL기 폭파.


[니시오카 쓰토무] 네 김현희 그 사람은 1980년에 평양 외대 일본어학과 학생이었는데, 당에서 오라고 해서 선발됐어요. 그래서 공작원 교육을 받았는데, 1:1로 일본에서 납치된 피해자 부부도, 20개월, 같이 살면서 일본인 학교에 받았어요. 그런데 그 일본인 학교에 있기 끝난 후에, 마카오에서, 납치된 중국 사람한테 중국인학교를 받았습니다. 


[자유북한TV] 김현희 씨가?


[니시오카 쓰토무] 예. 그래서 중국 사람도 납치했어요. 그래서 그중에서 중국에 가서, 마카오인 가족을 만나서 사진 받고, 김현희 씨한테 그걸 보여줬더니, 이 사람이 우리 소생이다,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도 납치했다. 


[자유북한TV] 제가 계속 말을 끊어서 죄송한데, 또 궁금한 게 있어요. 대한민국 국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 김현희 양은 다 알지만, 김현희가 현지화 공작을 받기 위해서 그 마카오 사람, 중국 사람도 북한에서 납치했고, 또 일본사람도 납치했는데, 이걸 대한민국은 왜 이야기하지 않죠? 뭐 우익정권도 있고 좌익정권도 있었어요. 그동안 많이. 이런 것들을 알려줘야 하겠는데, 왜 대한민국 국민이 이런 걸 모르고 한국 정부는 이런 이야기를 왜 안 할까요?


[니시오카 쓰토무] 그러니까 우리가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 97년인데, 오히려 80년대 90년대는 한국이 북한에 대해서 공격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서, 일본에 정보를 많이 줬어요. 그러니까 김현희 사건도 한국에서 잡혀서, 한국에서 자백을 얻어내서, 한국에서 기자회견하고, 일본사람들이 납치되어있다는 것을 공개가 됐잖아요, 그게 88년이고, 그리고 요코타 메구미의 정보에 대해서 한국 국정원에서 그 여러 가지 정보 하는 과정에서, 열세 살 소녀가 납치되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우리한테 줬었어요.


[자유북한TV] 제가 탈북하기 전이니까, 잘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한국 정부에서 80년대까지는 줬네요.


[니시오카 쓰토무] 그렇죠, 일본 납치에 대해서도 조갑제 기자가 월간 조선에 80년대 중반에 썼어요. 저는 91년에 일본학자로서 납치문제에 대해서 논문을 썼었는데 그 전에 조갑제 기자가 월간 조선에 썼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후 DJ정부 후에 햇볕정책이라고 해서, 대북 간, 대공산주의 경계심이, 많이 없어져서, 그런 인식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고, 그리고 또 왜곡하고 있어요. 김현의 사건도 북한 소행이 아니다, 이라는 TV 프로를 KBS MBC SBS 그 세 개 방송국에서 했잖아요, 그래서 이대로 가다간 북한에서 테러를 당할 수도 있다, 어디 살고 있는지도 북한에, 방송국 기자들이 알릴 수 있다 해서 김현희가 서울에서 도망갔잖아요. 


[자유북한TV] 지방에 살고 있죠.


[니시오카 쓰토무] 그러니까 그 후 DJ정부 이후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91년도 제가 처음에 일본사람이 납치되어있다. 월간 잡지에 논문을 썼었을 때는, 일본사람들이 다 설마설마했어요. 아 조총련이 있는데, 조총련계 사람들이 많이 북송됐는데, 왜 일본사람들을 일부러 납치할 필요가 있느냐, 근데 그 증거가 있다. 김정일이가 현지화하라고 했다는 증언이 있었었어요. 


[자유북한TV] 공작원으로 왔던 탈북자 안명진이도


[니시오카 쓰토무] 안명진 씨도 그렇고 그 전에 있던 사람도 있고. 몇몇 사람이 있습니다. 안명진 씨는 나중이고. 


[자유북한TV] 네, 이야기를 다시 좀 원점으로 돌아가서요, 사실 저는 2000년대, 99년에 한국에 와서 하나원에서 1년 있다가 나왔으니까, DJ정권때부터 봤어요. 그런데 한국은 그게 벌써 20년이 됐는데 그때 십 대까지는 기억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삼십대가 그 세월이 왔는데 특히 뭐 문재인 정권에서 이런 이야기를 잘 안 해주고, 언론도 다 알아서 하니까, 안 알려주는데 그래도 저는 욕심입니다. 제가 어찌하였던 방송이 유튜브 방송을 하고, 라디오는 북한이 보내지만, 한국의 국내 청취자도 이게 김정은 정권의 북한 독재정권의 포악성, 악랄성을 이야기 해야 하는데, 납치문제가 특히 외국인 납치문제가 이게 정말 북한 김정은 정권을 이제 자유화시키고 공격하는 게 몹시 아플 거다, 이런 마음은 있는데, 제대로 된 적이 없어요. 사실은. 그래서 우리 교수님께서 요코타 메구미를 중심으로 해서 대한민국의 20대 30대에게 혹은 애국시민들에게 이 문제가 이렇게 벌어진 일이고, 또 인제 그분들이 부모님이 다 연세가 드셨으니까, 그에 대해서 그냥 강연해주신다,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니시오카 쓰토무] 그래서 그 요코타 메구미 씨가, 77년에 납치되었잖습니까, 그때 열세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김현희의 일본어 선생, 다구치 야에코씨는 78년에 납치되었으니까, 그 일본 정부가 인정하고 있는 납치피해자는 열일곱 명 중에서 구라파(유럽)에서 일본사람이 일본인을 납치한 케이스가 있어요, 그건 좀 특이한 케이스인데, 


[자유북한TV] 구라파에 갔다가.


[니시오카 쓰토무] 예. 근데 그걸 예외로 하면은, 한 사람은 80년인데 나머지 열두 명은 77년 78년 그때 집중적으로 납치가 있었어요. 일본본토에서. 그거는 76년에 김정일의 납치 지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코타 메구미 씨, 타구치 아야코씨는 거기 가서 먼저 조선말 교육받고, 주체사상 교육을 받고, 그리고서 공작기관, 김정일 정치 군사대학교라는 공작원 양성학교가 있는데, 거기서 일본어 교관이 돼요. 그리고 또 거길 졸업한 사람들은 초대소에서 1:1 교육도 받았는데, 김현희는 그런 케이스인데, 초대소에서 1:1 교육했습니다. 요코타 메구미 씨도 김현희의 동료 공작원, 김숙희 씨, 의 일본어 교사였다. 이라고 김현희 씨가 일본에 와서 가르쳐 줬어요. 김현희 씨는 요코타 메구미 씨를 만난 적이 있답니다. 근데 그 일본에서는 그러나 갑자기 사람이 없어졌는데, 설마 북한에서 공작원을, 공작선을 파견해서 일본사람까지 납치해가는가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자유북한TV] 그때 요코타 메구미가 열세 살이었다는 거죠.


[니시오카 쓰토무] 예 열세 살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르고 있었는데 일본 산케이 신문이 77년 78년 납치가 집중적으로 있었는데 80년에 처음으로 기사를 썼어요. 납치 가능성이 있다고, 그런데 일본사람 전체가 무시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 그리고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 87년이잖아요, 납치사고 십 년 후입니다. 십 년 후에 김현희가 자살을 기도했는데, 살아남았죠. 기자회견에서 일본말로 일본말은 납치된 일본사람에게서 배웠다, 이라는 기자회견도 했어요. 


[자유북한TV] 김현희 씨가 일본말로 한 거예요?


[니시오카 쓰토무] 네,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이 갔죠. 그런데도, 일본에서는 그때만 하더라도 좌파들이, 언론을 장악하고 있었고, 해서 언론기관에서는 그것도 한국 정부, 국정원의 조작이 아니냐는 식으로 썼어요. 그래서 88년에 기자회견을 했고, 또 일본 국회에서 국가공안위원장이라는 장관이 북한에 의한 납치 가능성이 난무하다 라는 역사적 답변을 했는데, 근데 NHK도, 아사히 신문, 요미우리 신문, 마이니치 신문도 한 줄도 안 썼어요. 


[자유북한TV] 우리 대한민국 현 정치 상황과 비슷하네요.


[니시오카 쓰토무] 그래서 제가 88년이고, 90년에, 일본 자민당, 여당이잖아요? 실력자, 실세라고 할 수 있었던 가네마루라는 사람, 그리고 타나베라고 그때 야당 사회당에 다수 경험자, 그 두 사람이 평양에 가요, 그게 88년 후에, 2년 후에 갔으니까, 당연히 납치문제에 관해서 김일성 만나서, 얘기해야 했었는데, 이야기 안 했어요. 그래서 경제협력을 해주려고 다음에 배상까지 해주려고 했잖아요, 거기 가면은 납치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또 그렇게 답변까지 되어있는데, 또 서울에 있는 김현희라는 증인까지 있는데도 이야기 안 했어요. 일본 사회가 지금 한국처럼 좌경화되어있었던 거예요. 그때 우리 내가 학자로서 91년도에 가네마루 타나베가 평양 간 다음 해에, 이러면 안 된다, 납치문제가 있는데, 납치문제를 무시해서 국교 정상화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논문을 하나 썼는데, 전혀 반응이 없었는데 일본 공항 관계자는 나한테 와서 신변의 문제가 없는가 테러당할 가능성이 있다. 그때는 일본 국내에서 일본사람을 납치할 힘을 갖고 있다면은, 일본학자를 테러할 수 있다. 교수님 조심하시라, 그런 증언을 들었어요. 그때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자유북한TV] 일본이 그때만 해도 뭐 말이 아녔네요.


[니시오카 쓰토무] 그러니까 (하하) 그런데 97년에 역시 한국 정부 기관에서 열세 살의 소녀가 납치되어있단 정보를 일본에 줬어요. 그런데 일본 경찰이 그걸 그냥 가지고만 있었고 공개를 하지 않았는데, 일부 언론기관에다가 한국 정부 기관이 흘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97년 2월에 요코타 메구미가 납치되어있다는 기사가 나왔어요, 그러고 나서 그때 가족들이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일본의 전문가들은 실명을 공개해서 기자회견 하면 조선노동당에서 없는 것이다. 증거를 없앨 수가 있다. 죽일 수가 있다. 이런 어드바이스를 했어요. 그런데 77년에 납치가 있었고 97년이잖아요 20년 동안 그렇게 국회 답변도 했었고 정치인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났는데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 일 안 일어나고도 20년 지나갈 수 있다. 위험 있지마는 일본 국민에게 호소하자. 그래서 실명 기자회견을 요코타 부모가 먼저 요구를 했고, 그걸로 보고해서 다른 가족들도 기자회견 했습니다. 이게 그 기자회견 사진입니다. 첫 번째 기자회견인데, 


[자유북한TV] 이 사진 저도 찾아봐서요, 한번 전부 다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니시오카 쓰토무] 일본 정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한국말로 있습니다, 그게 97년 3월입니다. 그리고 5년 동안 일본 국내에서 싸웠어요. 납치가 있다. 없다, 우리는 납치가 있다고 주장했고, 조총련은 없다고 했고, 북한은 당연히 없다고 그러고.


[자유북한TV] 그다음에 저희가 아버지 어머니 동생 다 만나봤지 않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정말 외롭게 힘들게 싸웠는데, 교수님 말씀 비슷하게 했어요. 그렇게 싸울 때 일본 국민이 누구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고. 그래서 정말 절박한, 어찌 보면 이것도 한국의 상황이랑 비슷하죠. 납치문제 본인들 가족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지금 받아주지 않으니까. 이런 안타까움이 있는데, 그래도 일본은 참 그나마 그래도 이제 납치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지 않았습니까?


[니시오카 쓰토무] 그래서 지금 아베 신조 씨가 총리잖아요? 아베 신조 씨는 아베신타로라는 아버지가 외무부 장관지 했던 정치인이에요. 아버지 비서 시절부터 이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자유북한TV]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말씀하시던 도중에 아베 씨라고 했어요. 이게 가능한가요?


[니시오카 쓰토무] 아베 상이라고 부르죠 일본말로는


[자유북한TV] 아 상이 씨와 비슷한가요


[니시오카 쓰토무] 지금은 아베 신조 이름 이야기했어요


[자유북한TV] 제가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대통령 이름을 쉽게 부르시더라고.


[니시오카 쓰토무] 아니 그건 자유민주주의 국가니까 자유롭게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천황폐하에 대해선 그렇게 할 순 없어요. 


[자유북한TV] 아.


[니시오카 쓰토무] 그렇게 총리하고 천황폐하하고 차이가 있고, 대통령은 원수니까 어느 정도 예우해야 한다, 근데 존칭이기 때문에 존칭은 유연한 사고인 거잖아요


[자유북한TV] 북한에서는 극존칭이라고 그러죠. 극존칭으로 안 쓰면 아이고 그냥 죽어요. 사람들이 평생 살면서 북한사람 불쌍하다 싶은 게 같은 사람들인데 한번 제대로 이름을 불러주면 안 될까 봐 이거 북한사람들에게 방송으로 알려주는데 위대한 영도자 최고수반 원수님 이런 극존칭 안 쓰면 북한사람들이 불쌍한 거 중에 최고 불쌍한 게 평생 살면서 자기들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이름으로 한번 불러보는 거예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시오카 쓰토무] 그래서 아베 총리 그때는 국회의원이었는데 97년에는, 몇 안 되는 국회의원들이 우리 편이었고 그리고 산케이 신문은 처음부터 납치문제를 보도했으니까 우리 편이었고 나머지 언론들은 납치 의혹 의혹이라고 썼어요, 그러니까 납치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이 있고 아니라는 사람이 있다 뭐 그런 식으로 썼는데 그래도 국민에게 직접 호소해서 서명받고 계속하다 보니까 5년 후 2002년도에 고이즈미 총리랑 가게 됐잖아요. 그때는 납치문제가 정식의제가 됐어요. 납치문제에 관해서 답을 받지 못하면 이 방문이 실패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어서 그래서 고이즈미 총리가 2002년 9월에 김정일을 만났더니 김정일 스스로가 납치했다, 


[자유북한TV] 물어도 안 보는데? 물어는 봤겠죠


[니시오카 쓰토무] 많이 물어봤죠. 그런데 그땐 김정일이 답을 안 했는데 점심시간에 아베 총리가 관방부 부장관이었는데 같이 갔어요. 큰소리로 마이크가 있는데 알아서 김정일이가 직접 납치를 인정하고 사죄하지 않으면 그냥 가자고 고이즈미 전 총리한테 이야기했어요. 근데 그때 평양에 있던 사람에 말을 하면은 원래 시나리오는 김정일은 납치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적십자가 조사했다고 해서 적십자 차원에서 자료를 주게 되어있었대요, 근데 그 아베 총리가 그냥 집에 가자 했기 때문에 김정일이가 즉석에서 판단해서 오후 세 시쯤 돼서 본인 스스로가 납치 인정했고 또 사죄까지 했다. 그건 북한사람들은 모르죠. 


[자유북한TV] 아 북한사람들은 모르죠. 한국언론에서도 잠깐 나왔는데 그게 묻혔죠. 묻히다시피 살짝 스쳤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일본인 납치문제에서 정말 중요한 이슈는 김정일이가 제 입으로 시인했다는 거예요. 사죄하고 시인까지 했죠. 네네.


[니시오카 쓰토무] 그러니까 여기 사진에 있는 김정일이랑 고이즈미 총리가 앉아서 그때 다섯 명의 피해자가 왔죠. 나머지 여덟 명은 죽었다. 


[자유북한TV] 다섯 명 피해자도 그냥 갔다가 오라는 거였잖아요.


[니시오카 쓰토무] 그러니까. 근데 요코타 메구미 씨는 죽었다고 발표를 했는데 죽었다는 증거가 없었어요. 유골이라는 것이 나중에 왔는데 DNA 검사를 하니까 집에 있던 메구미 씨의 머리카락이 있었어요. 북한 쪽에서 보내온 유골의 DNA와 비교하다 보니까 전혀 다른 유골이 왔다는 과학적 결과가 나왔고 의사가 서명한 사망진단서도 왔는데 그걸 보니까 메구미 씨가 93년도에 죽었다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귀국한 하쓰이케씨 부부는 94년 4월까지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그래서 93년에 자살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게 일본에서 보도가 되니까 북한 쪽에서는 착오가 있었다. 94년이라고….


[자유북한TV] 아니 그렇게 똑똑한 북한 정부가 왜 그런 걸 그렇게 실수를 하죠. 


[니시오카 쓰토무] 글쎄요, 그게 잘 모르겠는데 이유는 어쨌든 그 사람들이 일본 편이 아니다. 우리 편이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일본에 갔다가 다시 올 줄 알고, 그럼 비밀이 지켜질 줄 알았죠.


[자유북한TV] 다섯 명이 갔다가 오라고 했으니까 당에서.


[니시오카 쓰토무] 그리고 그 사람들도 일본에 오느니 마느니 그런 이야기 하지 않았고 일본에 있겠다는 결심을 한 후에 우리에게 연락을 줬어요. 그러니까 그게 오판이었던 거예요. 어쨌든 간에 메구미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죽었다는 증거가 없으니까 일본 정부도 그렇고 우리도 살아있다는 전제로 구출해야 한다, 그러니까 일을 하잖아요? 특히 3호 조사에서 교관이었다 한다면은 특별관리를 하고 있는데 여덟 명 중에서 한사람 어치 유골도 없고 사망진단서도 없고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데도 그런 사진도 없고 증거가 없어요. 그냥 저 사람들이 죽었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2002년도에 그 사망증거를 대지 못했다는 것은 살아있었기 때문에….


[자유북한TV] 이런 생각도 해봐요. 피해자들을 북한에서 진짜 간첩들을 교육하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자유인이 됐다. 그럼 북한의 비밀이 싹 다 드러나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더 못 내놓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일본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해요. 김정일한테 일본어 가르쳐 주고 가정교사도 해주고 이런 말이 있는데 첫 번째 사례나 두 번째 사례나 똑같은 말이죠. 어쨌든 북한의 최고의 비밀이 다 나가게 되니까, 기어이 끌고 앉아있는 것 같은데.


[니시오카 쓰토무] 김현희 씨 말에 의하면 김정일의 비밀파티에 갔다, 거기 가면 한국노래 부르고, 그런 걸 목격했으니까, 최고지도자의 사생활을 안다. 그러니까 3호 조사 공작기관의 비밀을 안다, 최고지도자의 사생활을 안다 이 두 가지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임에도 죽었다고 해라, 덜 알고 있는 사람 다섯 명을 보내라. 그것도 보내라고 한 게 아니에요. 살아있다고 해라, 평양에서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다, 귀국하기 싫다고 하라고 했잖아요. 근데 어쨌든 간에 그렇게 되고 일본 국민은 아직 납치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아베 총리가 2006년에 대중적인 인기가 오른 이유가 2002년도에 다섯 명 피해자와 같이 비행기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아베 총리, 납치문제다. 그때 납치가 없다 없다 하는 대다수 의견이 있었을 때 용기 있게 납치가 있다고 해서 일본 정부 내에서도 최우선으로 피해자 구출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어떻게든 다섯 명을 구출해냈으니까.


[자유북한TV] 그때 그 없다 어쩌고저쩌고하던 사람들이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일본사람들 감정이 어땠을까요? 감정이?


[니시오카 쓰토무] 가장 큰 쇼크를 받았던 단체가 조총련이었어요. 조총련에서는 정말 납치가 없었다고 믿고 있었대요. 설마, 우리 조국이 그런 일을. 안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장군님이 시인하고 사죄하고 조선 국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대다수 거기서 이탈했어요. 아니면 일본에 귀화하던지. 일본 밑에 조선인 인구가 60만 명 정도 있는데 조선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삼만 명.


[자유북한TV] 그러니까 이 북한이 거짓말쟁이라는 게 저 있을 때 60만 재일동포가 당과 조국에 충성하고 일본놈들의 탄압 속에서 열심히 싸운다고 했단 말이에요. 또 어느 날은 70만 재일동포들 그래요. 내 그 소리 듣고 탈북을 했었는데, 지금 말씀하시는 거 들어보면, 그전에도 알았습니다만, 4만 명 될까 3만 명 될까. 


[니시오카 쓰토무] 3만 명, 요새 2만 몇천 명.


[자유북한TV] 그래도 북한은 70만 재일동포들 그럴 거예요. 장군님의 전사들. 


[니시오카 쓰토무] 근데 70만 명 정도의 코리안은 있어요. 그런데 90여 퍼센트는, 3만 명밖에 없다. 그렇게 된 계기가, 2002년도에 김정일이가 납치를 인정했다는 거고, 그 후 또 핵 개발 안 하고 있다 하면서 핵실험 한 거고.


[자유북한TV] 그러니까 조총련은 철석같이 장군님을 믿었네요.


[니시오카 쓰토무] 그리고 일본 사회당도 거의 없어졌어요. 그 이유가 역시 납치를 김정일이가 인정했기 때문에, 그때만 하더라도 일본 사회당은 자기들 홈페이지에 납치는 조작이다 논문을 게재하고 있었고.


[자유북한TV] 그래서 이제 납치문제가 일본 사회에서는 정말 뜨거운 불씨가 돼서 북한과의 관계에서 늘 납치문제가 대두되고 있는데, 납치문제가 이제는 벌써 해결됐어야 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요코타 메구미 부모님들을 만나봐도 연세가 너무 드셨다, 내가 보기에도 안타깝고, 내가 괜히 죄스러워서요. 아 내가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나, 내가 괜히 죄스러워서요, 인사를 하기도 꺼려져요. 사실은. 이런 상황인데, 다른 가족분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세대가 바뀌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메구미 아버지, 어머니보다 동생이 나와서 하는 걸 보고 와 이제 납치문제가 세대가 바뀌네! 이런 생각이 드는데, 그에 대한 입장이라던가 교수님이 계시는 NGO 단체의 입장이라던가, 간략하게 정리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니시오카 쓰토무] 그리고서 납치가 발생한 지 40년 이상 지났잖아요? 앞의 30년 동안은 일본 정부 내에 납치 대책본부도 없었고 장관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일본 정부의 최우선과제로 납치문제로 삼는 거였어요.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거고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다. 그러니까 최우선으로 납치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랬더니 2006년에 납치 본부가 생기고 장관이 생겼습니다. 그럼 14년 정도 됐죠. 그러고 나서 일본 정부의 준비는 어느 정도 됐다, 이제 문제는 국제사회다. 국제사회에다가도 납치문제를 호소해서, 국제사회가 북한을 제재할 때, 납치를 포함한 인권문제까지 제재의 이유로 포함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북한을 압박해서 선 압박, 후 협상 전략으로 가야 한다, 이런 전략을 갖고 전 세계에 가서 납치피해자 가족을 우리가 조사했어요. 


[자유북한TV] 그렇죠,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과 교수님 단체가 열심히 조사하는 것 보고 큰일 내겠다고 했는데.


[니시오카 쓰토무] UN의 안보이사회 가서도 호소도 하고 했는데 결국 북한이 김정은 시대가 돼서 핵 개발 의사를 노골적으로 하니까 2017년 이후, 아주 강한 제재를 가했잖아요? 그 이유 중에 납치문제도 들어가 있어요. 그 제재를 리드하고 있는 나라가 미국과 일본이잖아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핵 개발 멈추지 않으면 전쟁까지 하겠다, 이라고 압박을 했는데 이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을 두 번 만났고, 회담은 두 번 했고, 만나기는 세 번 했는데, 두 번의 정상회담에서 세 번, 일본인 납치문제를 세 번 언급했어요. 그러니까 압박을 먼저 하고 나서, 그 이후에 납치를 포함한 인권문제를 집어넣는다는 아베 정부하고 우리 가족회가 세워놨던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다만 그것은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가 외과수술은 아니므로 시간이 걸려요. 제재가 아프긴 아픈데, 독재국가에선 자기들은 먹고 살잖아요. 인민들이 아무리 굶어 죽어도, 인구의 15%가 굶어 죽어도 제재 효과가 있는데도 북한이 버티고 있다. 다만 국제사회는 최고도의 제재를 유지하고 있고, 제재 위반을 하면 미국이 세컨더리 보이콧으로 위반한 나라를 제재하는 시스템을 우리가 갖췄다. 국제제재를 완화 받고 싶으면 핵 개발 포기하라, 납치된 사람 다 보내라, 협상장에 나오라고 우리가 김정은보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고, 트럼프하고 협상장에 나오긴 했지마는, 모든 핵을 포기하겠다고는 안 했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되는 상황이죠.


[자유북한TV] 이런 식으로 계속 압박을 가하다 보면 분명 김정은이 항복하는 순간이 올 그거로 생각하고 있고요, 그래도 조금씩 지연되는 그것은 중국과같이 계속 관광객을 보낸다거나, 문재인 대통령도 관광하길래 이게 무슨 한 나라의 대통령이 시진핑을 따라 하나, 하고 안타까운 적이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보면 당사국인데, 핵과 미사일. 말씀하셨듯이 한국에도 얼마나 많은 납치자가 있어요? 국군포로 문제도 있고. 


[니시오카 쓰토무] 그리고 또 핵미사일 문제는 한국에 쏠 수도 있잖아요? 위협을 첫 번째 한국이 받고 있고, 두 번째 일본이고, 미국은 또 멀리까지 쏠 수 있잖아요.


[자유북한TV] 이런 문제들이 이제 대한민국의 애국시민들에 의해서, 혹은 열정적인, 제대로 된 우파정권이 서면 많이 나아지리라고 봅니다. 저는 일본에 올 때마다 미안한 게 납치문제, 그 가족들에게 송구스러워요. 그러니까 이런 문제는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고요, 우리 교수님께서 끝까지 납치문제, 피해 가족들을 대변해서 끝까지 북한 정권에 대항해서 일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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